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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고향 영가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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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10-14 10:21 조회1,9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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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방경의 선계


   < 김방경 묘지명 >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諱)는 방경(方慶)이시니 영가군(永嘉郡 : 경북 안동시) 사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호(司戶) 벼슬을 지내신 의화(義和)이시니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에 추증되고, 할아버지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館) 민성(敏誠)1)이시니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효인(孝印)2)이시니 금자광록대부 중서령(金紫光祿大夫 中書令)에 추증되었는데, 모두 공(公)으로 인하여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는 원흥진3) 부사 낭장(元興鎭副使 郎將)으로 본관이 김해부(金海府 : 경남 김해시)인 송기(宋耆)4)의 따님이시다.

公姓金諱方慶永嘉郡人也祖司戶義和檢校軍器監祖掌冶署丞兼直史館敏誠1)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考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修撰官知制誥孝印金紫光祿大夫中書令皆以公故追加妣元興鎭副使郎將宋耆本金海府之女也


   <김순 묘지명>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공은 김부의 15대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증조 민성(敏成)은 좌복야 행장야서승 겸 직사관(左僕射 行掌冶署丞 兼 直史館)에 추봉되었고, 조부 효인(孝印)은 중서령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추봉되었으며,


   <김승용 묘지명>

   공의 이름은 승용(承用)이고, 영가(永嘉) 사람이다. 증조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며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된 효인(孝印)이고,


증조부 김의화

   김방경의 증조부 김의화(金義和)는 사호(司戶)5) 역임. 향리직으로 영가군(永嘉郡) 사호 였을 것이다. 증손자 김방경이 귀하게 되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추증되었다. 위위주부에 추증되었다는 기록6), ‘配 德原夫人 朴氏’라는 가전(家傳) 기록7)도 있다.


조부 김민성

   김민성(金敏誠)은 벼슬이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 兼 直史館)8) 에 그쳤으며, 손자 김방경이 귀하게 되어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配 述禮夫人 崔氏’라는 가전(家傳) 기록9)도 있으나 崔氏가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없다.

   당시 문과 급제후 직사관을 거치는 관례로 볼때 김민성도 문과에 급제한 듯하나 벼슬이 정8품 하급직에 그쳤다. 늦은 나이에 문과 급제한 것인지, 출사하자마자 어떠한 이유로 물러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자녀 교육에 전념한 듯하다. 아들 김효공(孝恭, 개명 敞)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詩)ㆍ서(書)ㆍ예(禮)의 아언(雅言)을 들었’ 고, 아들 김효인(孝印)이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다’ 는 기록10)이 있으며, 두 아들이 1206년, 1208년 연이어 문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김민성과 배위는 일찍부터 자녀 교육에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김민성은 자녀 및 손자의 올바른 교육을 통하여 문과 급제 및 중앙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가문 중흥의 실질적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김방경은 후에 ‘전고(典故)와 예식(禮式)에 밝았’ 으며, ‘과거 급제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어려서부터 조부 김민성에게서 시(詩)ㆍ서(書)ㆍ예(禮) 및 과거 급제를 위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1).

3. 안동 녹전면 서삼리 (말바위골, 화림들, 고려시대 고분군)

* 말바위골  ? 김방경 성장지,

* 화림들  ? 몽골군 주둔지 둔전, * 화림 : 몽골 초기 수도 카라코룸

* <1580 경진보 기록> 김민성 묘 : 안동부서 일식 화림촌  ?안동부(예안현)서 일식 화림촌


아, 화림촌(花林村)

- 안김(安金) 최고(最古)의 선영(先塋)을 찾아서 / 01 선조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간 길

사진 발용 / 글 태영, 윤식

◈ 일시 : 2008년 11월 21일~23일

◈ 장소 : 안동시 녹전면 능골, 서삼리 화림촌, 예천 물계서원 등

◈ 참가 : 3명 - 발용, 태영, 윤식


(전략)

점심 시간에 맞추어 배영동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능골을 나왔다. 사신리의 느티나무를 지나 감애로 향하다가 길이 약간 꺾이는 곳을 지날 때였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커다란 돌표석에 적힌 글귀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번쩍 한다. 길이 꺾이는 지점이라 운전 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말바위!’

발용 종친과 동시에 그 말이 튀어나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태영 종친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차를 돌릴 장소를 찾으니 앞쪽에 ‘보현경로당’ 마당이 적당해 보였다. 그때였다. 아주 작은 돌표석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서삼리’

보현경로당 앞마당에서 차를 내렸다. 마침 주민인 듯한 남자가 지나간다. 조금 전에 지나친 말바위 표석 쪽으로 들어가라고 일러 준다.

좁은 외길이었다. 3분쯤 들어갔을까, 정자가 하나 나왔다. 곁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런 벽지에 이승만 대통령이 왔던 사연도 궁금한 일이다.

김장철이라 할머니 두 사람이 배추를 거두고 있었다.

“고려장(高麗葬)예?”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고려시대 고분에 대해 뭍자 할머니가 웃으며 답한다.

“여서 길따라 주욱 올라가면 하우스 짓는 사람들 있어예. 거서 물어 보소.”

다시 5분쯤 올라갔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두 길 모두 중간에 만난다)에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는다. 말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이게 말바위인 듯했다. 바위를 지나자 제법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 말바위. 이곳을 지나면 화림촌으로 그 뒤쪽 야산에 고려 고분이 산재해 있다.

권헌규 씨(64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계곡 깊은 곳이라 입구의 민가 외에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남자 세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이 농사 지을 하우스를 만드느라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모두 50대 후반에서 60대로 보였다.

밭으로 들어가 고려시대 고분을 물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고려장예?” 하고 되묻는다. 다들 알고 있는 눈치다.

“저 산에 고려장이 많아예.”

‘많다니. 고분군(古墳群)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저 위쪽 산에도 고려장이 있고, 저쪽 산 뒤에도 있어예.”

“어릴 때부터 놀던 곳이라예.”

같이 일하던 두 사람과 아낙이 말을 거들고 나선다.

“그 안에 들어가 앉으면 키를 넘어예.”

대형 고분이라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예전부터 ‘고려장’이라 불렀나요?”

“아뇨. 안동대에서 발굴한 뒤부터 그렇게 불렀지예.”

“그 전에는 뭐라고 불렀나요?”

“이름이 없었지예. 안동대에서 조사하고 나서 고려장인 걸 알았어예.”

“이 동네 이름이 뭐죠?”

“여는 말바위꼴, 여 하우스 짓는 밭 위쪽은 화림뜰이라 카지예.”

경상도 억양이라 ‘화림들(들판)’을 ‘화림뜰’이라고 발음했다.

발용 종친과 태영 종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있었다.

우리 눈에는 동일 지역으로 보이는데 무슨 까닭인지 주민들은 하우스가 있는 밭을 경계로 달리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절 같은 게 없나요?”

“아주 옛날부터 절이 있었다케예. 저기 산에 허옇게 보이지예. 그기 아카시아라예. 거 위로 들어가면 커다란 절터가 있어예.”

“그 돌들 갖다 집 지을 때 쓰기도 했어예.”

다른 사내도 절터를 잘 안다는 듯이 답한다.

“그럼 화림촌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그런 말은 몬 들었는데…….”

“여는 그냥 말바위꼴, 저 위는 화림뜰이라예.”



아, 화림촌(花林村)

- 안김(安金) 최고(最古)의 선영(先塋)을 찾아서 / 02 산기슭에 산재한 고려 고분 10여 기


권헌규 씨 일행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우리 일행은 ‘화림들’ 뒤쪽 야산으로 향했다. 낙엽이 이미 졌건만 20~30년 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서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산길이 희미하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장딴지와 손등이 여기저기 긁혔다. 꽤 오래 산 속을 뒤졌지만 고려 고분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각기 흩어져 산기슭을 따라 봉분들을 살폈다.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이곳이라고 했는데…….

마음이 너무 성급했다. 뜻밖의 일이라 일행 모두 약간 흥분된 상태였던 것 같다. 권헌규 씨는 고려 고분과 화림사(花林寺)로 추정되는 절터를 각기 설명해 주었는데, 말을 잘못 알아듣고 먼저 절터로 향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약간 돌출된 산모롱이에 있는 근래 무덤(쌍분) 뒤쪽이 고려 고분이 있는 곳으로 들었다는 발용 종친의 말씀이 옳았다. 그 때문에 길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헤맸다. 대신 우리가 찾던 고려 고분 외에 다른 고려 고분 두어 기를 보았다.


▲고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총. 20~30년생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낙엽 속에서도 봉분 주위를 돌로 쌓은 형태가 드러나 보인다.


얼마 후 발용 종친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리 일행은 한곳으로 모였다. 산줄기를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지런하게 묘를 쓴 곳이었다. 맨 위에 권씨 무덤이 있고, 바로 그 아래 고려 고분이 있었다. 요즘 무덤과 달리 봉분 주위를 네모꼴[長方形]으로 둘러싼 봉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형적인 고려시대 무덤 양식이었다. 고려 고분 밑에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무덤(상하분)이 있었다.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 발굴 조사 후 성분(成墳)한 때문에 다른 고려 고분들보다 봉분이 훨씬 두드러져 보인다.


하지만 이 무덤이 안동대에서 발굴한 그 고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 인근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이 때문에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려 고분 아래쪽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대수롭잖게 찍은 두 컷이 전부였다.

밭 근처까지 내려오는 동안 고려 고분을 몇 기 더 볼 수 있었고, 맨 아래쪽 봉분은 평토(平土)가 돼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안동대에서 발굴할 당시 평토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산 중턱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진 고분들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가족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산 중턱에서 본 고분이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인지 재확인하기 위해 발용 종친이 권헌규 씨가 일하는 밭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핸드폰이 울리고, 우리가 본 고분이 맞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일정이 빠듯하고, 배영동 교수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또 산 속을 헤매느라 다들 지쳐 있어서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산줄기를 향해 사진을 찍고, 멀리서 목례를 하였다.


▲'화림들'에서 바라본 고려 고분 방향. 산기슭에서부터 비행구름 방향으로 산중턱까지 산줄기를 따라 묘역이 조성돼 있다.

아무런 기대도, 계획도 하지 않았기에 이번 답사는 모든 것이 미진했다. 예전 같으면 두툼한 자료집과 상세 지도까지 갖고 왔을 텐데……. 그런 점을 생각하면, 화림촌(花林村) 옛터에 와 있는 일이 꿈만 같다. 마치 산 아래를 지나가는 우리 일행을 조상님께서 부르신 것만 같다. 이제 남은 일은 좀더 자세한 답사와 이 고분군이 우리 선조님들의 유택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4. 김방경의 성장과 묘소

신선 태몽과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

   처음에 공의 어머니12)께서 임신하였을 때 여러 차례 구름과 안개를 들이마시는 꿈을 꾸고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서로운 구름 기운[雲氣]이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려 있으니 이 아이는 틀림없이 신선(神仙) 중에서 내려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 안동의 할아버지[金敏成] 댁에서 자라면서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큰길에 나가 누워 큰 소리로 울었는데 수레와 말들이 지나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初母有娠屢夢餐雲霞謂人曰雲氣常在口鼻此必神仙中少長安東祖翁家小有不快意必出街中啼哭車馬爲之不行人異之


   <김방경 열전>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여러 차례 구름과 안개를 들이마시는 꿈을 꾸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과 같은 기운이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리어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들 가운데서 내려와 점지된 것이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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