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 한시의 아름다움-이종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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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9-10 08:12 조회2,099회 댓글0건본문
*2002년 5월 28일, <金得臣 紀念事業會>에서 주최하여 충북 증평출장소 회의실에서 열린 학술발표회 <백곡 김득신의 문학과 생애>의 논문입니다.
金得臣 漢詩의 아름다움
李 鍾 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 머리말
흔히 시는 타고난 천재들의 것이라 생각한다. 一筆揮之에 시를 지은 李太白이나 蘇東坡의 예가 그러하다. 소설에서 장원급제하는 사람은 일필휘지에 선장하거니와, 수많은 시화에도 뛰어난 시인을 들면서 상대방의 입에서 시가 끝나기도 전에 시를 완성해 보였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뛰어난 시인이라면 누구나 일필휘지에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사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성으로 일컬어지는 杜甫가 영혼을 소진시켜 시를 썼거니와, 특히 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의 문인들은 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좋은 시를 제작해내었다.
역대 우리나라 시인 중에 가장 노둔한 인물이 바로 金得臣이다. 김득신은 일필휘지가 아니라 노력에 의하여 시를 지은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만하다. 며칠 만에 지게 가득 실은 책을 다 읽고 외운 丁若鏞같은 천재형 문인들의 존재가 더욱 잘 알려져 있어 범상한 사람의 기를 꺾는 현실에서 어찌보면 범상한 사람보다 더욱 둔한 사람이었던 김득신의 존재는 큰 위안거리가 된다. 그러나 金得臣은 위대한 시인이다. 이른바 穆陵盛世의 풍요를 지나, 황량해지는 17세기 시단에 높은 봉우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높은 봉우리를 차지한 시인이라면 당연히 그의 시가 아름다워야 한다. 본 발표는 김득신의 한시가 갖는 아름다움을 살피고자 한다.
2. 苦吟의 詩學
김득신 이전에 시단에서 최고의 대가로 평가되던 사람은 湖蘇芝로 병칭되는 湖陰 鄭士龍, 穌齋 盧守愼, 芝川 黃廷彧이었다. 이들은 시법의 학습과 苦吟을 강조하는 江西詩派를 배워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김득신은 <評湖蘇芝石詩說>에서 湖蘇芝가 대가이지만 權韠이 시의 正宗이므로 이들보다 뛰어나다 하였다. 그 근거로 대가는 雄建한 것을 주로 삼다보니 잡박하여 순정하지 않음이 많고 체격도 바르지 않아 깊이 시를 아는 자가 보게 되면 부박하다 여기게 된다고 하였다. 잡박하여 순정하지 않다는 것은 江西詩派의 특징이다. 이 점에서 이왕의 대가로 병칭되던 湖蘇芝의 성과를 당시 기준으로 비판한 것이라 하겠다. 湖蘇芝로 대표되는 宋風을 비판하기 위하여 唐風을 주창하는 조선 중기 비평가들이 자주 차용하는 嚴羽의 妙悟를 수용하였다. 또 종남총지에서 무릇 시는 천기에서 얻어 조화의 공을 운용하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는 이수광과 허균 등 전대 비평가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다.1)
이 점에서 김득신이 唐風을 지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득신은 湖蘇芝와 함께 시단의 우이를 잡은 이른바 三唐詩人의 성과 역시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贈龜谷詩序>에서 시는 이치를 담아야 된다고 전제한 후, 崔慶昌, 白光勳, 李達 등 당시를 모범으로 하여 최고의 성과를 이룬 三唐詩人을 두고 響에만 힘서 그 理를 알지 못하니 시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라 폄하하고, 대신 權韠의 시가 理와 響을 구비하였다고 극찬하였다.2) 또 황정욱의 시가 理는 있으되 響이 없기는 하지만 삼당시인들이 響만 있고 理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다. 또 삼당시인들의 시는 반드시 響을 주로한다고 하지만 申欽이 淸窓軟談에서 이른대로 시는 理가 없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湖蘇芝의 특장은 律詩에 있으며, 이들의 율시는 실재 웅건함을 그 미학으로 한다. 또 三唐詩人은 노래를 지향하는 절구를 장처로 하며 깊이 있는 의경보다는 소리의 울림을 중시한다. 김득신은 전대의 學唐과 學宋이라는 대표적인 두 사조의 한계를 인식하고 唐詩을 추구하되, 宋詩의 작법을 수용하는 절충론을 택하고 있다. 곧 唐風을 지향하면서도 지향의 방법으로 宋代 江西詩派의 그것을 택한 것이다. 구체적인 작법에서 苦吟의 시학을 중시하였던 것이 그 근거다. 苦吟, 곧 시구를 철저히 단련하는 것은 특히 杜甫와 그를 배운 黃庭堅, 陳師道 등 江西詩派 작법의 가장 중요한 창작방법이다. 또 이들은 시에서 博學을 중시하였다. 김득신은 종남총지에서 당나라 시인들이 시를 지을 때 일생의 心力을 다하였으므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지금 사람들은 얕은 학식으로 덮어놓고 시를 지어서 남을 놀라게 하는 시구나 짓고자 한다면서 경탄한 바 있다. 또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모두 다 근면함으로써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면서 우리나라에서 글 잘하는 큰 인물로 독서를 많이 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을 수 있다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질이 노둔해서 책을 읽는 공력을 남들보다 갑절이나 들였고 史記, 漢書, 韓愈, 柳宗遠의 글 등을 베껴 만여 번을 읽었으며 그 중에서 「伯夷傳」을 가장 좋아하여 일억일만삼천번이나 읽어 드디어 자신의 방을 億萬齋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김득신은 자신의 한시 창작 과정을 다음과 같이 시로 밝히고 있다.
사람됨이 편벽해 매번 시를 탐하건만
시 지어 읊조릴 때 글자 높기가 미덥쟎네.
결국 미더워야 통쾌해지니
일생의 신고를 뉘 알아주리요?
爲人性癖每耽詩 詩到吟時下字疑
終至不疑方快意 一生辛苦有誰知
「그저 읊조리다(謾吟)」(백곡집 책2)
김득신에 대한 당대나 후세의 평도 이와 유사하다. 백곡집의 서문을 쓴 朴世堂은 정신을 부리고 마음을 고롭게 하여 한 글자에 천 번을 단련하여, 賈島가 ‘推’와 ‘敲’를 단련하다 한유에게 부딪친 것처럼 하였으니 마부가 길을 비키라 소리를 질러도 알지 못할 정도라 하였고, 水村漫錄에서도 김득신이 평생 시를 공부하였는데 간담을 쥐어짜며 조탁하였고 한 글자를 천 번 단련하여 반드시 공교롭고 절묘하게 하였다고 한 바 있다. 또 河謙鎭의 東詩話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김득신은 苦吟의 성벽이 있어 코밑 수염을 꼬면서 자신을 잊었는데 그 처가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여 점심밥을 차리면서 간과 양념을 하지 않은 나물을 올리고서, 덤덤하여 맛이 없지 않던가를 물어보니, 김득신은 음식맛을 몰랐다고 답하였다 한다. 江西詩派의 일원인 진사도가 바깥에서 좋은 시구가 떠오르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를 썼다는 일화를 연상케 한다.
김득신은 이 때문에 남들처럼 시를 쉽게 쓰지 못하였다. 記聞叢話에 따르면 김득신이 남용익을 만나 피차 시명을 알고 있던 터에 수창을 하게 되어 남용익이 먼저 「與金柏谷」이라는 시를 지어 보이자 김득신은 괴산 문장 김득신이 京中才子 南雲卿에게 항복한다 하였고, 또 金益謙을 만나서도 그가 지은 시를 보고 이르는 곳마다 문장의 대결에서 패배하게 되었다면서 통곡하였다 한다. 김득신이 이들보다 시를 잘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큼 재빨리 잘 쓰지 못하였다는 말이다.3)
이와 함께 김득신은 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하였다. 젊은 시절의 전쟁 체험은 杜詩를 더욱 좋아하게 만든 듯하다. 조선의 시인이라면 누구나 杜詩를 배우려 했겠지만, 그가 직접 경험한 외적의 침략 전쟁은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두시를 좋아하게 하였고, 특히 두시의 가장 큰 내용적인 특질인 憂國의 눈물을 배우게 하였던 것이다.
뉘 알았으랴,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우연히 각기 목숨을 부지하고서.
익은 얼굴이라 볼수록 즐거운데
새로 지은 시는 들어보니 더욱 놀랍다.
대낮에 들판에는 늘 통곡 소리 들리니
꿈에도 오랑캐를 또한 피하는구나.
석이는 유명을 달리했으니
어찌 홀로 서글픈 마음 참을 수 있으랴?
誰知此會有 偶爾各偸生
舊面看仍喜 新詩聽更驚
晝常聞野哭 夢亦避胡兵
錫友幽明隔 那堪獨悵情.
「난리 후에 중구를 만나다(亂後逢仲久)」(백곡집 책3)
종남총지에 따르면 李植은 이 시를 읽고 감탄하며 김득신의 시에 杜詩의 격조가 현저한데 두시를 얼마나 읽었는지 물었다 한다. 이때 김득신은 마침 두시를 읽고 있었다며 이식의 감식안에 경탄하였다. 이식은 澤風堂批解의 찬자로 두시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감식안에 김득신의 시가 두시의 풍이 있다 하였으니 김득신이 學詩의 과정에서 두시를 모범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4)
3. 唐風의 추구와 淸新의 미학
이와 같은 博學을 바탕으로 한 苦吟의 시학은 그 자신 부정하였던 난삽하거나 기이한 江西詩派의 병폐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물론 김득신은 이러한 병폐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湖蘇芝가 雄建을 힘쓴 것조차 부정하였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김득신은 고음을 통하더라도 단련의 결과는 청신의 미학을 발하는 데 있었다. 박장원의 시를 평한 「漫吟」(백곡집 책2)에서 그의 시가 독보적임을 칭찬하면서 그 공을 특히 “근래의 기벽한 병폐를 씻어내었으니, 어지러운 속자들이 왁자지끌 떠들 것 없다네(奔去近來奇癖弊, 紛紛俗子莫須囂.)”라 하였다. 이에 비하여 정두경의 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唐韻이 있다고 칭찬하였지만 다음 시에서 말한 것이 오히려 김득신의 솔직한 평이었을 것이다.
동명의 큰 글귀는 지나치게 신기하여
일찌감치 그 이름을 일시에 떨쳤네.
천하의 이름난 옥도 티가 있는 법,
뒷사람의 비웃음을 받을까 걱정되네.
東翁傑句太新奇 早使聲名振一時
崑璧隋珠瑕擿在 吾今恐被後人嗤.
「그저 읊조리다(謾吟)」(백곡집 책2)
정두경의 시가 지나치게 신기하여 일시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바람직하지 않아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비하여 洪箕錫와 金震標의 시는 淸新하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淸新의 미감은 盛唐이나 中唐의 시에서 흔히 보이는 풍격이다. 이처럼 김득신은 비록 苦吟의 작법을 취했지만 미감의 모범을 唐詩에 두고 다른 사람의 시를 평가하였거니와, 그 자신의 장처 역시 淸新의 미학에 있었다. 김득신이 죽은 후 黃宗海는 輓詩에서 “자호를 백곡옹이라 한 이는, 시에 능하여 속신을 벗어나 맑은 바람으로 씻었도다(自號之云栢谷翁, 能詩脫俗灑淸風.)”라 한 바 있다.5) 또 玄湖𤨏談에 김득신이 자신의 시를 정두경에게 보이니 정두경은 자신이 평생 당나라 이전의 시만 보았는데 김득신의 시에 보지 못하던 시어가 있다면서 김득신이 당시를 배운다 하지만 송대의 시어를 쓴다고 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점은 비록 김득신이 송시의 영향도 받았지만 스스로 주력한 것은 당시였고, 더러 송시의 표현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지향한 바는 당풍이었음을 알게 한다.
김득신의 시를 높게 평가한 후대의 비평가들의 기준도 김득신 시에서 느껴지는 唐詩의 風氣를 들고 있다.
숲속의 끊어진 다리에 석양이 지니
정말 앞 숲에 새가 깃들 때라.
강 건너 누군가 몇 번 피리를 부는가,
매화가 옛성 서쪽에 다 지는구나.
斷橋平楚夕陽低 政是前山宿鳥棲
隔水何人三弄笛 梅花落盡故城西.
「복구정에서 피리소리를 듣고(龜亭聞笛)」(백곡집 책2)
龜亭은 伏龜亭을 이른다. 안정복의 목천현지에 따르면 복구정은 현치에서 동쪽으로 幷川을 건너 邑內面 重九峰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인근에 雙淸亭, 延春驛, 銀石山 등이 있다. 沙器潭, 女妓湫를 지난 물길이 구정교 아래에 이르고 동으로 백전을 지나 병천이 되며 청주로 흘러든다. 백곡이 위치한 栢田里가 이곳에 인접해 있다. 그의 조부 김시민이 이곳에 살았다. 그 집 앞에 거북 모양의 바위와 두 그루 괴목이 있는데 괴목 앞으로 큰 하천이 흘러 못을 이루고 못가에는 바위가 있어 큰 뱀이 산다고 한다. 목천에 있는 복구정은 누가 언제 창건한지 알지 못하는 정자로, 1534년경에 완전히 부서져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때 다시 불타 1654년 김득신이 목주현감으로 온 李喜年의 도움과 金九淵, 徐鎭, 柳仁光 등과 힘을 합쳐 다시 세웠다. 그 곁의 바위가 엎드린 거북 모양이라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하나 실제로 땅속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묻혀 있다는 설도 있다.6)
복구정 주변의 경관은 매우 아름다웠다. 복구정 아래 맑은 못이 있는데 물고기 노는 모습이 보이고 새들이 왕래하며 푸른 벽이 못 오른 편에 둘러 있다. 금빛 제방이 왼편에 넓게 퍼져 있으며 왜송들이 늘어서 있으며 오래된 괴목이 서 있다. 백촌이 복구정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복구정 아래의 물이 백촌에 이르러 큰 강을 이룬다. 평평하게 흘러 못이 되고 그 못이 鵂巖을 빙 둘러 있는데 백촌의 백성들이 못 아래 제방을 쌓았다. 蔚山灘 아래 절을 세웠는데 시야가 탁 트인다. 강물 속에 호랑이가 싸우는 듯한 형상의 바위와 구름무늬의 절벽이 있다.7)
위의 작품은 이러한 경관을 마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唐風의 한시는 그림을 지향하며 그 그림 속에 시인이 있다. 저녁 무렵 새는 둥지로 돌아가는데, 시인은 다리를 건넌다. 강건너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를 슬퍼하여 매화꽃도 떨어지고 있다. 피리소리와 매화꽃을 연결한 것이 무척이나 공교롭다. 또 唐風의 한시는 그 속에 울려퍼지는 음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퍼져나가는 피리소리가 그것이다. 이 시를 율독하면 그 음율이 매우 아름답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를 小華詩評(卷下)에서 “매우 당나라 시인에 가깝다(極逼唐家)”라 하였다.8) 같은 장소에서 제작된 다음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질이 보인다.
저녁 해 모랫벌에 지니
자러 가는 새 먼 숲에 깃드네.
당나귀 타고 돌아가려 하지만
문득 앞산에 비 내릴까 겁나네.
落日下平沙 宿禽投遠樹
歸人欲騎驢 更怯前山雨.
「복구정에서(龜亭)」(백곡집 책1)
기본적인 정조가 위의 칠언절구와 흡사하다. 해는 서산에 지고 새는 둥지를 찾아가는데, 당나귀를 탄 시인이 있고 그 너머 앞산에 뿌연 빗발이 밀려오는 광경이 눈에 잡힐 듯하다.9) 唐詩의 특질로 드는 詩中有畵, 畵中有詩의 경지에 들었다. 東詩話에서도 이 작품을 「馬上吟」과 함께 당나라 시인의 기미가 있다 하였다.10)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
찬 구름 속의 고목,
소나기 내리는 가을 산.
저물녘 강에 풍랑이 일어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네.
古木寒雲裏 秋山白雨邊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
「용산에서(龍山)」(백곡집 책1)
용산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을 그림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鄭善興이 입시하였을 때, 김득신이 이 시를 적은 부채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자주 보니, 효종이 이를 보고 어탑에 두고 다른 부채를 내렸다 하며, 후에 掌樂正이 되었을 때 효종이 빈 병풍을 준비하여 김득신에게 이 시를 적게 하였다 한다.11) 이 때문에 箕雅와 大東詩選 등 후대의 시선집에는 제목을 ‘題畵’라 하였다.12) 이 시는 그림을 지향하며 그 그림 속에 한강가에 서 있는 김득신의 모습도 들어 있으며, 풍랑이 이는 소리,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 등의 음향이 울려 퍼진다. 효종도 이 시를 당시에 넣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고평한 바 있다.13)
김득신이 宋詩를 배워 苦吟의 시학을 주창하면서 자구의 조탁을 중시하였지만, 그 결과는 기벽하고 난삽한 宋風이 아니라 唐風의 淸新을 드러내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淸新의 미감은 특히 김득신 시의 장처가 寫景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울타리 해져 늙은이 개를 욕하고
아이에게 소리치네, “일찍 문 닫거라,
어제밤 눈 속의 자취를 보니
분명 범이 마을로 왔다 갔나 보다.”
籬弊翁嗔狗 呼童早閉門
昨夜雪中跡 分明虎過村.
「田家」(柏谷集 책1)14)
개가 울타리를 비벼대 울타리가 부서지고 이 때문에 주인이 개에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나, 눈 위에 찍힌 범 발자국이 마을에서 산으로 나 있는 광경은 너무나 조선적인 것이다. 또 살아있는 김득신의 체취를 이 시에서 절로 볼 수 있게 한다. 任埅이 孫必大의 「田家」와 이 작품의 우열을 가리지 못할 때 李堥가 김득신의 작품이 더 뛰어나다고 하면서 情境을 묘사한 것이 더욱 핍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15) 그가 겪은 향촌생활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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