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답사여행(2)-문온공께서 순절하신 양자강 상류 삼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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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11-03-11 10:43 조회2,033회 댓글0건본문
삼협댐
장강삼협(長江三峽)
중국 최대의 대하이자 세계 3대 하천인 양자강은 사천대분지에 모여들어 중경에서 가릉강과 합류,거대 물결이 구당협(瞿塘峽)과 무협(巫峽)을 거쳐 서릉협(西陵峽)으로 빠져나간다. 장강삼협이란 바로 이 세 협곡을 일컫는 총칭인데『삼국지』의 주무대였고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동파(蘇東坡)등이 시의 주무대로 삼았던 곳이다. 삼협 중에서 가장 물살이 거센 곳이 무협으로 그 폭이 30m 밖에 안되어 양자강의 거센 물결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10리 밖에서 들릴 정도로 요란하다. 유람선을 타고 이 삼협의 구경하는 코스는 2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중경, 무한을 오가는 정기선을 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전용 유람선을 타고 중간에 상륙하여 구경하면서 유람하는 것이다. 장강삼협은 구당협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구당협의 총길이는 33㎞, 협곡의 강폭은 150m, 양쪽 산봉우리는 1~1.4㎞에 달한다. 구당협을 벗어나 무협까지는 물살이 느리며, 무협 12봉을 감상할 수 있다.
무협은 주변의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이 볼 만하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수증기가 흩어지지 못해 생긴 구름안개가 절경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이 서릉협으로 여울이 많고 물살이 세며 암초가 많은 곳으로 내려갈 때는 쏜살같고 올라갈 때는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더디다.
389)帆急 범급/돛단배가 빨라서
帆急山如走。범급산여주/帆船이 빠르니 산은 달리는 듯하고
舟行岸自移。주행안자이/배가 나아가니 언덕은 절로 움직이네.
異鄕頻問俗。이향빈문속/타향이라 자주 풍속을 물어보고
佳處強題詩。가처강제시/아름다운 곳이라 억지로 시를 짓네
吳楚千年地。오초천년지/吳나라와 楚나라가 천 년을 누린 땅인데
江湖五月時。강호오월시/강과 호수는 오월의 시절이네
莫嫌無一物。막혐무일물/물건 하나도 없다고 싫어하지 말게(*963)
風月也相隨。풍월야상수/바람과 달이 응당 서로 따르고 있네
暮宿淸江口。모숙청강구/날이 저물어 맑은 강어귀에서 자며
籬邊繫小船。리변계소선/울타리 가에 작은 배를 매어 두네.
隔牕聞鶴唳。격창문학려/창 너머로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
欹枕伴鷗眠。의침반구면/베개에 기대어 갈매기를 짝하여 자네.
霧重山仍雨。무중산잉우/안개가 짙더니 산에는 비가 내리고
風恬浪作煙。풍념랑작연/바람이 조용하니 물결은 안개가 되네.
曉看茅屋處。효간모옥처/새벽에 띳집이 있는 곳을 보니
淳朴一山川。순박일산천/순박하기가 다 같은 산천이네.
山漸周圍水漸淸。산점주위수점청/산은 점점 둘러싸고 물은 점점 맑아지는데
泝流船疾浪花生。소류선질랑화생/올라가는 배 빨라지니 물결 꽃이 피어나네
茂林脩竹無人處。무림수죽무인처/무성히 자란 대나무 숲속 사람이 없는 곳에
時聽幽禽一兩聲시청유금일량성/때마침 두마리 새 울음소리 그윽히 들려오네
*963 이구절은 蘇軾의 [前赤壁賦]에 나오는 “또한 천지의 사이에는 사물이 각기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 하나라 하더라도 취하지 말라.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밝은 달은 귀에 닿으면 소리가 되고 문과 만나면 빛깔이 된다. 취해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것은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창고이고, 그대와 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바이다.(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而吾與子之所共適)라는 단락의 뜻을 빌어 온 것이다.
入峽(입협) 골짜기로 들어가며(入峽)
兩壁崔嵬水急流。량벽최외수급류 /양쪽 절벽이 높고 물이 급하게 흐르는데
舟行宛轉思悠悠。주행완전사유유 /배가 가다 굽어드니 생각이 유유하네
雲籠樹密千崖暗。운롱수밀천애암 / 구름이 감싸고 나무가 빽빽하니 수많은 벼랑이 어둡고
嵒曲天深萬壑幽。암곡천심만학유 /바위가 굽고 하늘이 깊으니 무수한 골짜기가 그윽하네
出谷間關聞好鳥。출곡간관문호조 /골짜기를 벗어나니 關門사이에서 좋은 새소리 들리고
隨波浩蕩愛輕鷗。수파호탕애경구 /호탕하게 물결을 따르며 가벼이 나는 갈매기를 아끼네
可憐季子歸何日。가련계자귀하일 /가련한 季子(*969)는 어느 날에 돌아가랴?
猶向巴山更遠遊。유향파산갱원유 /오히려 巴山(*970)을 향해 다시 먼길을 가고 있으니
嵂屼山無盡。률올산무진 /가파른 산은 다함이 없고
沄淪水不窮。운륜수불궁 /깊고 일렁이는 물은 끝이 없네
高崖圍紛堞。고애위분첩 /높다른 벼랑은 어지러운 성가퀴를 감싸고
絶壁繚崇墉。절벽료숭용 /절벽은 높다란 보루를 둘렀네
樹木千年茂。수목천년무 /나무는 천년토록 무성하고
雲霞萬古封。운하만고봉 /구름과 놀은 만고에 막혀있네
地幽人寂寞。지유인적막 /땅이 깊어 사람은 적막하지만
往往忽相逢。왕왕홀상봉 /간혹 갑자기 서로 만나기도 하네
*969) 季子는 蘇秦의 字이다. 소진은 중국 전국시대 낙양사람으로 귀곡자에게 종횡설을 배워서 진 혜왕을 달래다가 써 주지 않아서 거지가 되어 돌아왔다. 후에 다시. 제,초,연,조,한,위를 유세하며 합종책으로 秦에 항거하고 육국의 재이 되었으며, 從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뒤에 제나라 사에게 刺殺당하였다.
*970)巴山은 중국 호북성에 있다.
大峽灘 대협탄
灘險舟難上。탄험주난상 /여울이 험하여 배가 올라가기 어렵고/
峯高路更微。봉고로갱미 /봉우리가 높아 길이 더욱 혼미하네/
宿雲含雨去。숙운함우거 /자던 구름은 비를 머금고 떠나고/
遲日轉山移。지일전산이 /더딘 해는 산을 돌아서 옮아가네/
酩酊三杯酒。명정삼배주 /석 잔 술에 취하고/
悲涼一首詩。비량일수시 /한 수 시에 슬퍼하네/
打舷吟嘯永。타현음소영 /뱃전을 두드리며 길게 읊고 휘파람부니/
/江鳥忽驚飛。강조홀경비 /강 새가 갑자기 놀라서 날아가네
峽行 협행 골짜기를 가며(峽行)
兩邊巖石矻如門。량변암석골여문 /양쪽 가의 암석이 문처럼 우뚝한데/
刻削猶疑斧鑿痕。각삭유의부착흔/새기고 깎은 모습이 도리어 도끼 자국인 듯싶네/
樹色淋灕常着雨。수색림리상착우 /나무 빛깔은 원기가 넘쳐 늘 雨氣를 띠고/
猿聲縹緲欲埋雲。원성표묘욕매운/원숭이소리는 아련히 구름에 묻히려 하네/
興亡萬古無消息。흥망만고무소식 /만고에 흥망이 소식이 없는데/
強弱千秋幾吐呑。강약천추기토탄/千秋에 强弱은 몇 번을 삼티고 토했던고/
寂寞山村無一事。적막산촌무일사 /적막한 산촌에 한 가지의 일도 없으니/
居人自作太平民。거인자작태평민/주민은 절로 太平한 백성이 되네/
형주(荊州 )
行到江陵憶仲宣。행도강릉억중선/행차가 江陵(*937)에 이르러 仲宣(*938)을 추억하는데/
登樓賦語至今傳。등루부어지금전/<登樓賦>(*939)의 말이 지금까지 전해지네./
天涯流落知誰甚。천애류락지수심/하늘 끝에 流落한 것을 누가 알겠는가?/
回首雲南最可憐。회수운남최가련/雲南(*940)을 향해 머리 돌리니 가장 가련하네/
漢家昭烈倚關張한가소렬의관장/漢나라昭烈帝(*941)는 關羽(*942)와張飛(*943)에게 기대었는데/
無命其如感歎長。무명기여감탄장/그와 같았어도 天命이 없었으니 탄식이 길어지네/
流水浮雲千古態。류수부운천고태/흐르는 물과 뜬 구름은 천 년 전의 모습이니/
至今愁殺武安王。 지금수살무안왕/지금까지 武安王(*944)을 대단히 근심스럽게 하네/
○추시관우왈무안왕。생시수어처/追諡關羽曰武安王。生時守禦處。/(관우에게 追贈하여 내린 諡號가 武安王이다. 이곳 형주는 그가 살았을 때 지키던 곳이다.
表裏淸和美丈夫。표리청화미장부/겉과 속이 맑고 온화한 美丈夫가/
相逢說盡洞庭湖。상봉설진동정호/洞庭湖(*945)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다하였네/
荊州惜別情懷惡。형주석별정회악/荊州에서의 애석한 이별에 情懷가 사나우니/
他日巴陵憶我無。타일파릉억아무/훗날 巴陵(*946)에서 내가 없음을 추억하리/
*936) 荊州는 禹貢 九州의 하나로 현재의 중국 호남,호북,광서,귀주 지역이다.
*937)江陵은 중국 호북성 江陵縣을 가리킨다.
*938)仲宣은 王粲(177-217)의 字이다. 왕찬에 대해서는 주 266참조
*939)登樓賦는 중국 삼국시대 魏나라의 王粲이 蕫卓을 피하여 荊州의 劉表에게 의탁해 있을 때 城樓에 올라가 지은 賦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오랜 기간 동안 객지에 머물면서 思鄕의 情緖와 불우한 感慨를 담고 있다.
*940)雲南에 대해서는 주16을 참조할것. 여기서는 운남을 언급한 것이 김구용의 유배지인 大理가 운남서에 있기 때문이다.
*941 昭烈(皇)帝는 중국 삼국시대 蜀漢의 황제 劉備의 諡號이다. 그의 字는 玄德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桃園結義하엿으며 諸葛亮을 襄陽에서 만나 그의 天下三分의 계책을 써서 巴蜀을 평정한 후 成都에서 帝位에 올라 국호를 漢이라 하엿다. 세상에서는 그를 劉先主라 일컫는다.
*942)關羽는 중국 삼국시대 蜀漢의 勇將으로 字는 雲長이다. 그는 장비와 함께 유비를 도와 큰 공을 세웠다. 뒷날 荊州를 지키다가 馬忠 에게 피살되엇다. 민간에 신앙이 두터워 곳곳에 關帝廟 또는 關王廟가 있다.
關羽 ;l자(字)는 운장(雲長)이며,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穆侯)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髯公)이라고도 불렸다. 죽은 뒤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관제성군(關帝聖君)’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관제군(關帝君)’, ‘관제(關帝)’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인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도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폭리를 취하는 염상(塩商)을 죽이고 유주(幽州)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과 이름도 바꾸어 관우(關羽)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관우는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 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소설에서 창작된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200년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귀순을 종용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였으나 조조는 그들을 만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08년 적벽전(赤壁戰)에서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유비가 익주(益州: 四川省)를 공략할 때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荊州:湖北省) 수비를 위해 머물렀는데, 익주에서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고전하는 유비를 구원하러 제갈량이 출병하자 관우 혼자 형주를 방비하게 되었다. 당시 형주는 촉나라의 동쪽을 지키는 관문이었고 관우의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도 두려워하던 것이였다. 그는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독이 퍼져가자 명의 화타(華佗)에게 절개 수술을 받았는데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태연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패배하였다. 관우는 상용(上庸)에 주둔하고 있는 맹달(孟達)과 유봉(劉封)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宋)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護法神)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숭배하기도 한다.
*943)張飛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勇將으로 자는 益德이다. 그는 관우와 함께 유비를 도와 큰 공을 세웠다. 뒷날 吳를 치려고 출병했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944)[元註] 追諡關羽曰武安王 生時守禦處(관우에게 追贈하여 내린 諡號가 武安王이다. 이곳 형주는 그가 살았을 때 지키던 곳이다.
*946)巴陵은 중국 호남성 岳陽縣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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