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촌 2차 답사기_01 삼소재에서 만난 고문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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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10-12-08 17:44 조회2,294회 댓글3건본문
화림촌 2차 답사기_01 삼소재에서 만난 고문서들
※ 이 답사기는 일부 내용을 충렬공실기에 수록할 예정이므로 후속작업을 위해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일시 : 2010. 11. 12(금)~14(일) 2박 3일
• 답사지 : 안동시 풍산읍 삼소재, 서삼리 화림촌, 상락대, 예천 초간정, 예천권씨 종택 등
• 참가 : 9명 - 재영, 상석, 좌회, 발용, 태우, 태영, 민식, 용주, 윤식(무순, 경칭 생략)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건만 마음은 벌써 안동에 가 있었다. ‘충렬공실기’(가칭)에 수록할 자료와 사진촬영 및 우리 선대 묘역으로 추정되는 화림촌(花林村)을 다시 답사하러 가는 길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화기애애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충렬공실기에 수록되는 <대동운부군옥>의 지은이 권문해 선생의 유적지(초간정, 예천권씨 종택)와 물계서원 터, 서애 유성룡 선생 묘소 등을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삼소재에서 만난 안동김씨종약소 문서들
17:00시 정각 천호역 인근에서 빌린 렌터카로 1진(발용, 민식, 용주, 윤식)이 서울을 출발, 18:00 정각 성남 모란역에서 2진(재영, 좌회, 태우, 태영)이 합류했다. 상석 종친은 거래처와의 중요한 약속으로 조금 지체된다는 연락이 왔기에 19:00시에 낙생고 정문 앞에서 만나 안동으로 향했다.
계획보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서두르면 10시경에는 삼소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연장자이신 재영 종친이 삼소재 석교 종친에게 연락을 드렸다. 결례이기는 하나 일정이 빡빡해 답사팀 모두 여건이 허락하면 밤중에라도 삼소재에 소장된 자료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렸건만 모두들 허기진 상태라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길을 서둘렀다.
하지만 도착 예상시간이 10시를 넘을 것 같아 중간에 삼소재 방문을 취소한다는 연락을 드렸다. 충렬공 세향에도 참예해야 하기에 실기자료 확보와 답사지를 둘러보는 데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것 같았다. 결국 대다수 의견이 삼소재에서 허락만 한다면 한밤중이라도 방문하기로 하고 다시 전화를 드렸다. “중요한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오시라.”는 석교 종친의 선선한 승낙이었다. 오랜 세월 정을 나누고 함께 종사(宗事)에 헌신하신 재영 종친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석교 종친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린다.
삼소재에 도착한 것은 날이 바뀐 00:10분경이었다. 반가이 맞아주시는 석교 종친의 손을 잡고 삼소재 사랑채로 들어섰다. 맞절로 인사를 나누고 삼소재에서 소장하고 있는 능골 재실 중건 당시 상량문에 대해 말씀드리자 석교 종친이 서실(書室)로 사용하는 작은 방으로 안내하였다. 선반 위에 각종 문집과 문서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고문서들은 별도로 보관함에 정리해 둔 상태였다.
꺼내 놓고 보니 간찰, 교지, 필사본 등 고문서들이 사랑방에 하나 가득이었다. 우선 충렬공실기에 수록할 상량문을 촬영하기 위해 답사팀 일행은 상량문부터 찾았다. 이 상량문은 충렬공실기에 수록할 옛 문서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으로 1995년 1월 발간된 <국역삼소재문집> 첫 부분에 흑백 사진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화질이 좋지 않아 충렬공실기에 수록하려면 필히 재촬영을 해야만 했다.
고문서들을 만지느라 어느새 손바닥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한참 동안 보관함 두 개에 들어 있는 고문서들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끝내 상량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안동김씨대동종약소에 깊이 관여하신 수오 어른(석교 종친 증조부)의 대동종약소와 주고받은 서찰과 대동종약소 관련 문서들을 상당수 확인하였다. 충렬공실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태영 종친이 일제강점기의 안동김씨종약소 초기 문서들을 대량 입수했는데, 이 문서들을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종사(宗事)들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자료에 삼소재에 보관된 대동종약소 문서들을 종합해서 면밀히 분석하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들은 다음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촬영과 내용 분석을 하기로 하고 가지런히 정리해 다시 서실(書室) 제자리로 옮겨놓았다.
▲ 삼소재 사랑채에서 고문서들을 살펴보는 답사팀.
석교 종친의 선대 어르신들께서 주고받은 간찰을 비롯해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졌다.
이 가운데 안동김씨종약소 관련 문서들이 대거 발견돼 향후 세밀한 조사가 필요해졌다.
▲ 상량문은 찾지 못했지만 뜻밖의 수확으로 답사팀 모두 흥분된 표정으로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다.
▲ 충렬공 파계도.
▲ 재영 종친의 선대인께서 삼소재에 보내신 간찰.
말씀 안 하셔도 애틋하고 감격스러운 재영 종친의 마음이 삼소재에 가득한 밤이다.
1년여 동안 상량문 소재를 수소문한 일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더 이상 소란을 떠는 것도 삼소재에 폐만 더 끼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음 답사 일정도 만만치 않아서 다음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작별 인사를 드리자 한사코 요기라도 하라고 손을 놓아 주지 않는다. 이 늦은 시각에 환대해 주신 것만 해도 송구한 일인데 먼 길 오신 일가 손님을 어찌 그냥 보내느냐는 말씀에 답사팀 모두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떡과 마실 것을 내오시는데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02:10분경 삼소재를 뒤로 하고 안동 시내로 들어오니 주말이라 9명 대식구가 하룻밤 묵을 숙박업소를 찾는 일도 손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시내를 돌고돌아 겨우 답사팀이 모두 한곳에서 묵을 방을 구했다. 어느새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넘어서 있었다. 몇몇은 세면을 하고 달콤한 꿈나라로, 몇몇은 이런저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05:30분경 겨우 눈을 붙여 07:00시에 눈을 떴다.
톺아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땅
따끈한 국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08:20분경 안동 시내에서 예천 초간정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08:55분경 초간정이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늦가을 햇볕에 눈이 부셨다.
초간정은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권문해 선생이 머물던 곳으로 주위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이었다. 주위는 그저 평탄하기만 한데, 초간정 주위에 커다란 바위가 몰려 있으면서 두 갈래 물길이 흐른다. 초간정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깊고 깊은 산 속 못지않은 곳이었다. 초간정을 휘감아 돌아가는 개울로 내려가니 제법 폭도 넓고 깊어서 흥취가 절로 일어난다. 정자가 올라앉은 기암괴석에 ‘초간정(草澗亭)’이라는 큰 글자가 눈길을 끌었다. 그 위쪽으로 정차 처마 아래에 ‘석조헌(夕釣軒)’이라는 작은 현판이 참 알맞은 크기로 알맞은 자리에 걸려 있었다.
▲ 초간정. 권문해 선생이 머물며 대동운부군옥을 집대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주위 경관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선경을 방불케 한다.
▲ 초간정 주위를 둘러보는 답사팀.
▲ 초간정 입구. 민박도 가능하다.
▲ 초간정을 휘돌아 나가는 물길.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선 느낌이 들 정도였다.
▲ 초간정 바로 밑 바위에 새긴 암각문.
초간정은 1582년(선조 15년)에 권문해 선생이 처음 지었는데, ‘초간(草澗)’은 그의 호이다. 그 후 1636년(인조 14년)에 화재를 입은 것을 그의 현손이 1870년(고종 7년)에 지금의 건물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 뒷줄 오른쪽부터 재영, 민식, 태우, 상석, 좌회
앞줄 오른쪽부터 태영, 용주, 윤식
▲ 초간정 주차장에서 내려다본 장면. 수백 년 역사를 지켜본 노송들이 초간정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초간정 개울과 기암괴석. 한여름밤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인다.
09:20분경 초간정을 떠나 대동운부군옥 초판본 판목(板木)을 보관하고 있는 예천권씨 종택(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으로 향했다. 종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량으로 불과 10분 이내이니, 그 옛날 종택에서 초간정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노라면 딱 알맞았을 것 같은 거리였다.
종택은 권문해 선생의 조부 권오상 선생이 지은 건물로 조선 초기 영남지방 사대부 가옥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종택 옆 ‘백승각(百承閣)’에는 대동운부군옥 초간본을 찍어 낸 목판이 보존돼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우리 할아버지 기록이 담겨 있는 그 옛날 그 목판들, 비록 나라의 중요한 보물이라 친견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다가갈 수 있는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백승각에는 대동운부군옥 외에도 초간일기를 비롯해 권문해 선생의 아드님 권별(權鼈) 선생의 죽소일기와 해동잡록 등 예천권씨 종가 문적들이 보관돼 있다.
애애애애애~~~ㅇ~~.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느닷없이 요란스런 경보음이 울렸다. 백승각 주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지선이 설치된 모양이었다. 관람객이 일정 거리 안으로 백승각에 접근하면 자동으로 경보음이 울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CCTV가 설치돼 있었다.
▲ 예천 권씨 종택. 조선 초기 영남지방 사대부 가옥 특징을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 백승각. 대동운부군옥 초간본을 찍어 낸 목판과 각종 서책을 보관하고 있다.
종택을 둘러본 답사팀은 물계서당과 물계서원 옛 터에 들렀다가 회룡포로 향하기로 했다. 09:30분 종택을 출발해 09:55분 물계서당에 도착했다. 한참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까웠다. 지난 2008년 11월에 물계서당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맸던 기억이 새롭다. 그 새 물계서당 건물은 더 쇠락해 마음이 언짢다. 발을 옮길 때마다 마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 물계서당. 커다란 암반에 세웠는데, 찾아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 물계서당 현판(위)와 물계서당 기문(아래).
충간위에서는 충렬공실기에 수록하기 위해 물계서당기 원문을 해석하여 준비를 끝냈다.
그 소리를 뒤로 한 채 물계서원 옛 터로 향하는데 삐걱대는 소리가 발걸음을 잡는다. 물계서원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1년여 전부터 접촉을 했지만, 이번에도 도유사 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다. 중요한 서류를 갖고 있다는 말씀에 몇 번이나 만나고자 했으나 인연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물계서원 옛 터 위로 새 무덤이 들어섰다. 지난 여름 이곳을 들른 발용 종친의 이야기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눈으로 보니 물계서원 자리에 옛 건물이 복원되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를 건너편으로 옮겨 석송령을 잠시 구경했다. 울창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장관이다. 그 옆에는 석송령 2세 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1996년 9월 석송령 씨앗을 받아 키운 나무니 벌써 15년이 가깝다.
▲ 물계서원 터로 향하는 답사팀.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다.
▲ 물계서원 옛 터. 지금은 밭으로 변해 옛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 석송령. 반송의 한 종류라고 한다. 가지가 넓게 퍼져 장관을 이룬다.
▲ 석송령 앞에서 추억 만들기. 이 모든 게 훗날 꿈 속처럼 소중히 간직되리라,
▲ 석송령 앞에서. 왼쪽부터 좌회, 태우 종친.
10:35분 석송령을 출발해 11:35분 회룡포 맨 위 주차장에 도착했다. 회룡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길을 잘못 잡아 회룡포 마을로 들어갔다 되짚어 나오느라 시간이 좀더 걸렸다. 회룡포로 들어가는 길은 절경이었다. 잘록한 산허리를 지날 때에는 회룡포를 감돌아 나가는 물길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어서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회룡포 전망대는 주차장에서 능선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근에 모방송국 TV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이후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회룡포와 물길은 또 하나의 환상 그 자체였다. 관망대로 쓰이는 정자 ‘회룡대(回龍臺)’ 주위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관광 인파가 넘친다.
▲ 회룡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회룡대에서.
▲ 회룡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 물길이 가늘게 뻗어나온 산줄기와 마을을 감싸고 돌아나가는 절경지다.
12:05분경 머릿속에 회룡포 절경을 추억으로 새기고 12:20분경 삼강주막에 도착했다. 뱃사공과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곳. 서너 해 전에 모 일간지에 ‘이 땅에 마지막 남은 주막’으로 소개된 후 관광지로 변신한 곳이다. 강과 주막은 그대로건만, 옛 뱃길 위로 웅장한 현대식 다리가 가로질러 사람과 물자는 바람처럼 강을 지나간다. 제방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노라니 그 다리 밑으로 여전히 뱃사공들의 노랫가락이 때로는 애잔하게, 때로는 우렁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이제 강물을 따라 그 노랫가락을 타고 상락대로 향할 시간이 다가왔다.
▲ 삼강주막. 두칸짜리 초가를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거목. 뒤쪽이 낙동강이다.
▲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삼강주막 부엌채 사립문에 붙은 삼강주막 내력.
▲ 탁주 한 사발과 국수 한 그릇,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정담, "상락대 가셔야죠?"
▲ 다시 보고 싶다.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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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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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귀한 자료들을 대하는 손길들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예천은 저의 근무 연고지인데 먼저 연락 주셨더라면......
특히 좌회박사님 반갑네요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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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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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오랜만입니다.
전 자료가 게시되면 본 홈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종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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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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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잘 읽엇습니다. 회룡포 마을, 과거에는 절집도 있고 학교도 있을 만큼 컸지만 지금은 모두 이농하고 몇집 안 남았지요. 내성천에는 회룡포 같은 마을이 여럿 있습니다. 다만 그리 멀리 올라가 한 곳을 조망하기가 적당한 자리가 없어 사진작가들 눈에 뜨인 곳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