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4)-항주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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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1-03-14 12:49 조회2,353회 댓글0건본문
항주(杭州)
중국속담;소주에서 태어나, 항주에 살고, 광주(廣州)의 음식을 먹고, 황산(黄山)에 가서 일하고 유주(柳州)에서 죽으라!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上有天堂,下有苏杭)
중국 저장성의 성도. 전당강 북안에 있으며 풍광명미로 알려져 있다. 선사시대부터 양자강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중심으로, 근교의 수전판유적이나 서호 북방의 노화산유적에서는 양저문화(良渚文化)의 특색있는 연질흑도가 출토되고 있다. 진대(奏代)부터 전당현이라 불리워졌고 한~남북조시대를 통해 오현(소주)과 함께 강남 개발의 거점이 되었고 수대(隋代)에 항주로 개칭, 당대(唐代)에는 여항군(余杭郡) 등 명칭이 번갈아 쓰였다. 오대십국시대, 월국이 항주를 왕도로 하고, 국왕의 전씨일족이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교외나 서호 주변에는 사원, 불탑, 마애, 불감 등이 활발히 조영되었다. 영은사(靈隱寺)의 석탑 2기, 영은사 비래봉(飛來峰)의 마애불감, 갑구백탑(閘口白塔), 보숙탑(保俶塔), 이미 파괴된 뇌봉탑(雷峰塔), 육화탑 등이 그 예이다. 공신산(功臣山)은 오월왕 전류를 모셨던 공신(功臣)의 묘소로서 공신탑의 유구가 있다. 남송·건염 3년(1129), 임안부(臨安府)로 승격되어 행궁이 가설되고 임시 국도가 되었다. 원대에는 항주로(杭州路)라고 했고, 당시의 회교사원 봉황사가 현존하고 있다. 경산(徑山) 남쪽의 보경사 석탑(1323)도 원대의 건축이다. 명·청시대에는 항주부가 있었고 부성(府城)은 둘레 35리(약 20km), 성내의 서남은 전당현 치하, 동북은 인화현 치하에 속했으며 성문은 10개, 수문은 4개였다. 수나라가 항주성을 창건할 때의 기록에 36리90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 성벽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항주지방은 위진남북조~당시대에 월주요의 중심지로 알려져, 오월전씨의 보호와 장려에 의해 비색청자가 만들어졌으며 북중국과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송대에는 봉황산의 동쪽 산기슭에 교단요(郊壇窯), 수내사요(修內司窯) 등 소위 남송관요가 이루어져 뛰어난 청자가 산출되었다. 또 중당(中唐) 이후 훌륭한 수묵화가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남송 원체화에서 명대의 절파(浙派)에 이르는 표출적 수묵화풍은 항주의 지방양식이 되어버렸다. 명·청대에도 많은 문인묵객을 배출했고, 그 전통은 청말 전각(篆刻)의 서령팔가(西冷八家)에까지 이어졌다.
역사항저우는 2,200년 전 진나라 때 건립되었으며, 중국의 7개의 고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시 지역에는 7000년 전의 중국 신석기시대에는 양저문화의 발상지이며, 벼농사 유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신석기 문명의 대표유적인 하모도 문화(河姆渡 文化)(기원 전 5000 ~ 4500) 유적이 있다. 중국 육대 고도로 꼽히며, 그 기원은 진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나라 때는 회계군을 다스리는 관청이 설치되었다.
항저우에 성벽이 쌓여진 것은 591년 수나라(隋) 때이다. 또한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대운하를 이용한 상업망이 발전하였고, 항주의 거리도 번창해 갔다. 항주의 이름이 시작된 것은 당대이다. 907년~978년까지 5대 10국 시대에도 오월국(吳越國)의 수도가 되었고, 서호도 그 당시 이름이 지어졌다. 10세기에는 난징과 청두와 함께 남송의 위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12 세기 전반에 북송의 수도인 개봉이 금나라에 의해서 함락되고 나서는, 남송이 임안부를 두어 실질적인 수도가 되었다. 남송 초기, 금나라에 대해서 강경책을 주장한 악비의 무덤이 있다.
항저우는 12세기 초부터 1276년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남송의 수도였고, 임안((臨安)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쪽으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중앙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저우는 중국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되면서, 몽골 제국이 구축한 육상 네트워크와 해상 세계를 묶을 수 있고 교역을 통해서 한층 더 발전을 이루었다. 그 번영성세는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으로 기록하고 있다.
19 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으로 거리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많은 역사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수많은 철학자와 정치인, 문인이 배출되었으며, 소식(苏轼) 등의 대문호가 배출되기도 했다.
** 지리와 기후
대표적인 관광지 서호항저우는 저장성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 대운하의 동쪽 끝이다. 창 강 평원에 닿는 저지대의 지형으로 성단위 행정구역으로는 서쪽으로는 산이 많은 안휘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평지인 항저우만에 접한다. 시내 중심은 서호의 동북쪽, 첸탕 강 북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일부 하천은 타이후로 흘러들어간다.
항저우의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한 습한 아열대 기후이며, 연 평균 기온은 16.2도로 살기에 좋은 편이다. 여름에는 덮고 습하며, 겨울에는 비교적 냉하고 건조한 편이다. 3월 중순부터 5월까지가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기이다.
杭州임시정부
항주에 있는 유적들도 모두 임시정부와 관련된 것이다. 항주는 임시정부가 윤 봉길 의거로 말미암아 상해를 벗어난 직후부터 1935년 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1932년 5월에 항주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청태(靑泰) 제2여사(旅社)에 머물다가 호변촌(湖邊村)으로 이동하였다. 그 건물들은 현재 인화로(人和路)와 장생로(長生路)에 각각 남아있어, 아직까지 옛 모습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오복리(五福理)의 아파트 또한 안팎으로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 독립당이 학사로(學士路)의 사흠방(思?坊)에 들어서 있었는데, 이 건물은 길게 2층으로 늘어선 연립주택 가운데 하나이다. 호수가 변하여 원래의 집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현지 주민의 고증을 통해 겨우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집 구조가 동일하므로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집을 모델로 삼아 당시의 모습을 대강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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