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3)-백범선생님의 피난지 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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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1-03-11 10:59 조회1,849회 댓글0건본문
중국 절강성 가흥(嘉興 자싱)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되어 1932년 항주
1935년 가흥,1937년 장사, 진광, 1938년 광주, 유주
1939년 기강,1940년 중경으로 이사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직후 미국인 목사 피치의 집에 피신하고 있다가, 자싱으로 피신하여 장진구 또는 장진이라는 광뚱(광동) 출신의 중국인으로 변성명하고 朱愛寶라는 중국인 처녀 뱃사공과 함께 숨어 지냈다. 매만가 76호는 주푸청(저보성)의 수양아들인 진동손(陳東生)의 별채로 김구가 가흥에서 피신해 있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김구가 숨어있던 집에는 2층 한쪽 구석의 마루 밑에 나무로 만든 비상 탈출구와 배 한 척이 늘 매어 있었다.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곳 비상구를 이용하여 1층으로 내려가 주애보의 배를 이용, 호수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침대 바로 밑에 비상구가 있었으나,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침대의 위치를 옮겨 놓았다.목조건물로 1층은 접견실 겸 식당으로 2층은 침실로 재현해 놓았다. 2층에는 김구가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형태의 침대와 옷장이 전시되어 있다. 1996년 자싱(가흥)시에서는 매만가 76호 내부를 단장하여 한국인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2007년 5월 성금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김구 피난처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때 백범선생님께 왜놈들이 붙인 현상금은 60만원으로 현재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환화 약 200억원이나 된다
백범일지에서..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 1. 가흥에 몸을 의탁하다
나는 이로부터 일시 가흥(嘉興)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조모님을 따라 장(張)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震球) 또는 진(震)이라고 행세하였다.
가흥은 내가 위탁하여 있는 저보성 씨의 고향인데 저 씨는 일찍 강소성장(江蘇省長)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鳳章)은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民豊紙廠)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 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 씨는 그의 수양자인 진동손(陳桐蓀)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양제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 씨 댁에서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 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 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말을 통치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廣東人)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 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8세 되는 아이들도 배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나는 진 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南湖) 연우루(烟雨樓)와 서문 밖 삼탑(三塔)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쯤 나아가면 한(漢)나라 때 주매신(朱買臣)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落帆亭)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멍석을 떠내 보내고 아내 최 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 태수(會稽 太守)가 되어 올 때에 최 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 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경관이 내려서 여기 저기 둘러보고 갔다고 하므로 저봉장의 처가인 주(朱) 씨 댁 산장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 씨는 저봉장의 재취로 첫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 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 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海鹽縣城) 주 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주 씨 댁은 성내에서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는 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 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 집 살림살이를 맡아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 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먹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 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는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뒤에는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해염에 대화원 셋이 있는데 전(錢)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기차로 노리언(盧里堰)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해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내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소쇄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며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딘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나는 이로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 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니 항주니 남경이니 하는 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더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각(祭閣)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名家)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솔, 붉은 가을 잎이었다. 하루는 응과정(鷹 亭)에를 올랐다. 거기는 일좌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 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 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로 인사를 하였다.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철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윤도(輪圖)를 놓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계인가 하였다.
하루는 해변 어느 진(나루터)에 장 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가흥에 와서는 거의 매일 배를 타고 호수를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嚴家濱)이라는 농촌의 농가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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