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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보] 간행시기 소고(본론에 앞서, 신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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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11-05-11 19:45 조회1,6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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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성보[경진보]의 이해(이하 경칭생략) - 2

●본론에 앞서------

다음 글은 안동김씨 [경진보]의 실제 발간시점에 대하여 작성자 본인이 순전히 뒷날에 형편이 되어 본인의 직계 10대조이신 안주공(휘 繁) 이하의 가계사를 다루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두 살 난 아들을 남겨두고 35세를 일기로 조졸하신 조부님과 선친의 생애와 개명(改名)에 관한 개인사를 기록하며 다음을 설명하거나 다음의 끝을 이끌어내기 위한 동기가 된 개인의 신변잡기로, 생가와 양가(養家)의 선대를 살피며 멀게는 조선조 충익공부터 선친의 삶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중 작명과 수명(壽命), 개명과 출계에 따른 생애의 변화와 영향 등을 알아보기 위한 자료를 정리한 일부분으로 개인기록을 대략 가감 없이 발췌하여 올린 후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조부님 선대 간략계보 및 설명

양덕공(시열) - 안주공(번) - - - 주주(周主) 출계(양자)

충익공(시양) - 합천공(곡) - - - 주주(周主) - 대호(大鎬), 수호(壽鎬)

˅조부(學主, 보명 周主) - 백부(大鎬, 조졸), 선친(壽鎬, 개명 秀鎬)

˅백부 - 자녀에 관해 집안에서 쉬쉬하여 존재여부 알 수 없음

˅선친 - 장자(상준, 조졸), 상석(본인, 필자) - 선응(先應)

○조부님은 어린 네 자녀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으며 백부님 또한 일제강점기에 학업을 마치고 해방과 함께 교사발령을 앞둔 상태로 19세에 조졸하시니,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16세에 해방을 맞고 6.25동란과 군 생활 8년(중사 전역)을 거치며 당시 늦은 결혼과 함께 귀향, 장남의 취학 전 조졸 등을 겪으신 선친의 생애는 얼마나 고달프시고 외로운 삶이었겠는가? - 중략 - .

양자 출계 후 가장이신 조부님의 갑작스런 조졸로 가세가 기울고 석연치 않은 백부님의 사인, 형의 죽음 뒤에 선친께서는 목숨 수(壽)자를 버리고 빼어날 수(秀)자를 취하여 개명을 하셨다. 대문의 문패도 바꾸셨으며 부고(訃告)는 집안으로 들이지 않으셨다. - 중략 - .

안주공 후손 가까운 집안의 상식이 형님을 양자로 들이려다 내가 태어났다. 참으로 모질다. 훗날 그 형님의 아우인 상복이 형님을 만나 지나온 일들을 물으니 상식이 형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나 또한 선비의 복중에 있을 때 선친께서 쥐를 밟으신 일화가 있어 어릴 적 토속신앙에 따라 주술적인 행동을 몇 번 경험해야 했고, 명필로 한학을 교육하시며 불경에도 조예가 깊으셨던 선친께서 내 이름을 몸소 제천의 작명소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작명을 한 것이라 들었다. 하지만 한자를 약간 익히고 본 내 작명첩은 사주에 따른 격(格)의 설명으로, 결국은 성(金) 씨와 항렬자인 상(相, 통일在)자의 한자 자획(획수)의 음양(짝홀) 배치에 따라 석(錫)자 한 자 지어준 것일 뿐 작명이 내 짧은 생애의 희로애락은 물론 생가와 양가 직계의 꿈이었을 부귀와 장수(長壽), 후사(後嗣)에 끼칠 징조는 아직 짐작할 수 없으니 이름을 탓하고 팔자를 타령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중략) - .

충익공(휘 시양)보다 먼저 나시어 충무공(휘 시민)의 양자로 출계하신 남봉공(휘 緻)께서는 인조반정의 일시까지 알려주셨으니(중략) - .

내 아이의 이름을 지으며 나 또한 나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처럼 성과 항렬자(응, 통일會) 중간에 한(하나) 자(字)를 며칠을 고심하다 곡획작명법에 따라 선(先)자를 택하여 선응(先應)으로 지었다.

선(先)자의 가능성에 앞서 돌아가신 선친의 생애와 가족력을 염두에 두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항렬자에 따라 이름을 짓다보니 가까운 안주공 집안에서도 원응(元應)이와 찬응(燦應)이 각각 둘이고 나중에 상운형님의 딸아이가 선응(善應)이라 한글이름 김선응 또한 둘이어서 작명할 때 가까운 집안에서는 동명이인이 없도록 잘 살펴보고 이름을 지었으면 한다.

지금, 아들은 동료들보다 먼저 할아버지와 같은 부(하)사관의 길을 택하여 진로를 정했다. 아들의 직업선택은, 내가 군 기피자를 싫어하는 것과 반대급부로 나타나 그 이후 커가는 키처럼 아들을 나름 달리 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선(세)대, 충익공 후손들과 안주공 후손들은 제천일대에 산재하여 거주하며 제학공파와 비안공(휘 인갑) 후손들이 일반적으로 썼던 由-0-年-浩-相의 항렬자를 두 지파는 유독 有-養-周-鎬-相으로 정하여 함께 쓰셨으며 특히 같은 항렬의 유(有, 由)자와 호(鎬, 浩)자는 동음이의 자(字)를 택하여 공통적으로 쓰신 점을 보면 지역적 집성에 따른 접근성과 상호교류, 근친 등의 연관성 외에도 각별한 데가 있어 주목할 만하고, 또한 혈통을 잇기 위해 서로 양자를 들인(출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개인기록을 삼가고 조부님의 생가(生家) 9대조이신 충익공(1581-1643) 행장에 보이는, 초명(시언) 후 졸기까지 쓰인 개명 휘자인 시양(時讓)의 [경진(1580)보] 등재와 관련하여 감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의문을 갖고 접근하여 논고를 통해 밝히려는 바, 기고의 형식을 빌려 객관성을 확보하고 화자(話者)의 입장을 취해 간략히 서술하고자하니 이하 존칭을 생략하고 아래에 몇 자 더 부기하고자 한다. -하략-

※이상은 개인기록으로 본 홈에 등재 게시물의 성격이 아니지만 충익공 생년과 관련한 [경진보] 등재에 대한 의문의 동기를 부여한 조건이므로 간략 기술하고 분량이 많아 다음 게시물에 본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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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거론에 앞서 -------

○주해는 단락마다 부호를 넣어 이해를 돕고, 모든 성씨들이 서문(발간사나 축사)과 발문(편집후기나 경과보고)을 통해 밝히는 족보의 (실제)간행시점은 시대적 배경(환경)에 따라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느끼면서 혹시라도, 그 시원이 늦추어진 것에 대한 반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견이지 고증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 부디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며 사족을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안동김씨 족보의 효시가 되는 [경진보]에 대한 현종제위의 고견을 참고하여 설득력을 갖춘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삼가‘[경진보]의 간행시기’에 대하여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논점 없는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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