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명인전(申命仁 傳)상락군 김 찬(上洛君 金 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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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9-08-24 10:19 조회1,675회 댓글0건본문
기묘록 보유 하권(己卯錄補遺 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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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인 전(申命仁傳)
신명인은 임자생(壬子生)이고 자(字)는 영중(榮仲)이며, 대사성 김식(金湜)에게 수업하였다. 화가 일어나던 날, 여러 유생(儒生)들이 대궐 뜰에서 울부짖으니 임금이 교지를 내리어 이르기를, “여러 유생들이 대궐문을 밀고 들어와 소리내어 운다는 것은 천고(千古)에 없는 일이다. 적발하여 죄로 다스려라.” 하니,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서 뛰어나와 소리쳐 말하기를, “옛날에 양진(楊震)이 갇혔을 때에 태학생(太學生) 3천여 명이 대궐을 지키고 통곡한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하시는 일은 참으로 천고에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항상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경진년에 김식이 화에 걸려 죽자 그 시체를 영남으로부터 운반하여 올라오는데, 김식의 부인 이씨가 충주(忠州)로 가서 시체를 맞아 염습하고 관에 넣어서 임시로 그곳에 매장하였다. 공은 멀리서도 시체가 충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리더니 감개하고 애도하여 마침내 송옥(宋玉)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대성(大成 대사성 김식)의 부득이한 뜻을 밝히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말을 듣지 않을까 두려워 과거를 시험보는 장소에는 가지만 종일토록 돌아다니며 놀면서 선비들이 가지고 온 술을 찾아 다 마시고 몹시 취한 후에 나왔다. 스스로 호를 귀부(龜阜) 혹은 송정(松亭)이라 하고, 일찍이 윤칠림(尹漆林 윤수(尹壽))ㆍ목현헌(睦玄軒)ㆍ목세칭(睦世秤))과 도보(徒步)로 상종하고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상락군(上洛君) 김찬(金瓚)의 기장대시(棄藏臺詩)에 차운하기를,
천 자 대 앞에 푸른 옥이 흐르는데 / 千尺臺前碧玉流
옛날에 듣기로 김씨가 여기 와서 놀았다고 하네 / 昔聞金氏此遨遊
조정의 높은 몸으로 산수를 겸하였으니 / 朝廷身世兼山水
부귀한 생애에 근심이 적도다 / 富貴生涯少恨憂
사업은 각에서 몸을 던진 늙은이를 능가할 것이고 / 事業可凌投閣老
장한 마음 진 나라를 물리친 무리들을 비웃을 수 있네 / 壯心堪笑却秦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충신 마땅히 역사에 전하리니 / 始終忠信當傳史
주졸도 오히려 상락후를 알도다 / 走卒猶知上洛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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