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5)-문영공 필적-항주 고려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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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1-03-14 12:54 조회2,050회 댓글0건본문
고려혜인사(杭州高麗慧因寺)
*복원된 고려사*
사진을 통해서 구해 본 건물은 확실히 중국 건축과는 다르다. 대웅전과 그 앞에 8각 목탑형식의 건물이 있는데, 아마도 이 건물은 천왕전일 것이다. 어쨋든 대웅전은 한국식이다. 원래 명나라 때에 그려진 고려사 전경을 보면 건물양식은 당연히 중국식인데, 복원을 맡은 절강성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를 감안해서 한국식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복원과정에서 관리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고려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므로 항주시 불교연합회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과 관광진흥을 위해 항주시 관광국에서 총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고 한다. 한중불교교류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천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한국 천태종은 여기에 의천스님 상(像)과 한중교류박물관을 별도로 설치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여기에 관한 세부협의도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데 기왕에 한중교류사를 여기에 전시하려면 나중에 원나라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에 있었던 역사도 다시 살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려말의 한 재력가가 이곳에 부모를 위해 불경을 안치한 사실이다.
그 주인공은 원관(元瓘)이다. 그는 충선왕 때 재상인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지낼 정도로 왕의 신임이 깊었는데, 일찍이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남쪽 사명산(四明山)에 있는 천동선사(天童禪寺)에 봉안하였으며, 충선왕 2년(1310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한 부를 더 만들어 대각국사 의천의 인연이 있는 항주의 고려사에 봉안하고 토지와 노비 등을 기증한다. 이러한 사실을 비석으로 만들어, 글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쓰고, 글씨는 원관의 사돈(충숙공 김승용의 장인=원관)인 김순(金恂 1258~1321 : 김방경의 셋째 아들)이 써서 고려사에 세운다, 안동 김씨 집안에 그 비문이 전해온다.
또 일제 시대에는 상해에 사는 우리 교민들을 중심으로 해서 고려사 복원을 위한 모금운동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와는 역사가 깊은 유적이어서, 수교 이후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등이 발로 뛰며 복원에 애쓰신 결과 일단 외관상으로 대웅전이 복원되었다. 앞으로 하나 둘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곳에 세운 소동파 비에 보면 고려비가 있었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혜인사)
대각국사 의천이 7개월간 머물면서 중창 -중국 강남지방 천태종 본산으로
충선왕때 고려재상 원관의 주도로 중창하였다.
이때 원관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를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 상락군 金恂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 있다. 이 비석은 표해록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1490년-성종)까지는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데 전하는 말로는 사찰은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国 / 太平天國, 1851년~1864년)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洪秀全)이 세운 기독교 신정(神政) 국가이다.)때 없어졌다고도 하고, 비석은 문화혁명(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때 없어졌다고 한다.
[ 표해록 [漂海錄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溥:1454~1504)의 기록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재임중이던 저자가, 이듬해 정월 부친상을 당해 급히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부[寧波府]에 표류,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귀국하여, 왕명으로 1487년 당시 명나라(중국) 연안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풍속·군사·교통·도회지 풍경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사와 관련한 대장경기 자료>
출전 : 안동김씨 홈 역사적 인물의 <김순>란
1)元代麗史資料集錄>에서
金承用(휘방경의 1남 휘 선의 2남)의 장인인 元瓘(원관)과 관련된 원나라 시대의 기록중에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는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상락군 金恂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다.(典據 : <李者羽 著, 玉 山今) 山惠因高麗華嚴敎寺志>7 )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翰林院直學士朝列大夫本國重大匡守僉議政丞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判選部事致仕閔▨▨撰」
重大匡上洛君金恂書幷題」
夫以實際而觀則廓然空寂無名無相本無衆生亦無諸佛豈有生滅苦樂在於其間哉然諸有情背眞逐妄自有生死去來故罪福由是而生苦樂從斯而出罪福旣生復有輕重苦樂隨出亦如形影於是地獄餓鬼畜生修羅人天諸趣紛然而作是所謂衆生也苦莫苦於地獄樂莫樂於天堂然天報將盡亦有五衰之苦而又隨業墮落則亦未免於三途故天堂之樂不足恃也於中有一聰慧之人因於衆生而起大悲因於大悲而生菩提心成等正覺是所謂佛也佛以平等大悲視衆生如一子然諸衆生根器不同非一法可度故欲隨其根將適其器而遂有三乘十二分敎八萬四千法藏如世良醫救諸病用藥至千設方至萬非苟多其藥而廣其方也藥隨病異故不得不然耳是以我佛釋迦成正覺轉法輪始自鹿苑至於雙樹七七年間所說法門不爲不多矣及乎一千年後其敎東漸自漢明夢見金容已來西竺梵本之來譯東夏者無慮五千餘卷經律皆佛口所宣論則皆諸菩薩所造如易之十翼春秋之三傳者也略擧諸經所有功德則或有但聞其名及一句義者猶勝純以七寶積滿三千大千世界以用布施又復分別半偈者亦勝敎百恒河沙衆生得阿羅漢果於中密敎則有影過風經之益或有一字之功能令滅罪成佛戒律則一日之功亦能生佛淨土然則苟能成一卷經聞一句義依一字功修一日戒亦足爲千生萬劫難得之福慶也况復成一大藏趁年披轉者豈不萬萬於前功哉然此須有大財力者能之而世之富貴者例皆聚不厭多滿不知足急於求利怠於爲善及乎四山旣合五家爭奪然後無如之何假使得如汾陽終始何益於身後哉在當世獨得超然世外之明見者惟我退翁元相公有焉公生閥閱而蚤收科第敭厯淸華而驟登卿相當其急流思老聃之知止深信勝綠慕靈運之在家曾與故僉議中贊安公同誠立願印造大藏經一部俾安於西明之天童禪刹猶以爲歉今復度其功費而竭盡財力印成全藏一部奉安大覺國師所起道場以爲地勝人高而法寶雖具若不披轉於歲時而興其福利則與夫多買良田遠求好種而不解耕穫者何異哉於是又備趁年轉藏之資幷以捨施善哉未曾有也其所願則皇帝聖壽萬萬歲皇太后億載萬年瀋王國王各增椿算先公先妣超躡寶蓮四生六道一切有情咸夢饒潤同至菩提耳大哉心乎所成大法寶藏宜安於此而捨之於彼者以無自他彼此之殊也所作最勝功綠先奉君親者姶終不離忠孝之道也由斯而往則雖欲後於自利福祿其不先於公乎推其餘以及千孫尙有餘慶矣以子爲蚤年同牓辱知蚤厚且親請以爲記予以老病固辭請之不已不獲已而麤敘其所見知耳」
元祐元年二月日」
功德主大匡僉議贊成事判總部事致仕元瓘性海慈照明宗大師華嚴宗主杭州路高麗惠因敎寺持僧慧福立石」
[출전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
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 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진리의 참된 모습으로 보면 텅 비어 있고 공적(空寂)하여 이름도 없고 형상이 없으며, 본래 중생이 없고 부처님도 없다. 어찌 생겨나고 없어짐,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생명 있는 것들이 참된 것을 저버리고 허망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저절로 있게 되고 그로부터 죄와 복이 생겨나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죄와 복이 생겨남에 다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그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 사람 몸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같다. 이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당 등 여러 윤회의 세상이 뒤섞여 생겨나니 이것이 이른 바 중생이다. 괴로움은 지옥보다 괴로운 것이 없고, 즐거움은 천당보다 즐거운 것이 없다. 그러나 천당의 과보가 다하게 되면 또한 다섯 가지 쇠퇴함[五衰]의 괴로움이 있게되며 자기 업보를 따라 아래세상으로 떨어져 세 가지 나쁜 세상[三途]을 면할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천당의 즐거움은 자만할 것이 못된다. 그런 가운데에 한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중생이면서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큰 자비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평등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니 곧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은 평등하고 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다 같은 아들로 보시지만 중생들은 근기가 같지 않아서 하나의 가르침으로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근기에 맞추려고 하여 3승(三乘)과 12분교(十二分敎), 8만 4천의 경전 등이 있게 되었으니 세상의 훌륭한 의사가 여러 병자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천여 가지의 약을 쓰고 만 종류의 처방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일부러 많은 약을 쓰고 처방을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 약이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가르침을 베푸심에 녹야원(鹿野園)에서 시작하여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77년 동안 설법하신 법문(法門)이 적지 않게 되었다.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지게 되니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본 이래로 인도의 범본(梵本 :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불경)이 중국말로 번역된 것이 무려 5천여 권이나 되었다. 경(經)과 율(律)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론(論)은 모두 여러 보살들이 지은 것이니『역경(易經)』에 대하여 십익(十翼)을 지은 것과 같고『춘추(春秋)』에 대하여 삼전(三傳)이 있는 것과 같다. 여러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간략하게 들자면 어떤 경전은 그 이름이나 두 구절의 내용을 듣기만 하여도 칠보(七寶)만으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며, 또한 반 구절의 게송만 이해하여도 100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가의 모래의 수)만큼의 중생들을 가르쳐서 아라한과(阿羅漢果 : 진리를 깨달아 열반에 든 성인의 경지)를 얻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그 중에 밀교(密敎)에서는 그림자가 경전을 읽는 것을 지나가기만 하여도 이익이 있다고 하며 혹은 (경전) 한 글자의 공덕으로 능히 죄를 없애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며, 계율은 하루만 지켜도 능히 부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만일 능히 1권의 경전을 만들고, 한 구절의 뜻을 듣고, 한 글자의 공덕에 의지하고, 하루동안 계율을 지키는 것이 족히 천 번 태어나고 만겁(萬劫)이 지나도 만날 수 없는 큰 행복이 될 것이다. 하물며 대장경을 만들어 해마다 펴서 읽는다면 어찌 앞에서 이야기한 공덕의 만만배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큰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세상의 부귀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재물을 모음에 만족할 줄 몰라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착한 일을 하는 데에는 게으르다. (땅이) 네 산에 미치고 다섯 집안의 재산을 합하였다고 하여도 서로 다투고 빼앗은 후에는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설혹 분양(汾陽)과 같이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도대체 죽은 후에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지금 세상에서 홀로 초연하여 세상을 벗어난 밝은 앎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우리 퇴옹(退翁) 원(元) 상공이 계실 뿐이다. 상공은 벌열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과거에 합격하셨고 명예롭고 중요한 관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르셨다. 관직에서 물러나신 후[急流] 노담(老聃 : 노자(老子)의 이름)의 만족함을 알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좋은 인연을 깊이 믿으며 사령운(謝靈運)이 집에서 승려처럼 지낸 것을 흠모하였다. 일찍이 돌아가신 첨의중찬 안(安)공과 함께 정성스러운 서원을 세워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사명산(四明山 :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남쪽에 있는 산)에 있는 천동선사(天童禪寺)에 봉안하였는데, 그러고도 아쉬움이 있어 이제 다시 비용을 계산한 후 재산을 모두 들여 대장경 1부를 찍어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세우신 도량에 봉안한다. 땅이 뛰어나고 사람이 훌륭하며 법보(法寶 : 대장경을 가리킴)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도 만일 매년 이를 펼쳐 읽어서 그 행복과 이익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좋은 밭을 많이 사고 좋은 씨앗을 멀리서 구하고서도 밭을 갈 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에 매년 대장경을 읽을 수 있는 비용을 아울러 희사하니 훌륭하고 전에 없던 일이다. 바라는 바는 오직 황제폐하의 성수(聖壽)가 만만세(萬萬歲)에 이르고 황태후께서 억년 만년 사시며, 심왕(瀋王 : 충선왕을 가리킴)과 국왕(당시의 고려국왕인 충숙왕을 가리킴)께서도 각기 오래 사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극락에 피어있는) 보배 연꽃에 오르시는 것, 그리고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모두 혜택을 입어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크도다, 그 마음이여. 만든 대법보장(大法寶藏)을 이 땅(고려를 가리킴)에 두지 않고 저 곳(중국을 가리킴)에 봉안하는 것은 자기와 남,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공덕을 짓고서 먼저 임금님과 부모님께 바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과 효성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자신의 이익을 뒤로 돌린다고 하여도 복록(福祿)이 어찌 공에게 우선하여 오지 않겠는가. 나머지 공덕이 있어 자손에게도 또한 나머지 경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공과 같이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데 공이 직접 글을 써주기를 부탁함에 나는 늙고 병들어서 할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거듭하여 부탁하므로 할 수 없이 보고 알게 된 것을 거칠게 쓰는 바이다.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2)불교에 관련된 기사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參考문헌 :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p706-717,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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