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원성전(문숙공 김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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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10-04-06 17:39 조회2,180회 댓글1건본문
아계유고 제3권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
김원성전(金原城傳)
황명(皇明) 만력(萬曆) 20년 임진에 섬나라 왜적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난리를 일으켜, 우리나라 땅 팔도 중 일곱이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적의 흉포한 예봉이 돌진해 오자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하여 강하고 큰 번진(藩鎭)들이 여지없이 꺾이고 무너졌으며, 심지어는 도성을 비워둔 채 떠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일이 어떠했겠는가. 적이 길을 나누어 밀고 올라올 때, 길성중륭(吉盛重隆)은 관동(關東)으로 삐쳐 올라와 열읍(列邑)을 짓밟은 다음 이내 흡곡(歙谷 강원도 통천(通川)에 있던 현(縣))으로 방향을 돌려 동쪽을 따라 내려와 평해(平海)에 이르고 다시 재를 넘어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경계(境界)에는 사람이 없고 관문에는 빗장이 없어 탄탄대로를 마구 치달림에 주먹만한 돌, 짧은 막대기 하나라도 말발굽 사이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도망쳐 숨는 자들은 깊이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이요 저들에 빌붙는 자들은 남보다 뒤질까 걱정이라, 관동을 둘러싼 20여 고을에 남자가 없었으니, 당시의 일이 또 어떠하였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로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공(金公)이 삶을 터럭처럼 가벼이 보고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겨 오직 의(義)를 따랐던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나라의 명맥을 어떻게 부지했겠으며, 적의 간담을 어떻게 서늘하게 했겠으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으며, 만세에 충성된 신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아아, 충성스럽도다. 아아, 충성스럽도다.
왜란이 막 일어났을 때는 곧 공이 원주에 부임한 지 채 일 년이 되기 전이었으며 원주는 충주(忠州)와 거리가 가까웠다. 처음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온 경내(境內)의 장정과 온 고을의 병기를 모두 거두어 말과 수레에 실어다 군중(軍中)에 소속시켰는데, 끝내 발길 하나 화살촉 하나 돌아가지 못했으니 고을은 그저 텅 빈 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적이 북쪽으로 길을 잡아 철령(鐵嶺)을 넘고 곧바로 회주(淮州)로 쳐들어 옴에 진영(陣營)이 전후로 줄을 잇고 인근 고을까지 휩쓸어 북소리가 끝없이 들리고 기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에 사방의 고을들이 모조리 흉포한 적도들의 소굴이 되었고 저들의 칼날이 미치지 않은 곳은 오직 원주뿐이었으니, 마치 한 덩이 고기를 호시탐탐 입맛을 다시는 굶주린 맹수들 사이에 놓아둔 격이라, 아침저녁 사이에 잡아먹히고 말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안정된 마음으로 기색이 평상시처럼 변함이 없었으며, 단지 눈물을 흘리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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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뜻있는 일을 할 때가 왔다. 그대들은 감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
하니, 백성들은 그 의기에 감화되고 선비들은 그 충성에 감동하여 오직 공의 명령을 따를 뿐 어기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공이 재숙(齋宿)하고 일어나 융상(戎床)에 앉아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집과 전통을 갖추고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군졸들의 대오를 정비해 놓은 다음 좌우에 시립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여 묻기를,
“누가 몸이 날래고 용감하며 무예가 뛰어나고 미더워 함께 일할 만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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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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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문숙공 김제갑 선조님께서 1592년 임진왜란시 원주산성에서 있었던 놀랍고 장렬한 김원성전 잘 읽었습니다.
아계 이산해의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