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堂公 金 休 遺墟碑 (학당공 김 휴 유허비)
페이지 정보
김은회 작성일09-09-23 19:23 조회2,192회 댓글1건본문
剛齋先生集卷之八
碑
學堂金公遺墟碑
全義縣東雲住山下學堂洞者。高麗檢校金公屛居而自靖之地也。公名休。字鍊夫。安東人。公以京華世族。登第仕于朝。圃隱鄭先生死。與崔晩六瀁。出國門。痛哭相別。各退隱于鄕。蓋二公同受學於先生之門。公旣絶當世之念。惟以養親講學爲務。我朝受命。太宗屢徵以官。終不出。沒而葬于是。世傳洞之名。肇自公時。而因公實蹟云。嗚呼。文獻無徵。公之始終。固不能得其詳。而考諸譜牒及邑誌所載。有以見大節之偉然者。則餘可略也。抑公師事大賢。嘗以卓節至行見許。而畢竟所成就如此。其所講之學之正。從可知也。惜乎。其泯泯無傳。然公之後承。多以忠孝。蒙㫌褒之典。若外裔。則平陽朴先生彭年。精忠貰日。打愚李文穆公翔。陶菴李文正公縡。道學名世。夫孰曰靈芝無根。醴泉無源也哉。公之諸後孫。將立石以表其遺墟。來請余識其陰者。曰奎漢,仁基也。余以陋拙。辭不獲。略書此。俾歸刻焉。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댓글목록
김국회님의 댓글
![]() |
김국회 |
---|---|
작성일 |
剛齋先生集卷之八
碑
學堂金公遺墟碑(학당김공 유허비)
全義縣東雲住山下學堂洞者。高麗檢校金公屛居而自靖之地也。
전의현 동운 주산 아래 학당동은 고려 검교 김공이 물러나 살면서 스스로 평안했던 땅이다.
公名休。字鍊夫。安東人。
공의 휘는 휴이고, 자는 연부니, 안동 김씨이다.
公以京華世族。登第仕于朝。圃隱鄭先生死。與崔晩六瀁。出國門。痛哭相別。各退隱于鄕。蓋二公同受學於先生之門。公旣絶當世之念。惟以養親講學爲務。
공은 서울의 권세 가문으로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포은 정선생이 돌아가신 후 만육 최양과 더불어 멀리 조정을 떠나 통곡하며 이별하고는 각기 고향으로 물러나 은둔하였으니, 대개 두 사람이 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기 때문이다. 공이 당세에 출세하고자 하는 생각을 끊자 오직 부모를 봉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我朝受命。太宗屢徵以官。終不出。沒而葬于是。世傳洞之名。肇自公時。而因公實蹟云。
우리 조정이 천명을 받음에, 태종이 누차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돌아가니 여기에 장례하였다. 세간에 전하는 동리의 이름(학당동)이 공의 때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니 공의 실다운 자취 때문이라 한다.
嗚呼。文獻無徵。公之始終。固不能得其詳。而考諸譜牒及邑誌所載。有以見大節之偉然者。則餘可略也。抑公師事大賢。嘗以卓節至行見許。而畢竟所成就如此。其所講之學之正。從可知也。
아.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어 공의 시종을 진실로 그 상세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전적 및 읍지에 실린 것을 고증하여 큰 절개가 우뚝했음을 볼 수 있으니 나머지는 생략하노라. 한편 공은 큰 현인을 스승으로 섬겼으니 일찍이 탁월한 절의와 지극한 행실로 인정 받았고 궁극에 성취한 바가 이와 같았으니 그 강학한 학문의 바름을 이로부터 알 수가 있다.
惜乎。其泯泯無傳。然公之後承。多以忠孝。蒙㫌褒之典。若外裔。則平陽朴先生彭年。精忠貰日。打愚李文穆公翔。陶菴李文正公縡。道學名世。夫孰曰靈芝無根。醴泉無源也哉。
아깝도다. 그 사라져서 전할 수 없음이여. 그러나 공의 후손이 충효로 포장을 입은 이가 많으니, 외손으로는 평양 박선생 팽년은 충성으로 세상에 해처럼 빛나고, 타우 문목공 이상, 도암 문정공 이재는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그 누가 “영지가 근원이 없고, 예천이 근원이 없다”고 말하는가?
公之諸後孫。將立石以表其遺墟。來請余識其陰者。曰奎漢,仁基也。余以陋拙。辭不獲。略書此。俾歸刻焉。
공의 모든 후손이 장차 비석을 세워 그 유허를 정표하고자 하여, 내게 그 새길 글을 청해오니, 규한과 인기 씨이다. 내가 비루한 자질로 사양하지 못하여 대략 여기에 쓰고 돌아가 새기도록 하노라.
졸역 : 김국회(09.10.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