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묘소 수호내력 채록본 아래의 것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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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작성일09-03-17 13:49 조회1,975회 댓글0건본문
----------------------한동안 침묵--------------------------------
조사자 : 그이 뭐 70년도 이전에 맹 참여는 하셨을꺼 아니껴
제보자 : 어데
조사자 : 시제
제보자 : 했지 뭐 석교씨도 하고 40년전인데
조사자 : 40년전이면 할배 계실 때 아니껴
제보자 : 그래됐어
조사자 : 70년부터 지금까지 딱 40년아이껴 할배돌아가신지 40년 안됐잖니껴
제보자 : 아..
조사자 : 그전에 할배계실때는 주로 할배가 참석하셨을꺼 아니껴
제보자 : 그렇지
조사자 : 다른 어른이라도 누가 가셨을텐데
제보자 : 70년도 같으마 소산에 누구로 창식이형님 거는 갔겠지
조사자 : 창식이할배가 주로 많이 다니셨겠네요
제보자 : 전에 보니까 화수회 거도 보마 거의 창식이 형님 형님글씨 아니마 우리 아부지 글시고 그랬지
제보자 : 얼마 오래 안됐다해도 거참 분정기가 없다는거는 참 그게 있어야 되는데
조사자 : 재실은 언제 지었니껴 74년도 지었니껴
제보자 : 아니야 훨씬 그전에 지었어
조사자 : 그전에 있었니껴
제보자 : 있었어 음수재 지었는 그연도로는
-----------------------이상 안동조사취록01(60:02)------------------------
제보자 : 대종회에서도 지금 감주가 아니오 모지래면 대종회에서 돈은 주고 남으면 받아올라가고 이런식으로 하고 모든 관리는 회곡동네에서 우리집안에서 전부다를 지금까지도 하고 있어
조사자 : 그러면 1920년 이전에 1920년에 먼저 위토를 마련했는데 그 이전에는 위토가 없었니껴
제보자 : 모르지 그전에는 뭐
조사자 : 저는 기억이 안나는데 삼소재할배 문집에 그때 위토마련 관계는 내용이 안나왔니껴
----------------- 약 10초간 채록불가------------------------------
제보자 : 다른데 보다 회곡같으마 충렬공할아버지 유허비가 있었으니까 우리가 생각에 위토가 없어도 하다모해 터가 빈터가 있어도 그래도 사무 유지 안했겠나 싶은데
조사자 : 혹시 거기에 회곡시제 지낼때 홀리라던가 그런거 보관했는게 있니껴
제보자 : 그 홀기는 전에부터 우리가 알기로는 충렬공할아버지 산소 지내고 전에는 거 자고 이튿날 지내도 그홀기를 그대로 가져왔어
조사자 : 그대로 썼어요 충렬공할배 홀기를 거 가져와서 같이 지냈다 그말씀이죠 그러니까 예전에 1970년도에 대종회로 넘어가기 전에는 시제도 충렬공 시제는 사촌하고 안동하고 같이가서 하고 그 충렬공할매 단소에 시제지낼때는 그다음날 지낼때는 사촌은 그냥 가시고
제보자 : 아니 그냥가는게 아니고 참여를 안했지
조사자 : 그러니까 집으로 그냥 돌아가시고 안동에서만 모여가주고 했다 그말씀이죠
제보자 : 그때만해도 왜 같노하면은 정일이 시월 초아르레날이고 회곡은 시월초열흘날인데 하룻밤을 자고 다니기가 힘드니까 대종회에 넘어간 뒤에도 시월 초아르레날이고 시월초열흘날인데 합친지가 얼마안돼
조사자 : 지금은 합쳤니껴
제보자2: 지금은 한날인데 사촌에서 전에 뭐 기분나빠 안오고 이런게 아니고 지금도 왜 안오노 하면은 그집에 보면은 여게 유사가 항상 하네이씩 들어오면 초열흘날인데 우리 회곡에 향사를 올리면은 열하룻날이 도평의공파 그집에 정일이래 그래가주고 항상 지금도 보마 오마 여왔니가 장을 안동서 봐가주고 나가더라고 그런데다가 지금은 차가 있잖아 자가용이 있는데 2~30년전만해도 차가 없을때 버스타고 유사가 들어오잖아 회곡오마 회곡에 그때마해도 버스가 또 안댕겼어요 걸어나가가주고 안동서 장을 보기 때문에 시간적 그게 안되가주고
조사자2 : 회곡 사세요
제보자2 : 내가요? 나는 안동시내있어요 우리는 회곡에 우리 14대조가요 언자순자 내한테 16대 되잖아요 그 아들 형제가 함자문자는 고운사에 가고요 윤자문자가 내 15대조인데 고밑에 두형제를 낳았는데 현자가 회곡에 맏이고 당자 할아버지가 1558년에 우리 할아버지가 탄생해야주고 1593년에 그때 임진란때 아마 회곡으로 연도가 없어요 나기는 회곡에서 탄생한거는 맞는데 아마 내생각에 고때 회곡으로 안왔나 싶어요
조사자 : 예 다끝나가는데요 회곡시제에는 문중에서 몇 명쯤 참여했니껴 안그러마 아까 그 저기는 능동에는 20명 내지 40명이니까 여기는 반도 안되겠네요
제보자 : 반도 잘 안돼
제보자2 : 지금 하는게 아니고 20년전에 이야기는 그때는 회곡에는 더 많았지 왜많노하면은 회곡에는 본동네 산이가 그때마해도 서른다섯집이 살았어 그러고 개곡에 한갈랜데 개곡에 우리 입향조 아부지가 거게 있잖아 학교 뒷산에 거게 있을적에 내가 알기로 거게 해방전에 우리 어른들이 회곡에 산소가면은 배타고 건너잖아 거게요 거 단소에는 아마 생각에 고 옆에 동네하고 소산서 오고 하면 20명 이상이지
조사자 : 사촌에서는 오히려 참여를 안하셔도 그쪽에 향사 때문에 시제일 때문에 참여를 안하셔도 안동 인근에 문중에서 더 많이 능동은 머니까 못가셨던 분들도 가까우니까 또 소산서도 새로 더 가지고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5~60명정도도 될 수 있었다 그말씀이죠 그죠
제보자 : 온동네 한집에 하내이 나와서 30명 나왔다는 말이래
제보자 : 거게 인제 회곡서도 가깝고 소산서도 가깝고 와룡서도 가깝고 더 많이오지
조사자 : 회곡 단묘 수호에 대해가주고 뭐 혹시 일화라든가 그런 기억이 나시는게 있니껴 요거는 저가 삼소재 문집보고 읽어 였든동 그래하께요
제보자 : 재경씨 연락 함 해봐 아시는분한테 물어보고
조사자 : 예 그다음에 회곡동지역하고 관련된 이야기가 아까 거 상고산 하고산 관계 하고산이 말하자면은 저가 생각했던 풍동초등학교 바로 맞은편 그산은 말하자면은 그게 상고산이고 하고산은 거게서 한참 더 내려가가주고 수동 언근에 가가주고 수동에도 동제지내는데 있거든요
제보자 : 거게 하고산이라고 분명히 이름이 나와
조사자 : 현장을 한번 가보면은 고산이라 그러마 어짜피 맥하고 안이어진 동떨어진 산이니까 보면은 아거든요
제보자 : 독산, 수동에는 서애선생 산소있는 그동네라
제보자2 : 하동에 가면은 풍산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 증지말고
조사자 : 시우실그고 있어요
제보자 : 그거는 마래고 그거 아니고 저아래 가마 하동인데 하동에 가면은
조사자 : 지금현재 신안레미콘 지내가주고
제보자 : 지내가주고 그다음에 가면은 하동 풍산 넘어가는 고개 넘어가면 휙돌아 들이있는데 고까지 가보마 독산아닌 독산이 있어 회곡에 앞산만한 산이 거게 하나 나타나 거게 한번 가보라고
조사자 : 아까 거 저 거 충렬공할배 유허비가 자연석에 기단이 있고 거게 파가주고 비석을 세운거 같다고 그때 말씀하셨는데 아 고고는 안사연에서도 잘 알꺼에요
제보자 : 그거는 안사연에서 옮겼어요
제보자2 : 긑은게 아니고 밑에 판은 안사연에서 옮기고 비는 1635년인가 이래 옮겼다그이 옮길때에 요세같이 포그레인 없고하니까 판은 모옮기고 비석만 빼가주고 거북이 자태를 맹들어가주고 지금 현 위치에다 세웠더라고 그래 세우고 나니까 그 좟대가 길에 있었는데 도로를 나면서 떠딩겨뿌이께네 딴데 갔다놀때가 없어가주고 지금 거 재원씨 밭 한땍에 밭둑에다가 그냥 기대놨어 기대놔도 커가주고 어떻게 움직이질 못해 안사연에서 한 5년전일 거야 옮기는데 보니까 어에 생겼노 하면은 밑에 판이 이래가주고 뿌리가 밑에 큰바위에다가 우마 파가 포크레인 한대로 못들어가 적은걸 불러가 갔는데 한대로 드니까 들도 뒷바퀴가 들려가 가지를 못해 그래서 안동서 하나 더 불러가주고 양짜서 마주보고 한놈 빠꾸하고 이래가주고 들어다 놨거든
조사자 : 예 그러고 아까 저 유허비가 있니껴 거게 왜 저 벽화하고 그다음에 거.. 잡자기 기억이 안나노 동량
제보자 : 대들보
조사자 : 상량기문 있는거 그거는 언제 처음 보신게 언제이껴 혼자보셨니껴 같이 보셨니껴
제보자 : 같이 봤지 거 인제 돌아가신 전부 고인이 다됐어 세용씨 거는 고인안됐나
조사자 : 대종회는
제보자 : 거도 내려와가 누가 왔노하면은 윤회씨 윤회씨가 내려와가주고 상량문을 썼어
조사자 : 혹시 고때 거 본래 있던거를 다시 뺏겨가주고
제보자 : 그게 없어
조사자 : 아 고게 아깝네
제보자 : 내가 딴건 다 사진찍어 놨는데 뜯는것도 사진찍고 짓는것도 상량하는것도 내가하면서부터 다 했는데 기록문하고 벽화는 내가 사진을 못찍어놨어
조사자 : 에이 정작 중요한거는 (하하하 관중 웃음)
제보자 : 그때마해도 사진 있니도 드물었고 (하하하) 지금도 저저 상락대 있잖아 칠십몇만원 주고 진회아재가 짔어 지놓길 어에지놨노 하마 보루코가주고 앞으로 해가주고 꼭 창고같이 지애 있었다고 문 두짝 있고 첨에 그 사진이 있어요 내가 보마 창고같이 짔는걸 보기싫다 그래가주고 돈을 170얼매 들어가주고 앞문만 조문 맞닫이 문으로 해가주고 요것도 몇년 있었어 그거 있다가 다시 뜯고 상락대를 진거야 고거는 연도하고 돈든거하고 사진하고 고고는 내가 다 가있어 거 내 안사연에 줬어 내 사진찍은게 많았는데 다줬어
조사자 : 상량문 기문에 있는거 빼껴놓은게 고게
제보자 : 이럴줄 알았으마 내가 사진다 찍어놨지 나도 무심코 포크레인 찍고 뭐 다 재미로 찍어놓은게 이래 필요가 해뿌랬지 내가 기록할라고 한건 아니지
조사자 : 일단은 기록 마칠께요
-----------------------이상 안동조사취록02(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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