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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본『난중일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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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10-07-10 15:30 조회2,11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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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완역『난중일기』양장본 소개

지은이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10. 4. 20 <민음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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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요약 - 이순신의 육필일기로 친필 일기초는 전편이 초서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 쉽지 않고 특히 유난히 전쟁이 치열했던 임진년, 계사년, 정유년의 일기는 두드러지게 긴박한 상황이라 심하게 흘려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이유로 글씨의 삭제나 수정이 반복된 흔적이 곳곳에서 많이 나타난다.

 정조 때 이 『초고본』을 해독하여 윤행임과 유득공에 의해『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는데 당시 편찬자들이『난중일기』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전서본을 이서하는 과정에서 해독 및 오탈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담겨 있는 상당한 내용은 수정, 편집되거나 누락되어 내용이 일부 달라졌을 것이다.

 이후, 발간된 『난중일기』류는 당연히 일부분을 제외하려는 편찬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전서본을 모본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온전한 활자본이라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옮긴이는 이때 판본에 누락되어 있던 「을미일기」의 일기초 32일치를 『충무공유사[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를 해독하는 과정을 통해 발굴하여 함께 교감하여 실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원균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이 새로 발견된 일기에서는 그 감정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상관인 권율에 대해 좋지 않게 언급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랄 수 있겠다.

 이 책은, 4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1595(을미)년 일기와 함께 누락 및 오기된 문장들을 일일이 원본과 대조하며 주를 달아 수록한 책으로 조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또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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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를 읽고

 지금까지 접한 『난중일기』나 이순신과 관련한 영화나 드라마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내용이었다면, 위 책은 개인적이고 가정사적인 내용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전쟁 중 겪게 되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기이한 꿈, 해몽, 점, 바둑, 심지어 부하들의 승경도 놀이를 구경하거나 특히 매일같이 화살을 쏜 순(단위)까지 일일이 적어 놓았다.

 이순신은 분명 용장이며 백성을 능멸한 선조(鈞, 하성군)의 충성스런 신하였다. 하지만, 성웅도 일기초에서는 나라의 제사, 망궐례, 가족은 물론이고 처가의 제사나 집안의 여종과 관련한 기사까지도 꼼꼼히 챙기는가 하면 부하들의 휴가나 귀가신고는 물론 식은땀이 요까지 적시는 불편하고 고단한 상황에서도 경상 좌우도, 전라좌우도, 충청도 등 서남해 연안의 방백에서부터 수령들의 오고감까지 빠짐없이 낱낱이 적고 있다.

 일기 곳곳에서 조정을 신뢰하지 않는 주인공의 내심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의 참혹하고 비통한 일기는 노량에서 장렬한 전사를 앞둔 이틀 전까지 이어진다.

 아! 조선의 바다여! 선조의 무능을 묵인하고 그때도 푸르렀는가?

 

충무공 이순신 사후 1600년 연간(임진왜란 후 동북아의 변화)

 조일전쟁 후 조선이 광해를 지나 인조(반정)조가 이어지는 동안 먼저 일본에서 1604년에 강호(江戶, 에도)시대를 개창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만주(여진)족인 누르하치(奴兒哈赤, 청태조)가 1616[광해8]년, 심양에서 후금을 세웠다.

 이어, 그의 아들 청태종(皇太極, 홍타이지)은 몽골(원)이 그랬던 것처럼 수적 열세를 이이제이(以夷制夷)로 풀어 대륙을 장악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핍박한다.

 그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등은 1644년 시월 북경의 자금성에서 順治帝의 즉위식이 끝나고 영구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오른다. 심양에서 세자시강원, 익위사, 선전관, 의관 등 100여 명과 함께 귀국하는 세자일행의 짐 속에『심양장계』와『심양일기』의 초고본이 있었다.

 

질곡의 역사는 반복되며 이어지고------,

 1645년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다음 해 봄 시아버지로부터 사약을 받은 세자빈(숙종조 1718년 복권되어 시호 愍懷를 받음) 죽음.

 조일전쟁(임란) 후 왕조가 변하는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은 선초에 정립한 강력한 통치철학(이념)인 조선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선조를 방치했음은 물론 광해를 처리하는 과정도 역성혁명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그 대리인으로 발탁된 능양군(倧, 인조) 역시 인선의 실패였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러한 오점을 뒤로하고 새로운 왕조가 아니라면 차라리 소현세자를 살려내서 왕좌를 물려주고 싶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 씨는 정부(조정)와 국민(백성)을 살피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으며 볼모기간 중 재청조선대사로 조청간의 외교적 완충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그 역할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삼전도 치욕 뒤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알면서도 아비인 인조의 보수(폐쇄)와 아들내외의 진보(전진)성이 조선유학의 걸림돌을 깨지 못하고 수그러들었고, 재상들 역시 주화와 주전(척화)파로 갈리어 반목했다.

혹자는 오히려 명청교체기에 보여준 광해와 최명길의 외교를 묶어 고려조 서희와 김방경의 외교술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있다.

 

야사 한 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영구귀국을 앞둔 어느날, 당시 청의 황제인 순치제(누르하치의 손자)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기로 하였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세자일행이 돌아와 하사품에 관해 인조에게 아뢰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다. 훗날, 이말이 요년석 - 요녀석’으로 와전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용례로 ‘쪼다’라는 말 역시, 조두아[鳥頭兒-새대가리 같은 놈]가 변해서 만들어진 말로 보는 설 외 고구려 장수왕의 아들로 광개토대왕의 손자인 ‘고조다(高助多)’가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인 장수왕이 98세까지 장수를 하니 세간에서 “조다는 왕도 못해보겠다!”라며 그 후로 ‘조다 - 쪼다’같은 놈이라 했다고 전해온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교감본 속에 삭제, 누락되었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니 읽어버고 싶습니다.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