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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선조행장(金欣, 金恂, 金資, 金永暾, 고려사절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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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작성일11-01-23 17:37 조회2,202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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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에 수록된 선종행장을 요약하여 글을 올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려시대 선조 행장<고려사 절요 요약>

[金炘] ○ 왕이 흔도·홍다구와 함께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국문하였다. 홍다구가 우리나라와 오랜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김방경에게 죄를 자복하게 해서 나라에 화가 미치게 하려고 쇠줄을 머리에 두르고 못을 치려는 것처럼 하고, 또 매질하는 사람을 호령하여 그 머리를 치게 하고 종일 발가벗겨 세우니 날씨가 매우 추워 살과 피부가 얼어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왕이 홍다구에게 이르기를 “저번에 흔도와 함께 국문을 이미 끝냈는데, 어째서 다시 문초해야 되느냐” 하였으나 홍다구가 듣지 않았다. 마침 낭가대(郎哥歹)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는데, 홍다구 등이 다시 김방경 부자를 문초하니 왕이 낭가대를 오라고 하여 함께 문초하게 하였다.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조정으로 돌아갈 것인데, 황제께서 이 곳 사정을 물으시면 듣고 본 대로 대답하겠다” 하니 홍다구가 좀 수그러졌다. <고려사절요 中卷 p573 충렬왕 2 무인 4년(1278)>

 

[金炘] ○ 그리하여 갑옷 감춘 것을 죄명으로 뒤집어씌워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갈 적에 나라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울며 전송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575 충렬왕 2 무인 4년(1278)>

 

[金炘] ○ 장순룡과 백거가 원나라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왕을 뵙고 아뢰기를 “홍다구가 황제께 군사 3천 명을 더 보내 달라고 청하여 그 가운데 2천5백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는데, 황제가 왕이 아뢴 것을 허락하여 도로 철수하게 명하였으며, 홍다구가 또 전라도에 탈탈화손(脫脫禾孫)을 두도록 청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고, 또 칙명으로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노진의 등이 왕을 따라 조정에 들게 하여 대질 변명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순룡이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노진의를 데리고 원나라로 가는데,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노진의는 혀가 짓물러 죽었다.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위득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하니 위득유가 이 말을 듣고서 침식을 잃고 늘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한숨만 쉬었다. <고려사절요 中卷 p579~580 충렬왕 2 무인 4년(1278)>

 

[金炘] ○ 독로화 상장군 김흔(金炘)을 원나라에 보냈다. <고려사절요 中卷 p627 충렬왕 2 임오 8년(1282)>

 

[金炘] ○ 원나라에서 속간 이양무(李良茂)를 보내 저강 3천 정을 가지고 와서 전함을 건조하는 경비에 쓰게 하였다. 본국사람 유주(庾賙)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오랑캐를 시켜서 오랑캐를 치는 것이 중국의 방법이니 고려와 만자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고 몽골군은 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려에서 군량 20만 섬을 준비하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독로화 김흔(金炘) 등이 유주에게 말하기를 “너는 유검필(黔弼)과 유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이렇게도 국가를 무너뜨리고 싶으냐” 하니 유주가 말하기를 “너의 국왕은 흙으로 빚어만든 부처와 같으니 윤수·이정·원경·박의·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은 것만으로도 군량을 대기에 충분하다. 나는 좌우의 간신들을 제거하고 다시 삼한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629 충렬왕 2 임오 8년(1282)>

 

[金炘] ○ 김흔(金炘)을 부지밀직사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641 충렬왕 3 병술 12년(1286)>

 

[金炘] ○ 만호 김흔(金炘)에게 원나라의 정벌을 원조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양행성에 가게 했다. <고려사절요 中卷 p660 충렬왕 3 기축 15년(1289)>

 

[金炘] ○ 지밀직사사 김흔(金炘), 동지밀직사사 라유(羅裕)를 보내 동계의 방수군을 뽑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663 충렬왕 3 기축 15년(1289)>

 

[金炘] ○ 2월에 중군만호 정수기(鄭守琪)를 보내 금기산(禁忌山) 골짜기에 주둔하게 하며,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은 이천현 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한희유(韓希愈)는 쌍성에 주둔하게 하고, 우군만호 김흔은 환가현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라유는 통천지경에 주둔하게 하여 합단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663 충렬왕 3 경인 16년(1290)>

 

[金炘] ○ 봄 정월 합단의 군사가 장차 철령에 이르려 하니 방수만호 정수기(鄭守琪)가 소문만 듣고 도망해 왔으므로 순마소에 가두었다. 철령은 길이 좁아 겨우 한사람밖에 통하지 못하여 합단의 군사가 모두 말에서 내려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왔다.

이 때 적들은 몹시 굶주렸으나 정수기가 버리고 간 양곡을 거두어 수일 동안 진탕 먹고, 북을 울리며 전진해서 드디어 고개를 넘어 교주도로 들어오니 김흔(金炘) 등이 모두 지키지 않고 달아났다. 적은 곧 양근성(陽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사절요 中卷 p669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여름 4월에 한희유를 판삼사사로, 김흔(金炘)을 판밀직사사로, 최유엄(崔有渰)을 부지밀직사사 감찰대부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1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5월 1일 정유에 적이 연기현에 주둔하였다. 설도간의 대군과 우리 3군이 밤중에 목주를 출발하여 날이 밝을 무렵 연기현 정좌산(正左山) 아래에 이르러서 적진에 육박하여 불시에 포위하니 적이 크게 놀라 산으로 올라가서 험한 지리를 이용하여 싸우려 하였다.

우리 삼군의 보졸이 앞을 막고 기마병이 뒤를 쫓으니 적이 앞뒤로 견제를 받아 모두 말을 버리고 숲 사이에 숨어서 우리 선봉을 쏘아 두 사람을 맞히니 아군이 의아하고 두려워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김흔(金炘)이 꾸짖고 또 명하기를 “감히 뒤로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 하니 이에 보졸 5백 명이 앞을 다투어 올라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병졸 이석(李碩)·전득현(田得賢) 등이 앞으로 돌격하여 적의 선봉장사 두 명을 베자 승세를 이용하여 함성을 지르며 대군이 힘을 합하여 공격하니 적은 형세가 궁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추격하여 공주강에 이르니 죽어넘어진 시체가 30여 리에 이었고, 익사한 자도 매우 많았으며, 적의 정예기병 1천여 명은 물을 건너 달아났다. 부녀자·의복·안장말·보기(寶器) 등 노획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회군하여 연기현 북방 50리쯤 되는 곳에 주둔했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3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인후·한희유·김흔이 사람을 보내 전승을 보고하고, 포로로 잡은 부녀자 8명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3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김흔을 죽전(竹田)으로, 한희유를 충청도로, 라유(羅裕)를 교주도로 보내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잡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5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9월에 홍자번을 판전리사사 세자사로, 조인규를 판군부사사 세자부로, 염승익을 판판도사사 세자보로, 정가신을 첨의찬성사 세자이사로, 김흔을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7 충렬왕 3 신묘 17년(1291)>

 

[金炘] ○ 원나라에서 라유와 한희유를 회원대장군으로 삼아 삼주호부를 주고, 또 인후·한희유·김흔에게 궁시·옥허리띠와 은 1정, 안장 1벌을 주었으니 전공을 포상한 것이었다.

또 본국의 서경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한신(韓信) 등을 세자에게 딸려보내며 명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너희 나라를 배반하였으나 원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이 약간이나마 있으니 너는 크게 책망하지 말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679~680 충렬왕 3 임진 18년(1292)>

 

[金炘] ○ 김운(金惲)을 첨의참리로, 한희유를 지첨의부사로, 김흔(金炘)을 판삼사사로, 정인경(鄭仁卿)·류승(柳陞)·최유엄(崔有渰)을 모두 동지밀직사사로, 이혼(李混)·장순룡(張舜龍)을 모두 부지밀직사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681 충렬왕 3 임진 18년(1292)>

 

[金炘] ○ 정가신(鄭可臣)을 첨의사랑 찬성사로, 김흔(金炘)을 지첨의사사로, 김지숙(金之淑)을 판삼사사로, 안향(安珦)을 밀직사사로, 이혼을 동지밀직사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691 충렬왕 3 을미 21년(1295)>

 

[金炘] ○ 봄 정월에 만호 인후·김흔과 밀직원경(元卿) 등이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를 체포하였다. <중략>

그리고는 곧 좌승 합산(哈散)에게 고하기를 “한희유 등이 장차 인후와 김흔을 죽이고서 왕을 끼고 섬으로 달아나려 하므로 일이 급박하여 먼저 처치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어찌될지 모르겠기에 이제 그들을 체포하였으니 좌승께서 처리하시오”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722~724 충렬왕 4 기해 25년(1299)>

 

[金炘] ○ 인후·김흔·원경 및 상장군 강수(姜裋),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이우(李瑀), 소윤 민적(閔頔) 등이 일영은 도망가고 한희유 등은 자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차 원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호소하려 하므로, 왕이 우부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강수 등은 모두 인후와 김흔의 한패로서 한희유를 모함한 자들이다. <고려사절요 中卷 p724 충렬왕 4 기해 25년(1299)>

 

[金炘] ○ 황제가 황태자의 천추절을 맞아 인후와 김흔 등을 사면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729 충렬왕 4 경자 26년(1300)>

 

[金炘] ○ 가을 7월에 상락공 김흔(金炘)이 죽었다. 김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친척중에서 곤궁한 자를 더욱 구휼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792 충선왕 기유 원년(1309)>

 

[金炘] ○ 그런데도 국왕이 일찍이 징계하여 고치지 아니하고 간악한 소인인 전임 호군 이공(李恭)과 더불어 모의하여 대언 안문개(安文凱), 낭장 환윤전(桓允全), 재상 김흔(金炘), 백호 김성만(金成萬) 등을 보내 다시 무리하게 거둬들여서 백성의 고혈을 빨아내 잇달아 운송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43 충숙왕 임술 9년(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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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恂] ○ 류비(柳庇)를 판밀직사사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 중경유수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로 삼고,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 감찰대부로 삼고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中卷 p719 충렬왕 4 무술 24년(1298)>

 

[金恂] ○ 김혼(金琿)을 첨의중찬으로 삼아 곧 치사하게 하고, 송분(宋玢)을 첨의사랑찬성사 판감찰사사로, 한희유(韓希愈)를 찬성사 판판도사사로, 원관(元瓘)을 지밀직사사로, 김변(金賆)을 동지밀직사사로, 설경성(薛景成)·김부윤(金富允)·김순(金恂)을 모두 밀직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721 충렬왕 4 무술 24년(1298)>

 

[金恂] ○ 김순(金恂)을 상락군으로, 김자흥(金子興)을 계림군으로, 권한공을 첨의평리로, 최성지(崔誠之)를 동지밀직사사 대사헌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中卷 p806 충선왕 임자 4년(1312)>

 

[金恂] ○ 김이용을 수첨의정승으로, 김순(金恂)을 판삼사사로, 오잠·박허중(朴虛中)을 첨의찬성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34 충숙왕 신유 8년(1321)>

 

[金恂] ○ 심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전영보(全英甫)와 감찰언부관에게 명해서 권한공·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해 먼 섬에 귀양보냈다. <고려사절요 下卷 p35~37 충숙왕 신유 8년(1321)>

[金恂] ○ 판삼사사 김순(金恂)이 죽었다. 김순은 너그럽고 후하고 점잖은 사람이며, 날마다 관현악을 즐겼다. <고려사절요 下卷 p38~39 충숙왕 신유 8년(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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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資] ○ 봄 정월에 밀직사 임서(任瑞)와 대호군 김자(金資)를 원나라에 보내 절일을 축하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40 충숙왕 임술 9년(1322)>

 

 

[金資] ○ 상왕이 복위하고 나서 채홍철(蔡洪哲)·임중연(林仲沇)을 찬성사로, 윤신걸(尹莘傑)을 평리로, 김자(金資)·김인연(金仁沇)을 밀직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89 충숙왕 임신 후원년(1332)>

 

[金資] ○ 밀직 김자(金資)를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92 충숙왕 계유 2년(1333)>

 

[金資] ○ 겨울 11월 병진일에 원나라에서 중서성 단사관 두린(頭麟), 직성사인 구통(九通)을 보내왔다. 전왕이 선의문 밖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니 두린 등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이르러 황제가 주는 술을 올리고, 드디어 전왕의 저택에 가서 국새를 가져다 주었으며, 계해일에 두린이 황제의 명으로 낙안군 김지겸(金之謙), 전임 첨의평리 김자(金資)로 하여금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11 충숙왕 기묘 8년(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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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暾] ○ 언양군 김륜(金倫)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달려갔으나 보지 못하였다. <중략> 상락군 김영돈(金永暾)은 말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였을 때 신하가 죽음으로써 그것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김륜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신하는 왕에 대해서, 자식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마땅히 그 은정과 의리를 다할 뿐이다. 그 아버지가 벌을 받는데, 그 자식된 자가 차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황제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모든 재상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31~133 충혜왕 계미 4년(1343)>

 

[金永暾] ○ 상락군 김영돈(金永暾)이 대궐뜰에 나아갔는데, 신예(辛裔)·노영서가 붉은 신을 신고 종모를 쓴 채로 대궐문 안에서 호상에 걸터앉아 거만한 태도로 예를 갖추지 않았다.

김영돈이 이들을 앞에 불러놓고 말하기를 “내가 주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와 동쪽으로 돌아오시어 삼한을 다시 바로 잡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참지 못하여 대궐로 나와 전하를 뵈옵고자 하는데, 공들은 어찌하여 전대의 불량배들이 걸치던 사치스러운 관복을 아직도 바꾸지 않고 있는가. 이것이 어찌 풍기를 개혁하는 도리인가” 하니 노영서 등이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고려사절요 下卷 p136~137 충혜왕 갑신 5년(1344)>

 

[金永暾] ○ 9월에 찬성사 김영돈(金永頓)을 원나라에 보내 왕이 친히 입조하여 신정을 하례하러 갈 것을 청하고, 아울러 의복과 술을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7 충목왕 병술 2년(1346)>

 

[金永暾] ○ 2월에 전임 정승왕후와 좌정승 김영돈(金永頓)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에게 고하기를 “황제께서 선왕의 실덕에 대하여 물으시어 신들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처음에는 그와 같지 않았는데 다만 소인들이 그렇게 인도하였을 뿐입니다. 그 무리들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역시 지금의 왕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더니 황제께서 그렇게 여기시어 신들에게 칙명을 내리시기를 ‘너희들은 가서 그들을 정리하라’ 하셨습니다” 하니 대비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주어 그들을 위로하고 황은에 사례하였다.

김영돈이 황제의 밀지를 전하고 아뢰기를 “다시 왕후(王煦)를 정승으로 삼으시옵소서” 하였는데, 이 때 우정승 노책이 옆에 있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난 뒤 병이라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49~150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전에 이천현 아전이 공전을 정승 채하중과 이문 윤계종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런데 이 때에 안렴 김두(金斗)가 이르러 아전의 귀를 잘라 장차 도내에 조리돌리려고 이를 도감에 통첩하여 보고했더니 녹사 안길상(安吉詳)이 윤계종의 옛 은혜를 생각하고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 왕후와 김영돈이 노하여 그의 뺨을 때리고 죄상을 써붙인 북을 울려 그를 내쫓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1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김영돈(金永頓)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관을 가두셨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기삼만은 남의 전지 5결을 빼앗은 것뿐인데, 어째서 죽이기까지 하였는가” 하니 김영돈이 “삼만은 세력을 믿고 악한 짓을 자행했습니다. 어찌 남의 토지 5결을 빼앗은 것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문 하유원(河有源)을 불러 대변하게 하니 김영돈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친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먼저 거물급의 악질을 다스리는 것인데 서호와 전녹생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는 스스로 행성의 옥에 구속되니 왕이 명하여 그를 내보내 주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1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5월에 왕후와 김영돈이 첨의부에 글을 올려 말했다.

우리들은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들어 나라를 정치하는데, 이제 행성의 이문소에서는 기삼만의 죽음만을 가지고 그 허물을 정치도감에 돌려 서호와 전녹생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문 하유원(河有源)은 사사감정을 품고 거짓으로 꾸며 신문하여 꼭 허위자백을 받으려 하니 지금부터는 정치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 뜻을 중서성에 전달하여 주십시오. <고려사절요 下卷 p152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6월에 조득구(趙得球)를 탐라에 유배하였다. 일찍이 왕후(王煦)가 원나라에 입조할 때 조득구가 수행하였는데, 왕후가 조득구에게 정치할 일을 의논하였다. 조득구가 말하기를 “ 찬성사 강윤충은 어린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왕을 나쁜 길로 인도하려 하니 만일 정치하려 한다면 먼저 그를 제거해야 된다” 하였었다.

그런데 강윤충이 그 말을 듣고 한을 품고 있다가 이 때에 왕후와 김영돈이 기삼만의 죽음 때문에 정치할 수 없게 되자 원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아뢰고자 하는데, 강윤충은 조득구가 왕후를 따라가서 자기를 제거하려고 도모할까 두려워서 왕을 달래 그를 유배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2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왕후와 김영돈이 원나라에 가니 이문소에서는 거듭 사람을 보내 쫓아가 왕후와 김영돈을 잡아가지고 와서 정치도감의 관원과 함께 잡아 가두고는 기삼만을 죽인 까닭을 물었다.

마침 이 때 황제가 중서성 우사도사 올리불화(兀理不花) 등을 보내 의복과 술을 왕과 왕후와 김영돈에게 주고 정치한 일로 포상했는데, 왕후와 김영돈은 동선역에 이르러 올리불화를 만나고 곧 돌아왔다. 올리불화가 황제의 명으로 정치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를 물으니 이문소에서는 이를 듣고 가두었던 관원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서호(徐浩)가 허위자백하여 다시 정치관 오경(吳璟)·진영서(陳永緖)·안극인(安克仁)·이원구(李元具)·전성안(全成安)을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석방하였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3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황제는 또 친서를 내려 정치도감을 다시 두게 하고 왕후로 하여금 판사가 되게하였다. 이 때 김영돈(金永頓)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왕후는 그와 함께 따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황제가 이를 힐문하고 왕후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 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5~156 충목왕 정해 3년(1347)>

 

[金永暾] ○ 또 지정 6년에 천자께서 왕탈환(王脫歡)과 김나해(金那海)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폐정을 정치하도록 했을 때 왕탈환이 “그전의 사건은 강윤충이 실제로 화의 장본인이니 마땅히 먼저 그를 내쫓아야만 가히 정치가 될 수 있다” 하였더니 강윤충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간계를 꾸며 김나해를 속이고 왕탈환을 억제하여 정치하는 사업을 그르치게 하였습니다. <중략>

왕탈환은 곧 왕후(王煦)요, 김나해는 곧 김영돈(金永頓)이다. <고려사절요 下卷 p156~159 충목왕 무자 4년(1348)>

 

[金永暾] ○ 상락부원군 김영돈(金永頓)이 죽었다. <고려사절요 下卷 p161 충목왕 무자 4년(1348)>

 

[金永暾] ○ 정묘일에 왕이 김영돈(金永頓)의 집에서 죽었다. 이 때 신예·전숙몽(田淑蒙) 등이 서로 이어 나랏일을 전단했으므로 북전의 불량배들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몇 달이 안되어 그들의 옛 친척과 친구들이 높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대언 정사도(鄭思道)가 아첨으로 등용되어 오래도록 정방에 있으니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몰려들었다. 이 때 사람들이 신예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하였다. 또한 모비(母妃)는 젊은 나이로 그 사이에 있어 강윤충과 배전(裵佺)이 드나들면서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므로 왕후(王煦)와 김영돈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옛 폐정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강윤충 등의 모함에 빠져버리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고려사절요 下卷 p163 충목왕 무자 4년(1348)>

 

[金永暾] ○ 김나해(金那海)·윤안숙(尹安淑)을 삼사우사와 삼사좌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167~168 충정왕 기축 원년(1349)>

 

[金永暾] ○ 김나해(金那海)를 판삼사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下卷 p173 충정왕 신묘 3년(1351)>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문중사 중 고려사 기록 자료, 잘 읽었습니다.

김종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종태
작성일

  홍다구,,과거로 타임 슬립하여 니를 만나면 얼은 똥물에 담구어 주마...감히 방경 할배를 문초해..이 오줌에 튀길 넘아!!!

김종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종태
작성일

  金永暾 → 金永頓 중간에 한자가 바뀌어서 한사람을 오기한 것인지 두분인지 잘 알지 못하겠네요. 暾 이 할아버님은 영후의 큰 아들이고 혹시 이 분 頓 은 전혀 다른분 인가요?
아 ! 한자는 어렵습니다.

김상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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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린 글을 보와 주시어 감사합니다. 김영돈 할아버님의 한자가 삼국사절요에 달리 되어 있어 다른 사람인가를 확인할 결과 우리 할아버님이 맞습니다. 돈자를 2가지로 쓰신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영후의 아들 김영돈이 할때 暾이아닌 頓으로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