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簡公 金永煦 행장(고려사절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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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작성일11-01-23 17:45 조회1,905회 댓글1건본문
고려사 절요에 있는 정간공 행장을 하기와 같이 정리한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貞簡公 金永煦 行狀]<고려사 절요 편>
●[김영후(34세)] ○ 김개물이 장령 김원식(金元軾), 지평 김영후(金永煦) 등과 더불어 다시 대궐에 나아가 장세를 치죄하기를 청하니 왕이 성내 사건을 아뢴 자를 구타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64~65 충숙왕 을축 12년(1325)>
● [김영후(48세)] ○ 여름 4월에 전왕이 삼사우윤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부처의 화상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下卷 p103 충숙왕 기묘 8년(1339)>
● [김영후(48세)] ○ 전왕이 이에 감정을 품고 이 때에 이르러 권성(權省)과 홍빈(洪彬)을 시켜 신청게게 칼을 씌워 이문소에 가두고, 원로인 영가부원군 권부(權簿) 등에게 명하여 신청이 저지른 짓을 낱낱이 기록하여 행성에 고하니 행성에서는 그 서장을 기록하여 김영후에게 주어 중서성에 올리게 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03~104 충숙왕 기묘 8년(1339)>
<고려사 절요에 없는 내용>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弟)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다움까페>
● [김영후(50세)] ○ 6월에 교서를 내렸다. <중략>
해평부원군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 화평부원군 김석견, 정승 이능간, 이문 홍빈, 상락부원군 김영돈(金永暾), 서하군 임자송, 찬성사 김인연,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 김영후(金永煦), 좌사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 이운(李雲), 개성윤 윤신계, 지밀직사사 이엄(李儼), 동지밀직 윤환(尹桓)·박청(朴靑), 밀직부사 강윤충·안천길(安天吉)·노영서 등을 1등공신으로 삼고,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고려사절요 下卷 p117~118 충혜왕 임오 3년(1342)>
<고려사 절요에 없는 내용>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다움까페>
● [김영후(52세)] ○ 봄 2월에 왕이 본대궐에 가서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 왕이 김영후(金永煦)와 함께 북궁에서 술을 마셨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드러누우니 왕이 측근자를 시켜 부축하여 말을 태워주고, 따라온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이미 나에게 타던 말을 주었다” 하니 김영후가 마침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고려사절요 下卷 p119 충혜왕 계미 4년(1343)>
● [김영후(52세)] ○ 임오일에 원나라에서 내주(乃住) 등 8명을 보내왔는데, 이들은 거짓말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중략> 좌우사 낭중 김영후(金永煦),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 최안우(崔安祐),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 2명이 피살되고, 칼이나 창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복병을 두고 밖을 방어하여 그들을 도왔다. <고려사절요 下卷 p129~130 충혜왕 계미 4년(1343)>
<고려사 절요에 없는 내용>1343년(충혜왕4)에 정동성랑(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다움까페>
● [김영후(53세)] ○ 겨울 10월에 왕후(王煦)를 우정승에, 김륜(金倫)을 좌정승에, 김영후(金永煦)·강윤성(姜允成)을 찬성사에, <중략> 민사평(閔思平)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4~145 충혜왕 갑신 5년(1344)>
● [김영후(54세)] ○ 여름 4월에 김영후를 좌정승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6 충목왕 을유 원년(1345)>
● [김영후(54세)] ○ 12월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나라에 보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7 충목왕 을유 원년(1345)>
● [김영후(54세)] ○ 왕후(王煦)를 파면하고, 김영후를 우정승에,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에, 이곡(李穀)을 밀직사로 삼았다. 왕후는 정방을 폐지하고 과전을 폐지한 까닭에 욕심 많고 나쁜 무리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음으로 당시사람들이 실망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7 충목왕 을유 원년(1345)>
● [김영후(55세)] ○ 우정승 김영후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편에 황제가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7 충목왕 병술 2년(1346)>
●[김영후(56세)] ○ 5월에 왕후와 김영돈이 첨의부에 글을 올려 말했다.
우리들은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들어 나라를 정치하는데, 이제 행성의 이문소에서는 기삼만의 죽음을 가지고 그 허물을 정치도감에 돌려 서호와 전녹생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문 하유원(河有源)은 사사 감정을 품고 거짓으로 꾸며 신문하여 꼭 허위자백을 받으려 하니 지금부터는 정치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 뜻을 중서성에 전달하여 주십시오. <고려사절요 下卷 p151~152 충목왕 정해 3년(1347)>
●[김영후(61세)] ○ 인승단(印承旦)이 서연에 입시하여 변정도감을 폐지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이에 불응하고 다만 이르기를 “좀도둑이 방에 다니면서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하였다.
이 때 권세가들이 경기 일원 현의 공전을 빼앗았는데 인승단의 점유가 특히 많았다. 변정도감에서 그 전답을 몰수하고 더구나 여러 해묵은 조세까지 추징한 까닭에 인승단이 미워하였던 것이다. 다른 날에 김영후(金永煦)가 또 변정도감의 폐지를 청했더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자 서연을 설치했는데, 경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나의 마음과 어긋나도다” 하고는 몸이 아프다 칭탁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사절요 下卷 p186~187 공민왕1 임진 원년(1352)>
● [김영후(65세)] ○ 복창부원군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공신호를 내려준 것을 사례했다. <고려사절요 下卷 203~204 공민왕1 병신 5년(1356)>
● [김영후(70세)] ○ 상락후 김영후(金永煦)가 죽었다. 김영후는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침착하여 친척이나 친구 중에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었다. 그의 손자 김사안(金士顔)·김사형(金士衡)은 모두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혹 김영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느냐” 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자제들이 참으로 어질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쓸 것이요, 어질지 않으면 벼슬을 구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243~244 공민왕2 신축 10년(1361)>
댓글목록
김종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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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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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낮설은 단어가 많아 읽어 내리고 이해하기가 곤란한 부분도 있네요. 영후할아버님은 천이란 아들이 있고 천 할아버지가 모두 4명의 자녀를 낳은 것으로 족보는 기록 하고 있습니다. 4명의 자제중 위 맨 마지막에는 셋째인 사안, 막내인 사형 할아버지만 언급되어 있고 첫째인 사겸. 둘째인 사렴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영후의 아들인 천과 그 첫째, 둘째가 왜 기록에서 소홀히 된 것인지 심히 궁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