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자료-충렬공 묘소 수호사 대담 녹취록(5)-의성 사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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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4-20 13:20 조회2,094회 댓글0건본문
Ⅱ. 의성 사촌문중 편
1. 조사 일시 : 2009년 4월 16일(목)
2. 조사 장소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김창회씨 댁
3. 조사자 : 김태홍(30세, 남. 도평의공 21대손.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출생, 현 안동 민속박물관 재직 중)
4. 제보자 : 김창회(75세, 남, 도평의공 20대손. 상기 주소지 거주. 현 도평의공파회장, 의성향교 전교)
5. 녹취록 정리
가. 녹음 작업자 : 김태홍(상기인)
나. 1차 녹취록 작업자 : 김태홍(상기인)
다. 2차 녹취록 정리자 : 김항용(제학공 22대손. 서울 거주)
6. 녹취록
조사자 : 예, 녹음 됐습니다. 이제 말씀하시면 됩니다.
제보자 : 에... 안동 그 충렬공 묘소 관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약간의 저가 아는 나름대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에.. 충렬공 산소가 든 것은 1300년경에 충렬공 묘소가 들었는데, 들고 난 뒤에 약 한 100년동안 시제를 올리다가, 에.. 1392년에 조선조가 개국될 당시에 봉산령이 내려지면서 모두들 전조의 산소는 거의가 실묘가 되었습니다. 실묘가 되고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현재도 우리나라에 전체에서 전조의 산소가 설단이 아니고 그냥 실묘를 가진 집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우리 충렬공 산소는 사실 실묘입니다.
이게 언제 찾았노 하면은, 에.. 1392년에 조선조 개국과 동시에 실묘를 했다가 1594년 결국 말하자면은 임진왜란이 나고 2년 뒤에 비로소 묘역을 찾았습니다. 묘역을 찾는 것은, 그 원인은 에.. 1593년에 광산김씨 한림 김해가 의병대장으로 있으면서 경주 전역에서 전몰을 하시고, 돌아와서 거기에 묘를 썼습니다. 글 때 이거를 투장으로 간주됐는데, 그 투장으로 인해서 현몽을 해가주고 묘를 찾았다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1625년에, 25년 4월 10일에 경상감사로 충렬공 후손 김치 카는 그 어른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셨다가 한 달 7일 만에 여기서 돌아가시면서, 안동에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화산기우객에 두대일지화라는 이런 시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에 인제 1626년 8월부터 1628년 12월까지 그 사이에 하담 김시양 충익공 하담 김시양이 경상감사로 오셔서, 에.. 한림 김해의 묘가 있는 것을 파서 옮기고 상석을 넓히고 묘를 손봤습니다.
그 뒤에 묘소 시제 비용은 대체로 얼마나 들었는가 카는 이런 질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매년 제사를 올릴 때, 매년 제사를 올릴 때, 임기 취판이라 그래서 10월 달에 묘사를 지낼 그트면은 9월이나 이때쯤 되 가주고 각 종중에서 돈을 거두어 가주고 임기 취판이 바로 그 돈을 임시에 돈을 거두는 것을 임기 취판이라 그랬습니다. 거두어서 그 거두는 경비를 가주고 묘사 행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양진당 김상린공이 1650년경에 의치묘전을 했습니다. 의치묘전할 때 두곡취합으로 식전 매답이라 했습니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은 말곡식을 거둬 가주고 이것을 옛날에 곡식이 귀할 때 대여를 해줬다가 그걸 늘리고 늘리고 해 가주고, 그 돈을 가주고 전답을 사서 위토를 했습니다. 이것이 모범이 돼 가주고 인향사대부들이 모두 이것을 본받고 해서 두곡취합 해 가주고 식전 매답으로 위토를 장만했다는 고사 기록이 있습니다.
그 다음 제수 비용은 그때 누가 담당했느냐
양진당공이 식전매답을 하기 전에는 임기 취판이라 그랬죠. 그 제사를 지낼 당시에 돈을 거두어가주고 제사를 지냈는데, 양진당공이 준비한 위토가 생기고 난 뒤에는 그 위토의 수입으로써 제사준비를 했다고 그래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대종회에서 가장 유공하신 김윤회부회장님이 한때 제사를 마치고 난 뒤에 전 종원이 약 한 100여명 모인 능동재사에서 거기서 강연을 하시면서 능동묘소는 약한 395년 동안 약 한 400년 동안이죠, 그때 김윤회부회장이 하신 말씀은 정확하게 395년이라고 말했습니다. 395년 동안은 사촌과 소산에서 묘소를 관리했다고 그렇게 강연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당시에 제수 준비는 주로 누가 했나고
여기 질문이 있는데 여기 당시 상황은 알 수가 없지만도 그때 물론 묘지를 관리하는 묘지기 또는 산지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했을 게고, 유사가 나와서 준비했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그 뒤에 유사가 거 와서 감독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제수 준비를 했었다고 추측을 합니다.
제수 운반은 어떻게 하였는가
거 뭐 물론 말할 것도 없죠. 당시의 소상한 기록은 없지만도 물론 묘지기나 산지기가 하고 거기에 또 유사가 보충을 하고 감독을 하고 이렇게 제수운반을 준비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제때는 매년 우리 문중에선 대체로 몇 명이 참가했는가
이런 질문이 있는데 이거는 교통 불편한 관계상 요즘은 묘사를 지내면서 당일 오는 분 있고 또 전날 와 자는 분도 있고 하지만도 그때는 전부 걸어서 댕기는 하루 60리길을 하루길이라고 볼 때 사촌서 갈 때도 일찍이 나가야만이 능동까지 가서 댈 수가 있는 그런 위치 거리랬고, 그 담에 충청도나 전라도 또 안 그러면은 서울에서는 감히 올 생각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때는 이웃에 있는 사촌문중과 소산문중이 중심이 되 가주고 안동일원의 제관들 수 십 여명이 모였다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때는 먼 거리에서는 참여를 못했습니다.
시제때 사용한 홀기 또는 설찬도, 분정표, 축문, 도기록 등이 있는가도 질문이 있었는데 당시의 기록을 지금까지.. 물론 그때는 없지는 않았겠지만도 당시의 기록을 조금도 발견한 바가 없습니다.
시제와 관련한 잊지 못할 일화는 있는가
이 일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우리 안동김가 전체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광산김씨 문중에서 우리 충렬공할아버지 뒤에다가 우리 실묘했을 당시에 그때 뒤에다가 묘두앞장을 해가주고 묘사를 지내고 있는데, 지금은 동산수호를 하고 있죠. 근데 그 집에는 광산김씨 안동에 입향 시조가 되기 때문에 매년 10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지내게 될 때 그때 어떤 연유로 했는지 자기네 선조의 제수에다가 정갈하게 장만한 제수를 우리 충렬공할아버지 묘소에다가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게 하나의 상례로 돼서 계속해 그래 나왔는데 중년에 와가주고 그 집 자손들 중에서 어떤 그 분명한 분이 나타나서 우리가 왜 우리 제수를 장만해 가주고 남의 조상 산소에 먼저 제사를 드리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 이걸 폐지하자,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폐지한 그 해에는 당년에 갑자기 기상의 변화로 폭풍이 일고 소박비가 뿌리고 또 까마귀와 까치가 와서 제수를 쪼아 먹고, 이렇게 해서 그 해는 그 집에도 제사를 옳게 못 모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하, 이거는 대인의 영험이다, 그래서 대인의 영험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이래서 지금도 그 분들은 제사 준비를 다해 가주고는 반드시 우리 충렬공할아버지 산소 앞에 먼저 제사를 지낸다는 그런 설화가 남아 있고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담에 시제때 분정은 어떻게 원칙으로 했느냐
시제 분정은 요즘은 대종회장이 거게 초헌을 하고 대종회장이 초헌하는 것도 그때 그것도 말썽이 많았습니다. 어느 대종회장은 자기가 대종회장을 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초헌을 할라 그러고, 대종회장은 사실 종손이 아니잖습니까? 종손이 아니기 때문에 매년 초헌을 한다고 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요. 대종회장이 선출이 되고 난 뒤에 첫해 초헌을 하시고 또 마지막 해 한번을 하신다든지, 그라고 난 뒤에 중간엔 다른 분도 초헌을 해야 되는데, 대종회장 아니면은 초헌을 못한다 하는 거는, 이거는 말이 안 돼요.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덕망이 있는 어른, 그 다음에 연장순으로 연세보다는 덕망, 지역적으로, 파별로, 덕망이 있는 어른을 전년 시제 때 전년 시사 때에 다음 해에 초헌관을, 망기를 내 정했습니다. 망기를 내 정해 가주골랑, 다음에는 아무것 이를 초헌으로 하자 이렇게 해가주고 헌관을 정했다고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시제때 재실에 전날 대체로 몇 명이 모였으며 이때 숙식은 어떻게 했는가
이런 질문이 있는데 그때 숙식은 뭐 수십 명이 왔으니까, 재사에서 좀 비좁더라도 잘 수가 있었으며, 또 재사에서 다 못자고 할 경우가 되면은, 마을에 옛날에 큰제사들은 다 그랬습니다. 큰제사 제관이 많이 모이면은 마을사람들이 집을 비워줬어요. 마을사람들이 집을 비워주고 거기에 가서 같이 생활을 하고, 밥은 묘지기 집에 가서 먹고, 잠은 그렇게 잤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담에 시제때 대체로 총 몇 명이 모였는가
이거는 아까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이 됩니다.
시제후 식사는 대체로 어떻게 했는가
이거는 뭐 보나마나 뻔하죠. 일반적으로 묘소의 위토를 관리하는 집에서 찬가를 떨어주고, 그담에 위토에서 나오는 곡식을 가주고 찬가도 떨고, 밥가도 떨고. 거기서 먹고 자고. 그 담에 묘사 준비를 하는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 그다음에 마을사람의 집도 이용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다음에 벌초는 누가 했는가
이렇게 물음이 있는데, 벌초는 이거는 보나마나 뻔했죠. 옛날에 뭐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은 지금 와 가, 맹 산지기가 벌초를 했을 께고. 산지기가 벌초를 하면서 뒤에 그 유사들이 강평을 하면서 늘 관리를 하고, 곡수를 매기로 왔을 때 감독을 하고, 이렇게 했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벌초때는 몇 명이 참가했는가
뭐 관리인 2~3명이 참가했을 테고 또 부지런한 유사 같으면은 유사가 가서 관리를 하고 이랬겠죠.
재실은 1940년 이전에 어떤형태로 있었나
이거는 뭐 저도 들은 바도 없고 알 수가 없습니다. 1940년 이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1940년경 재실 중건시 다녀온 분이 있는가? 있다면 당시 얼마나 들었으며, 누가 출자하고 중건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하, 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1940년이면 지금부터 한 70년 전인데 알 수가 없습니다. 들은 바도 없고 그렇습니다.
1984년 10월, 충렬공 묘소 관리 사옥 완공 때는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도평의공파 창신국장의 헐리는 한옥 집을 기증받아서 어 이전에도 다른 관리사옥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떠했는가?
이거는 그때 관리사옥이 없지는 않았어요. 맹 초옥으로 맹 있었으께고 초옥으로 있었는 것을 해마다 이고, 불편하고 해서 아마 이것을 옮겨짓고 현재의 사옥으로 관리하고 있는 줄 알고, 현재도 맹 그 집을 그대로 관리하고 현재는 거게 주련을 달고 잘 하고 있습니다.
1970년 이전 묘소 또는 묘소 주변을 우리문중 소산 사촌 단독으로 사초하거나 고친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 어떻게 했는가
단독으로 했다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기록은 없는데 만약 거게 하자가 있고 무너지고 흠이 나고 그랬다면은 이건 아마 추측컨대 멀리서 알지도 못했고 오지도 못했고, 이건 맹 필연코 사촌과 소산문중에서 했으리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 다음에 1624년경에 양진당께서 위토를 마련한 후 우리 문중 소산과 사촌에서 별도 출자하여 위토를 마련한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어느 곳의 토지이며 얼마나...
이거는 모릅니다 이런 게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 수 없고, 현재 위토는 추측컨대 아마 그때 당시에 위토를 장만하고, 족보를 보면은 그때 당시에 위토를 장만하고 10월 9일로 정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종중에서 제사 일자를 좀 변경해보자 카는 말도 있었습니다만도, 그 당시에 10월 9일로 정해서 하던 것을 지금 와 가주고 변경할 필요가 있겠느냐. 다른 제사를 변경하더라도 여기는 그냥두자, 이렇게 한 걸로 돼 있고,
그 담에 1624년경에 양진당께서 위토를 장만했다고 되어있는데, 1624년경은 아닙니다. 아니고, 이 어른이 생몰년대가 1610년경부터 1675년 사이니까 적어도 1650년경 이때 가서 위토를 장만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1650년경 같으면은 이 어른이 약 한 40세 내지 50세, 한창 활동하기 좋은 그런 시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다음에 회곡 죽주박씨 그 어른 이야기는,
거게는 거의가 대부분 맹 충렬공할아버지 산소 제사와 거의 같이 했다고 생각이 되고, 다만 거기에 다른 거는, 요즘은 인제 우리가 충렬공 묘사를 마치고 충렬공 할아버지 묘사를 마치고, 당일 차로 그 쪽에 가서 또 묘사를 지내고 이렇게 하는데, 그 때는 그 교통편이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당일 행사를 못했어요. 못하고, 충렬공 할아버지 산소를 10월 9일 날 묘사를 지내고 난 뒤에 거게서 음복을 하고, 조용히 한 뒤에 걸어서 그까지 같습니다. 그까지 가 가주고 10월 10일 날 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일 행사가 아니고 할아버지 산소는 10월 9일 날, 할머니 산소는 10월 10일 날 이렇게 행사를 했다고 저는 듣고 있습니다.
조사자 : 여기에 제가 소산 분들 이야기를 들은 거 같아요. 근데, 그까 시제 날짜가 다르고, 우리 도평의공 할아버지 시제가 고 다음날인가 고 다음 다음날인가 있데요.
제보자 : 도평의공할아버지 시제는 시월 초나흗날이래.
조사자 : 그럼 그쪽에서 잘못 이야기한 거네. 뭔 이야기를 들었냐 하면, 충렬공할아버지 시제는 많이 가는데 죽주박씨부인은 많이 못갔다, 그게
제보자 : 그거는 왜 그로 하면은 10월 초 9일날은 충렬공할아버지 산소니까 우리 사촌문중하고는 관계가 없는데, 10월 초 10일 날은 사촌문중 문중 전체 도평의공 할아버지를 빼고 문중제사 송은할배 산소, 도평의공 배위 산소, 모두가 10월 초열흘날이라. 그러니까 여게 참석을 못하고 우리는 이리 오고, 소산서 제사를 지냈다고.
조사자 : 고고는 고쳐야한다. 도평의공이라 그랬어요. 그쪽은 그러면은 도평의공은 10월 초4일이고..
제보자 : 그 이외 문중산소는 전부 10월 초열흘날 같이 지냈어.
조사자 : 아.. 그래노이까 그럼 인제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 10월 9일 날 여기, 인제 충렬공 시제를 하기 위해서 사촌문중에서 가는데, 갔다가 올 때 그 제사 끝나면은, 시제 끝나면은 나올 때 안동에서 장봐가 와가 하더라 한다 카더라,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제보자 : 그렇지, 그런데 우리는 죽주박씨 산소에는 많이 못갔어. 왜 그로카마, 10월 10일 날은 우리 여기 문중산소 몇 군데가 있어.
조사자 : 도평의공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
제보자 : 옳지.
조사자 : 그라마, 죽주박씨 묘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제보자 : 죽주박씨 묘사에 대해서는 아마 소산서 거, 또 이웃이고 거리도 가깝잖아, 같은 풍산면이고.
조사자 : 그럼 뭐 다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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