안동김씨 족보의 효시 [경진보]의 간행(발간)시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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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11-05-11 19:47 조회2,019회 댓글0건본문
안동김씨 족보의 효시 [경진보]의 간행(발간)시기에 대해
●들어가는 말
[경진보]는「안동김씨 성보」의 별칭으로, 성보의 서문을 찬하신 감사공(억령)의 서문 속 ‘만력 8년(1580년)’에서 문화류씨의 영락보와 가정보, 안동권씨의 성화보 등, 중국 연호인 만력을 쓰지 않고 1580년이 간지로 경진이 되니 부르기를 [경진보]라 한다.
과거에는 현재처럼 특정 출판사나 발간처가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에, 보통은 족보의 서문에 쓰인 간지와 (중국)연호로 그 족보의 간행시기를 가늠하여 좀 더 빠른 시점을 두고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하는 성씨들의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서문을 쓴 해가 꼭 간행된 해라고는 볼 수 없다.
현재는 책이 다 완성이 되면 지은이들이 편집후기(발문)를 쓰고, 발간사나 발간 축사(서문)를 의뢰하여 편집 후 출간하는 순탄한 과정이겠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러하지 못하였고 안동김씨 역시 족보의 발간이 지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아래에서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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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말
먼저, 의문을 품고 접근하게 된 [경진보]의 실제 간행시기와 특정인물인 충익공의 등재를 살피기 전에 경진년을 전후하여 생몰년이 확실하고 혼사와 인물간의 교유가 정확한 계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진(1580)보] 속 효헌공(눌암) 등재 내용
※효헌공 김찬(경진보 발문 찬) - 4녀 ♡ 한양 조경(김시양 신도비 찬자)
김찬(金瓚, 1543-1599), 김시양(時讓, 1581-1643), 조경(趙絅, 1586-1669)
족보의 발(跋)은 지금의 편집후기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발문을 쓰신 효헌공께서는 본문 계보에 등재된 휘자 아래 벼슬명과 발문에서 밝힌 벼슬이 헌납으로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편집과 발문은 동일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녀의 여(女)는 넷으로, 자녀 아래는 모두 출가 전이라 공란으로 남아있다.
넷째따님이 바로 한양인 조경선생의 배우자로 편집당시 이미 태어났으며 생년을 추정하면 조경과 비슷한 1586년을 전후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효헌공께서 편집과 동시에 발문을 쓰신 시점에는 조경(1586년생)과의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조경은 효헌공 사(1599년)후에 사위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효헌공의 큰따님은 터울로 짐작하면 1575년을 전후할 터인데, 역시 배우자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발문을 지으신 시점은 효헌공의 몰년(1599년) 전으로, 조경의 배우자인 4녀의 생년으로 가늠할 수 있는 1585년 전후로 서문을 쓴 1580년 이후임을 확인할 수 있어, 감사공(억령)의 서문과 효헌공의 발문까지도 한참이 지났음을 간과할 수 없으니 서문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단을 받거나 편집의 완성 후 간행이 곧 이루어진 게 아니라 편집상태에 놓여있었거나 미루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래에서 살필 충익공의 등재에 따라 서문 이후 바로 [경진보]가 간행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이 1585년 무렵을 효헌공께서 서문을 지으신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넷째따님의 생년은 물론 장녀 역시 출가 전이며, 효헌공께서는 이후 관직과 함께 벼슬이 올라 헌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진(1580)보] 속 지봉선생(이수광) 등재 내용
※도사공 대섭(大涉, 1549-1594) - 장녀 ♡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우리 [경진보]에, 본문 계보의 필체와 같은 획, 절을 갖춘 李睟光(이수광)이 도사공의 맏사위로 등재가 되어있으니, 이는 지금의 수단(경진보 편집)에서 이미 지봉선생은 도사공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1563년생인 지봉선생이 당시 조혼으로 1580년 간 [경진보]에 등재된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으며, 선생의 장자인 이성구(1584년생)의 생년을 미루어 짐작하면 도사공의 큰따님과 이수광은 [경진보]의 발간 전에 혼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1584년에 장자 성구를 생산한 기록으로 보아 이수광의 등재에 따른 [경진보]의 편집완료 시점 역시 추측할 수가 있겠다.
이수광의 처제로 손아래 동서인 허균(1569-1618)의 배우자는 1571년생으로 허균과의 혼사가 1585년에 이루어져 허균의 사위 등재는 가필(加筆)로 되어 있으니, 단순하게 이수광과 허균의 등재로만 보면 [경진보]의 초간이나 증보 재판은 1585년이 전환점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도사공의 생년(1549)과 큰 외손자(1584년생 이성구)의 나이차가 35년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으니, 허균 배우자(차녀)의 생년(1571)으로 장녀(이수광 처)의 생년을 추정하면 이수광보다는 어린 나이임을 알 수 있다.
허균의 혼사와 가필 등재에 따르면 1585년을 기점으로 초간(판)이나 원판이 앞서 진행되었을 것이라 논할 수 있으나, 이어 살필 충익공의 등재는 허균에 앞서 이루어진 최초 계보작성자(미상)의 필체여서 허균에 대한 가필은 충익공 등재 이후로 보는 게 설득력이 있다. 이 같은 이유는 충익공의 개명 휘자인 시양의 등재를 1612년 이후로 보는 시각과 함께 미상인 계보작성자가 류희잠의 편찬참여부터 생존한 인물이기 때문에 적어도 1623년 이후부터는 생존여부까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경진(1580)보] 속 충익공(하담) 등재 내용
비안공 인갑(仁甲, 1534-1594)의 막내아들로 좌랑공 시훈(時訓), 양덕공 시열(時說, 1569-1645)의 아우이며 시(時)자 항렬과 말씀언(言)변을 따라 시양(時 言昜, 1581-1643)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言昜)의 양(昜)은 양(陽)의 고자(古字)며 양(襄)의 평성이 陽이므로 양(言昜)은 곧 양(讓)이다. 따라서 시양(時 言昜)은 시양(時讓)이다. 양(昜)과 역(易 또는 쉬울 이)은 다른 자임.
충익공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외, 고문서 기록을 보면 1605년의 문과 합격(입격, 동방)과 광해 즉위년(1608년) 2월 2일의 광해 등극 장면 기록의 기사에도 ‘왕(광해군)이 면복을 갖추고 대정의 배위로 나아가니, 도승지 유몽인, 기사관 김시언(金時言)이 입시하였다(요약 발췌)’라는 기록을 봐서 충익공은 전라도도사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하며 임금(광해)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1612년부터 인조반정(1623년)으로 풀려날 때까지 유배(종성에서 영해 이배)기간인 점을 감안하면 출사이후 유배가 끝나는 시점인 1623년까지 지금의 공문서(왕실기록) 모두에는 김시언(言)으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개명의 흔적이 실록에 비로소 발견되는 기사는 유배에서 풀려난 1623년(인조반정)의 암행어사 명단이다. 여기에는 [김시언, 김시양]이 등장하는데, 두 명으로 오인하여 번역한 이 명단의 현대적 표현은 김시언(김시양)으로 반정 전에 개명을 하여 조정에 바뀐 휘(이름)를 (재)등록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로 미루어 조정에서는 문과이후, 김시언을 계속해서 쓰다, 인조반정(1623) 이후 잠시 시언(시양)으로, 초명(개명)을 함께 쓴 후 나중의 졸기까지는 시양으로 개명한 휘(시양)만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행장과 조경이 찬한 신도비문에서와 같이 충익공은 1612년을 기점으로 시언을 버리고 시양(時讓)으로 개명하였으니 충익공의 [경진보] 등재는 빠르면 1612년이 기점이 될 것이며, 늦으면 1623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어, 결국 1612-1623 연간이 아니면 그 후로도 볼 수 있겠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당시 조선이 처한 시대적 분위기(배경, 환경)를 붙인다.
※[경진보]서문 이후 조선의 시대적 배경(정치상황) 요약
1580(경진보 서문) - 1592(조일전쟁) - 1597(정유재란) - 1623(인조반정)
반정 후에도, 곧 조선은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을 거치며 격변기를 보냈고, 그 속에서도 정쟁(政爭)은 계속되었고 극도로 혼란한 시기를 겪게 되었으니, 이 모든 걸 감안하여 판단해 볼 때 [경진보]의 실제 간행까지는 곡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가는 말
※[경진(1580)보]의 간행까지 선조님의 행적과 조선의 시대적 상황 해설
○1548년 이후부터 1580년 [경진보] 간행 전까지(족보 완성)
정언공(김익) 작고(1548년) 후, 통천공(곽)이 화성원으로 있을 때 귀양살이 하던 지금 선공부정인 류희잠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정리시켜 족보를 완성하니(하략) - 경력공(제현) 발문 요약.
류희잠은 당시 귀양살이 하며 1562년 가정보를 편찬하였으니 이 무렵을 전후하여 통천공께서 류희잠에게 [경진보]의 편찬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1580년 - 경력공 발문에 따라 지금의 초판 1쇄 간행(?)
감사공(억령, 1529-1589)께서 [서문]에 만력 8년(1580년)이라 함.
○1580년 - 1585년 연간
충익공과 친분이 두터웠던 장자 이성구(1584년생)를 생산한 지봉 이수광(1563년생)의 등재.
발문을 찬하신 효헌공의 헌납 벼슬은 1585년 무렵이며 조경(1586-1669)선생의 배우자인 넷째따님이 태어났으며 장녀도 출가 전이다.
○1585년은 가필(加筆)로 등재된 허균의 초혼이 있었던 해다.
허균의 등재는 빠르면 1585년을 기점으로 볼 수 있어 [경진보]의 초판이나 2쇄, 3쇄 등이 먼저 진행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충익공의 등재 이후로 보는 게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나중에 부기함. 또한, 왕조시대에 허균의 정치적 생애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좀 더 지난 시점에 가필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1585년 이후
1581년생인 충익공께서 시언으로 등재가 되었다면 1585년(허균 혼사) 이전의 초판이나 2쇄, 3쇄 등을 통해 충익공의 등재 후, 허균의 등재를 혼사 시점인 1585년 이후 연이어 등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충익공의 개명 휘자인 시양(時讓)의 등재로 볼 때, 허균의 등재는 빨리 잡아도 1612년 이후로 보는 견해가 우선된다.
○1612년 - 1623년 연간, 그 이후
충익공의 개명시기(시점)와 개명 휘자인 시양(時讓)의 등재로 보아 16세기 후반부터 편찬에 참여하여 계보를 작성하였을 미상의 필체 주인공의 생몰년을 추정한다면 충익공은 마지막 인물이 될 것이다. 또한 먼저 나신 선조님들은 더러 누락이 되었지만 1581년 이후에 나신 인물들은 조경의 배우자 외에는 [경진보]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의 [경진보] 편찬 참여자들과 서문, 발문 찬자들의 생몰년과 1562년 가정보를 편찬한 류희잠의 추정 생애를 참고하면 계보작성자의 졸년까지 대략 판단할 수 있겠다.
※참조(계보 작성자는 참여자 중 어리거나 하위직으로 봄)
위와 같은 견해는, 휘자나 경력, 벼슬 등을 수단에 의해 단순히 기록만 하였을 것으로 보는 한편, 필체를 명필이거나 유려하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편집에 있어 집필진 중 고령자 보다는 조금 어린 이가 서기 역할을 담당하며 본문의 계보를 작성하였을 것으로 판단한 것임.
김곽(1486년 이후 출생, 1525년 진사, 하양원 재직 중 류희잠에게 부탁)
류희잠(1545년 의성유배, 1562년 문화류씨 가정보 편찬)
감사공(억령, 1529-1589, 서문 찬)
경력공(齊賢, 1535생, 1570 문과, 발문 찬)
효헌공(瓚, 1543-1599, 발문 찬)
●[경진(1580)보] 간행 연보 정리(사견)
○1580년 - 서문과 경력공 발문에 따라 지금의 초판 1쇄 간행(?), 경력공(제현) 발문 :‘류희잠에게 부탁해 원고를 정리시켜 족보를 완성(약기)’
※족보의 완성은 편집이나 서문 찬 등의 편찬절차가 끝났다는 것으로 족보가 나온 출판, 즉 간행(발간) 후 배부는 아니라고 해석 함.
※서문과 경력공 발문에 따라 지금의 초판 1쇄 간행 후 효헌공의 발문을 붙여 제책된 2쇄 발간 - 효헌공께서 발문을 찬한 시점과 함께 충익공(1581년생)의 초명(시언) 미등재에 따른 개연성.
1584년에 장자 성구를 낳은 이수광(1563-1628)의 사위 등재.
○1585년경 - 발문찬자 효헌공(찬)의 헌납 벼슬과 사위 조경(1586년생)의 배우자 탄생, 따님 넷 모두 출가하지 않은 상태. 이 같은 견해는 일부 파(지금)의 누락에 따른 가설로, 반대로 일부 파는 계속해서 수단을 받거나 증보를 통해 등재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효헌공 따님 넷의 등재와 함께 뒤 이은 충익공의 등재를 말함.
1585년에 혼사가 있었던 허균의 기록은 가필(加筆)로 이수광과 충익공의 등재 이후, 즉 [경진보]의 초간(1쇄)이나 2쇄, 3쇄 이후로 봄.
○1589년 - 서문 찬자 감사공(억령) 몰년.
○1592(조일전쟁) - 1597(정유재란) : 임란으로 선조, 광해 분조로 혼조. 이어 전란 수습기와 광해조,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있어 나라가 이 지경에 처한 시기에 문중의 족보편찬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점.
○1612년 전 - 충익공 초명 김시언(言)으로 정치활동, 1608년 광해 등극.
○1612년 - 1623년 : 충익공 유배기간, 광해(혼조) 재위기간. 충익공 시양으로 개명(행장과 신도비)
○1612년 - 1623년 연간(충익공 개명 시기), 그 이후(?)
1580년 이전부터 편찬에 참여하여 계보의 글씨를 쓴 알 수 없는 초간본 필체(계보 작성자 미상) 주인공에 의한 충익공 등재.
※충익공의 등재를 초간본의 막바지(증보)나 초판 1쇄, 2쇄(?) 등의 이후 증보(再版)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도 볼 수 있겠으나 서문을 쓴 경진년 당시, 이후 계속해서 1, 2차로 순차적인 수단이 진행되었는지,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의해 간행을 미루고 있었던 경우인가는 궁금한 과제로 남는다.
○1623년(인조반정) - 1627년(정묘호란) - 1636년(병자호란)
○충익공 등재 후 허균의 가필 등재 - 허균의 정치적 생애 및 본문과 다른 필적(가필) 기록 확인.
※수단에 따라 계보를 작성하던 미상의 인물은 허균을 기록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거나 이미 죽어, 허균은 다른 이에 의해 가필됨. 온전한 원판(본)이 없어 확인 불가하며 충익공과 허균의 등재시기와 간격은 알 수 없음.
※[경진보]는 허균이 등재된 [경진보 영인본] 이전에 초간(1쇄), 2쇄(?), 3쇄(?) 등의 발간이 있었을 것으로 봄.
※[경진보] 초간본(불전) - 경력공 발문에 따라 족보가 완성되어 서문을 의뢰하여 발간하였다고 보는 시각(또는 간행이 늦어짐)
※[경진보] 증보판(불전) - 효헌공 자녀기록과 발문에서 드러나는 자녀의 생년과 효헌공의 벼슬(헌납)로 판단한 시점을 1585년 전, 후로 보는 견해(또는 간행이 늦어짐)
※[경진보] 증보판(불전) - 충익공 개명시기(1612-1623)와 개명 휘자 시양의 등재(위 증보판과 더불어 발간하였거나 또는 간행이 늦어짐)
※[경진보] 영인본(현재) - 허균까지 등재되어 있다(마지막 증보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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