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공 김영후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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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11-01-20 19:11 조회2,013회 댓글2건본문
高麗國 左右政丞 福昌府院君 上洛候 諡貞簡
安東金公永煦 事績
공의 성은 김(金)이요 휘는 영후(永煦)로 신라 경순왕 김부(金溥)의 원손이다 5대조 의화(義和)는 사호 증직 검교군기감(司戶 贈檢校軍器監) 고조 민성(敏成)은 장야서승겸직사관 증직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掌冶暑丞兼直史館 贈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 증조 효인(孝印)은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지제고 증직 금자광록대부 중서령(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官修撰官 知制誥 贈金紫光祿大夫 中書令) 할아버지 방경(方慶)은 중봉대부 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식읍1천호실봉3백호 증직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시호 충렬(宣授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事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實封三百戶 贈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諡忠烈) 아버지 순(恂)은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 시호 문영(重大匡上洛君 判三司事 寶文閣大提學上護軍 贈諡文英)이다. 어머니 제평군부인(齊平郡夫人) 양천허씨는 문경공 허공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넷은 영돈(永暾) 영휘(永暉) 사순(思順) 영후(永煦)이고 딸 셋은 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에게 시집갔다.
공은 1292년 태어나 고려 충숙왕조 사헌지평(司憲持平) 상주목사(尙州牧使) 봉선대부 자섬사사(奉善大夫資贍司使) 삼사우윤(三司右尹) 충혜왕조 삼사우사(三司右使)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 삼사좌사(三司左使)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 충목왕조 찬성사(贊成事) 제조정방(提調政房) 좌정승(左政丞) 우정승(右政丞)이 되었고 공민왕조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지고 1361년 70세로 별세하셨으며 정간(貞簡)이라 시호되었다.
1327년 공은 36세로 상주목사가 되어 법주사 자은종 자정국사와 교유하였고 상주객관을 중영하였으며 기문은 안축 찬이다 상주는 1283년 부친께서 26세로 상주판관으로 나와서 선정을 베푼 곳이다. 1341년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도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공은 삼사우사로 고종사촌 채하중, 백형 김영돈, 김륜(민사평 처부), 이제현(이진 아들), 사촌 김승택 등과 함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43년 원나라의 자정원사 고용보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으며 훗날 충혜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1346년 공은 백형 김영돈, 안축, 이제현, 김광재(사촌 김승택 사위) 등과 함께 개성 연복사종을 주조하는데 참여하였고 명문은 이곡(이색 부친)이 짓고 성사달이 썼는데 연복사는 일명 보제사로 1270년대 후반 조부 충렬공께서 본전인 오백나한당을 건축했던 사원이었다. 1352년 복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이제현, 안진, 사촌 김승택, 안목(김사렴 처조부) 등과 함께 공민왕 서연에 입시하여 변정도감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1300년 조부께서 만년 본댁 개경 백목동 앵계리에서 89세로 돌아가시자 부친이 예안 서산에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은 조부의 보살핌을 받고 인척관계인 이진(이제현 부친)에게 요청하여 지었다 1319년 공은 충숙왕의 사명을 받들고 부친의 충렬공 묘소 참배를 배행하였다 1321년 부친께서 64세로 돌아가시자 백형 김영돈 등과 함께 개경 덕수현 마산에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은 부친의 친구인 민지에게 요청하여 지었다 1332년 모친 양천허씨께서 68세로 별세하였는데 묘지명은 이제현 찬이다 1350년 공의 집에 비장되어 오던 조부 충렬공 행장이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였는데 발문은 안진 찬이다.
공의 호는 온재(穩齋), 국헌(菊軒)으로 민사평(백부 김흔 외손자, 김묘 처부) 등과 교유하여 시문이 전하고 있다 공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손자들인 사안(士安) 사형(士衡)의 나이 모두 약관을 지났을때 어떤 사람이 공에게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공의 배위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 청주한씨는 한강의 손녀이며 한보의 따님이다 아들 천(蕆)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 이르렀는데 원나라의 승무랑 자승고경점 벼슬을 받기도 하였고 후에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상락군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장(萇)은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손녀 하나는 허강에게 출가하였고 손자 사겸(士謙)은 1365년 종부령을 거쳐 판서에 이르렀으며 손자 사렴(士廉)은 1358년 공민왕 비서감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고 훗날 두문동 72현으로 칭송되었다 손자 사안(士安)은 전라도관찰사 시호 충강(忠康)이며 손자 사형(士衡)은 좌정승 상락부원군 시호 익원(翼元)으로 조선개국 1등공신이다 손자 수(綏)는 서운관정을 역임하였다 이어 대대로 공의 후손에서 수많은 선서문장(善書文章)과 충신열사(忠臣烈士)가 배출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金九)는 민족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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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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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정간공 사적 잘 읽었습니다.
제 의견은 메일로 드리겠습니다.
김종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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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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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따님이 세분이나 계셨군요...혹시 상주에 가면 무슨 유적이나 흔적이 남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