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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입니다 충렬공묘소 수호내력 채록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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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작성일09-03-17 13:46 조회2,19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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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입니다. 민속조사를 하고 채록하는 일을 몇년간 민속학 공부하면서 꾸준히 했습니다만 졸업후 안하다보니 속도가 많이 더디네요.. ㅎㅎㅎ

 

일단 미디파일로 주신것은 채록을 마쳤습니다. 오늘부터는 테잎 채록을 해야합니다. 20일까지 맞춰햐하는데.. ㅎㅎㅎ

 

내용은 파일로 첨부했으며 모두 아시면 좋을 것 같아 전문 그대로 올려봅니다.

 

다만 제보자와 조사자 등은 제가 직접 조사때 참여한게 아니어서 누가 누군지 몰라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조분들의 함자, 지명 등은 저는 듣기는데로 채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주변이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신 일부는 채록이 도저히 불가 했습니다.

 

읽어보시면서 수정이 있어야 할 듯 합니다.

 

군데군데 들어간 "---------"는 말이 끊기거나 조용해지는 부분입니다.

 

 

채록조사의 유의점!!

 

1. 무슨일이 있어도 속기사에게 맞겨서는 안됩니다. 민속어휘, 내용을 그대로 살릴 수 없기때문입니다. 채록시간은 빠를 수 있습니다.

2. 현장 조사자가 직접 채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합니다. 현장의 분위기, 말씀하신 제보자 등은 현장에 있지 않고는 알 수 없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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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 칠대지하가 외손이라 이카고

제보자 : 자기네가 외손이라 이카고

조사자 :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요

조사자: 산소찾은 이야기라도

조사자 : 산소찾은 이야기가 젤 먼저 나와야할 이야기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뭐 그 참 할배처럼 그렇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못 듣고 그냥 그쪽에서 산소를 쓸라그는데 산소를 못쓰고 뭐 꿈에도 나타나고 현몽도하고 제물을 차리니까 까마귀가 나와서 방해를 해가주고 못했다 그래 파다가 보니까 관 중에 지석이 나와서 소산으로 연락을 해서 산소를 찾았다 이렇게 들었는데 금방 말씀하시는거 보니까 전혀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고 내용이 다른데 어떤데 기록이 있는지 몰라도 고 그 어른이 그말씀을 아까 하셨는 말씀을 전부 새로 좀 해주시소

제보자 : 근데 그게아이고 기록이 된게 있어요 근거가 있는데요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뭐로 하면은 전부가 그냥 뭐 전설같이

제보자 : 그렇지 기록이 있을 수 있지 우리땅이 그쪽으로 갔다 그는거는

조사자 : 고고는 나오지만은 그런데 기록이 되어 있으면은 요기 말씀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은 사실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기록보고 수집을 하면 되는데 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제보자 : 아니 그거말고 고고는 되잖아 그집산소가 그거는 되잖아

조사자 : 고고는 있으니까 기록을 찾으면 되고 이 구전 이야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그던요 고고는 고고는 근거니까 일단은 이 이야기가 기록이 있으면은 기록을 봐버리면 되지 굳이 녹음을 할 필요도 없거든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모여가지고 말씀하시는거를

제보자 : 150년 수호했다는 그거를 어떻게해서 그 이야기가 나왔다 하는거를

조사자 : 거기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또 있으면은 다른 말씀이 또 나오실수 있고 일단은 여기 이사람 안사연에서 했는거 보면은 조사기간이 묘소발견을 1594년 1594년이면 임진왜란 기간중인데 1594년부터 대종회 본격활동기인 1970년대까지 고때까지 400년간에 대한 인제 수호했는거를 상황을 해달라카는거그던요 젤먼저 충렬공묘소 시제를 소산과 사촌문중에서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까지 해 왔는지에 대한 고 말씀을 먼저 한번 기록을.. 아시는 분 있으면.. 먼저 그러면은 다른분 말씀하실게 있으면은 해주시면 좋고요

조사자 : 수호하는거는 해방.. 석교씨 아주 어릴때도 했을꺼 아이야...

삼소재주손 : 대종회로 넘겨주기 까지는 우리가.. 그렇지 묘소쓰고 우리한테 달리주고부터는 우리가 계속해서

제보자 : 전에 듣기를 아께 조금전에 이야기 하실 때 산소를 저사람들이 지석을 발견하고 바로 우리한테 전달한 것이 아니고 얼마정도 있다가 (관중들: 150년) 전달 했다고 이랬는데 난 듣기를 그렇게 안들었어 난듣기를 아께도 말했지만 집안 그 신당골할배하고 금당실할배 신당골할배가 ?자하고 ?자 그어른이고 금당실할배가 창자 수자거던 그케 그어른들하고 옛날에 우리 종조부 글을 갈키셨잖니껴 그때 이야기하시는걸 들었는데 그.. 광산 김씨에서 그어른이 참판공이지.. (관중들: 휘가 효로죠) 참판공이 돌아가실 때 상주가 묘터를 잡기를 우리할아버지 산소에다 묘터를 잡은거야 잡았는데 그때는 몇일씩 장사를 지내는데 그 참판공이 맏상주에게 현몽이 된거야 현몽이 되가주고 상주보고 하는 이야기가 현재 너희들이 나를 묻기 위해서 잡은 터는 충렬공 김방경 그어른의 산소인데 그어른들의 후손이 소산과 사촌에 살고 있다 살고 있으니까 거기 연락을 하고 내 묘는 이어른 뒤에 써도 이어른들이 이해를 할 수 있으니까 그 뒤에 묘를 써라 이렇게 이야기 되어가지고 동군들 동원해가주고 그 산소를 할아버지 산소를 그때는 평야니까 벌관을 했는거야 벌관을 하니까 지석이 나오고 철판이나오고 이러니까 양쪽에 연락을 하고 장사를 미루고 참판공 산소를 들고 들고나서 우리는 소산하고 사촌서 그 연락을 받고 현장을 갔겠지요 현장을 갔다 와가주고 새로 그 양쪽 문중에서 동군들을 동원해서 묘를쓰고 그래서 그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시작이 되어서 현재까지 지내고 있다 이렇게 들었다고

조사자 : 저도 사실 그렇게 들었거든요

제보자 : 나는 그렇게 들었거든

조사자 : 저도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제보자 : 그러면은 실전했는 연도가 그래하면은 한 1300년부터 1535년이께네 한 230년 실전했는 정도되네 그래도 우리할아버지 실전한게 1300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제보자 : 내가 인제 나는 이사람하고 자주 이야기했지만 내가 안동있을때 영가지를 발간했거든 영가지에 안동의 인물 보면은 인다안동 지다경주라 사람은 안동이 많고 땅은 경주가 있고 딱 두군데라.. 영가지는 누가 만들었나 하면은 서애의 명에 의해가주고 안동에 있는 사람 명사들을 기록한건데 안동에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리 할아버지들이 많다고 (맞아요 성씨별로 따지면 젤 많아요) 많은데 서애대감이 사촌 외손이라 저 외할아버지 산소가 그때 모르는거라 거 안나와있어 영가지에 우리 할아버지 산소가 없어 그래가주고 이미 그때 실전되있는거라 영가지를 집필하는 사람들이 서애대감의 명에 의해가주고 썼는데 영가지를 썼는데 저할아버지 산소가 빠져있으니까 그때 하마 실전되있는거라 안그러면 안나올택이없지 그 산소가 기록상으로 그래되있어

제보자 : 그때가 실전에 처음은 아니께고 그전이라 려말에 나는 지금 안타까운게 몇가지가 있는데 려말에 입산금지가 생기는 거라(조사자: 봉산령이죠) 바뀌거든 이제 정권이 바뀌고 정부가 바뀌니까 입산금지가 나오는거라 그로인해가주고 실전했다고 이렇게 말 하는데 그런데 그전에 사람들도 다 타문중에선 있다고

조사자 : 아니 실전됐는 산소도 많아요 당장에 여기 보면은 안동에 삼태사 산소도 단소가 많아요 단소가 있고 사실 조선 초기에 실전을 많이 했는거 같아요

제보자 : 근데 삼태사 묘소는 그기 고려초라 해야되나 신라말이라그래야되겠나 (조사자: 고려초죠) 고려초라고 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거는 산소 실전문제를 제일 많이 떠들어대기 시작하는거는 족보 생기고라 문제는 족보라고 그러고 족보를 안할 때에 손이 끊어져서 그것도 대를 이을 양자 둘 생각을 안한다고(관중: 그렇지 마카 그런집 없었지) 예를 들어서 퇴계집을 이야기를 하는데 퇴계 그사람 뭐로 안동 장사하는 사람 뭐로 (관중들: 근필이, 근필이 종손이고, 이동성이라고 장사 동운이라고 교육장한 사람도 있고, 하회 그저게 하회에 태하씨 중씨 조하씨(?)있었다고 내가 그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내가 우리가 당신네들하고 이런관계가 있는데 에 우리가 당신네들 외손이다 내가 이런이야기를 꺼냈다고 그래 족보를 빚겨가지고 왔어요 용자 수자 할배 거기 나온다고 그런데 그당시에 양자를 안한게라 송 뭐라는 분이 도산와가주고 퇴계 산소를 찾고 이러는데 종손이 없는거라 자손이 없다고 (양자해도 모르잖아거는)이나 하라는데 안하겠다 그리 도리없지 (?)했다고 그래가 그뒤에 후손이 이어진거라 그래 그러면 모든게 그게 뭔고하니까 족보가 생기기 이전에 그런일이 잘 없다고 그래가 산소 찾은 이야기는 그거는 실전되는게 당연한 이야기라 그 뒤로 자손이 우리도 충렬공 할배하고 경진보나올때 보면은 집집마다 가첩이 나오는데 거 계통이 일치가 안됐다고 그거 통일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그러니까 그게 맞는지 안맞는지 모르겠지만은 우리는 무조건 그래 믿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일이 생긴다고

제보자2 : 족보가 우리 제 1권이 1580년에 나왔거든요 예 그래 나왔는데 임진란이 1593년부터 났잖아 퇴계같으면 1501년에 났는데 우리나라 지금 현재 향교라던가 모든게 1500년대를 시초로 해가주고 전부 역사를 중고등학교 다 가르치는 거요 그뭐 우리가 양반이라고 그래 그런게 아니고 그전에 역사를 일받으면은 이제와서는 옛날에 그 이성계 그집 계통만 족보책이 되고 상놈으는 성도 없어 임금 아들 낳아가주고 성을 갈아뿌지 갈아그러면 임금이 갈아그러면 갈아야될 이런정도 그때니까 아마 우리도 실전했는게라 이제 그 바로 찾는거는 우리할배 돌아가신 년도는 딱 나오잖아 그럼 고려때도 왕건이 그계통에는 죽 역사가 내려온다고 신라 때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김부식이 쓴거는 임금계통은 맞게 내려온거야 그대로 박씨들도 경애왕까지 맞게 오고 우리도 경애왕이 우리할아버지의 뭐 이종사촌 이래되잖아요 고까지는 나오는데 그뒤는 이제 말따나 임금을 하던지 공주를 하던지 해야 나오는데 그게 없으면 연도를 그냥 맞춘거야 우리할아버지도 이제 같으마 숙승공으로부터 8대까지 죽 내려와 한대를 30년씩 쳐보마 거의 맞기도 하고 어에생각하면 둘이 더 여도 되잖아 그래 우리 충렬공할아버지부터 우리 거 져 문정공 할아버지 질자 그할아버지까지 쳐보마 우에 연도도 거의 비슷한거요 왜그러노 충렬공할아버지가 1212년에 탄생했거든 그러고 우리 문정공할아버지가 1422년에 탄생했다 말이야 고 연도를 쳐보마 6배수 되잖아 7배 요래되거나 거 쳐보마 한 200년되니까 우리도 그래되는데 우리할아버지 젤 안타까운게 돌아가신 연도는 아는데 이제와서 사실은 광산김씨에도 확실한거는 몰라요

조사자 : 아까 하셨는 말씀을 어떤 이야기를 광산김씨가 했다는 그 내용을

제보자2 : 광산김씨에 그러니까 전에 경상북도 유도회 회장질한 택진씨 바로 준식씨 아부진데 그 뒤에 묘가 효론데 효로의 17대손아이래 택진씨가 그래서 우리가 산을 묘역을 우리땅으로 환원해달라고 할때게 그때 택진씨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우리 이 할아버지가 당신네 조상의 외손인데 우리가 이때까지 백한 오십년도 수고를 했는데 지금 뭐 땅 쪼끔 주는거 쪼끔 더 줘도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어른도 물론 보지는 못했겠지 그 우에서 전해들은 이야기겠지 그래서 우리도 그냥 그대로 들으면서 그때 그 이야기로 앞에 터도 그어른이 그러더라고 저 앞에 재실터 이것도 우리 웃대에서 그냥 당신네들한테 무상으로 기증 했는거다 그러고 또 그 골에 땅이 전부가 우리할아버지 옛날에는 충렬공땅이라 그는거도 택진씨도 인정은 하시더라고 그러면서도 그 뒤에 분배관계라던가 왜정시대 등기관계 할땍에 우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녹전면에 녹전면 와룡면 그쪽으로는 집이 한집도 없어요 지금 현재 할아버지있는 그면에는 지금까지도 한집도 안살아요 그러고 우리할아버지 실전할 당시만해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안동에도 뭐 거의 없었다고 치마되요 회곡에 몇집이나 우리 할아버지 태어났는 곳이래가주고 있지 회곡에 그 후손이 들어오기는 태어나도 맏집이 없잖아 우리 언자 순자 할아버지가 소산에 언자 중자 그 할아버지 사형제가 그 아부지가 판관공 할아버지가 성주 찬관하고 4형제를 낳았는데 그중에 젤 맏이는 공주로 가고 둘째는 원주 행상으로 갔잖아요 그 손자가 그다음에 와룡 주계로 오고 그담에 셋째할아버지는 소산에 오고 넷째할아버지 언자 순자 그 할아버지가 회곡에 옛날 조상사던 땅이라고 찾아 드갔으니까 그 연도가 우리할아버지 실전했는 연도 그 후라니까 그 사이가 아니거든(관중 : 그거는 원주내려가신 분이 언자 신자로 소산오신분은 언자 준자라) 언자 준자죠? 그래 연도가 보면은

조사자 : 그게 1500년대 아니껴? 명종때 무렵.. 안동으로 새로 내려오신게.. 삼소재문집에 나오잖아요

제보자 : 익원공 할아버지는 연도가 분명히 나오잖아 그재 문정공 할아버지 연도도 그대로 나오고 그뒤에 문정공할아버지가 충렬공 8세손 그다음에 9세 10세 11,12,13,14 여기까지가 연대가 안나와

조사자 : 아니요 그거보다 그쪽에 손부로 가셔가지고 그얘기

제보자2 : 그래가주고 묘를 지석을 나와가주고 썼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안동 이근처에 사지도 안했지만은 사실 우리가 생각으로는 그때까지 수호를 안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인제 소산인가 도평의공파 의성인가 따님이 맏딸로 컸데 종가집에서 그래서 어른들이 만날 걱정하기를 우리 우에 조상이 예안현 능골이라 카는데 안동에 능공이 몇군데 있어요 능골에 어디 조상이 있는데 이라가주 찾아야된다 카는 그 이야기만 듣고 있다가 시집을 딱 오는데 예안에 외내 지금에 녹전이 아니고 수몰지구에 드갔는 외내 그편에 하필 맏집에 또 시집을 가게 됐거든 가서 있는데 산소를 요세같으면 향사를 지내는데 묘는 한위뿐인데 떡을 두개를 똑같이 괴니까 젊은 애가 “왜 묘는 하나뿐인데 산신따로 괴고 두개를 같이 괴노” 하니까 아니 어른이 “저 밖에 있는 손부네 저집 조상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그래 괴놔라” 이러니까 손부가 그이야기를 딱 들으니까 자기 아부지한테 들었던 그 기억이 나가주고 그 이튿날 시어머니 한테 친정을 가야겠다고 그래 친정가서 자기 아부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돈간에 와서 그냥 하는게 아니고 묘를 파내라 카고 사돈간에 이런 언사가 났던 모양이라 그래 그게 재판까지는 안하고 서로 이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꿈에 현몽을 했대 거 왔는이한테 “그냥 둬라 내가 외손이든 뭐든 내가 뒤에 나쁘게 말하면 종이고 내 뒤에 신하같이 데리고 있으니까 그냥 둬도 너한테 해 없다” 그래서 인제 요세도 그런 그게 있는데 보통 보마 문관묘는 보마 앞에 세우잖아 우리 익원공 할아버지 같으면은 사위묘가 앞에 있잖아요 그거 괜찮데 왜그로 하면 문관이라서 항상 앞세우고 댕기고 우리 할아버지는 드가면 문관이고 나오면 무관이랬잖아 그래서 무관이래서 무관은 항상 장수는 졸병을 뒤세우고 댕기게 되어있어 모든 싸움에 그래서 뒤에 두고 있는 입장이라 그냥둬라 이래서 그냥 두고 있고 현재까지도 광산김씨에서 우리할아버지를 먼저 제례를 올리고 그다음 올라가서 자기네 산소를 찾아보고 지금도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거든

조사자 : 그렇다면은 참판공 돌아가신 한 150년 세월이 그양반들이 봉사를 했다는

조사자 : 예 말하자면 광덕이 할배 말씀에 의하면 1650년경 까지는 소산과 사촌에서 못모셨다는 그 말씀이세요 고 무렵에 인제 그 종부로 우리 그 조상 왕고모할머니가 시집을 가셔가지고 그때 찾았다 그말씀이거든요

제보자2 : 그렇지 그때 근데 뒤에 썼는 묘가 그집 책을 내가 봤는데 돌아가신 연도가 확실해 1535년이야 1535년에 돌아가셔서 그 앞에 비석을 누가 썼노 하면은 퇴계선생이 썼잖아 퇴계가 서른다섯살때 쓴 글씨야 그때 서른다섯살 때 퇴계가 공부할때에 칠군자 중에 류성룡대감도 거게 배웠고 학봉선생도 거게 갈땍에 나이차가 두세살 다섯 살차이 이정도밖에 안났어 그래서 자기 제자가 상주가되니까 써준거야 책보마 1535년에 썼어

제보자 : 그묘 뒤편에 조금 경사가 졌는데 효로

제보자2 : 그게 확실한 근거가 없어가주고 그래 150년을 하면은 1700년까지는 그때까지는 우리가 수호를 안하고 있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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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자 : 할배나 아재는 다른.. 저도 듣기도 아까 성식이 할배 말씀하신 그런 내용으로 들었고 형님은 뭐 어떻게

제보자 : 나도 그래 들었어

조사자 : 그러니까 광덕이 할배 하시는 말씀은 그쪽에서 들으신 말씀이고 또 그럴수도 있겠네요 우리조상들이 쫌 그래가주고

제보자 : 근데 추측이 맞아나가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충렬공할아버지를 실전을 하게 된 년도가 지금 확실히 안나오죠? 나옵니까?

조사자 : 실전한 년도는 알수 없죠 왜 그러나면은 년도를 알면은 실전을 안하거든요 작년에 모시고 올해 모시면은 그래 잃지는 않하고 계속 관심이 멀어져서 안모시다가 보니까 내중에 서로 모실라고 보니까 몰라서 못모시는..

제보자 : 나는 생각에 이래 추측을 해보거든요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 나도 그 자손이 어느 사화에 말리면은 언제 말맀노 하면은 우리 그 문정공 할아버지 같으면은 1450년대에 정승을 했다 말입니다. 개성서 하는데 그래하는데 여기 묘가 실전될 택은 없다고 보고 종을 보내도 1450년대 그러면 그다음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우리 판관공 할아버지 실전 하는거 하고 대략보니까 맞는게 우리 판관공 할아버지 같으마 서른 한 여섯 될땍에 연산군이 즉위를 해요 연산군이 1492년에 등위를 해가주고 1506년까지 잡는단말이시더 십한 이년동안 우리할아버지가 정창손에 맏사위거든요 그마 정창손이가 어디에 결렬이 되노 하면은 연산군에 생모 윤비 폐비에 주도자가 누구로 하면은 정창손이라 그마 정창손이가 그래될땍에 정창손이 맏사위 김지일할배는 정창손이 끈 때문에 붙잡히나와가주고 좌의정까지 됐다그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가 서른 여섯 살에 성주판관을 가있는데 아들 딸은 어떻게 모르고 족보상에 아들 너이 놨으면은 우리할아버지 났는 년도는 틀림없이 나와있어요 나와있는데 돌아가신 년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다 묘가 없잖아요 그러면은 나쁘게 말해서 역적으로 몰맀다하면은 그때 역적으로 몰리면은 묘가 없어 시신을 절대 못찾게해 그냥 목쳐뿌리든지 사약내라뿌마 거서 그만이지 이걸 시신을 절대 못찾게하거든 후에 무슨 일어나는 일 때문에 그래 생각하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서른여섯살 때 같으면은 천오백한 육년정도에 성주판관을 그만뒀을때에 4형제가 그때 회곡으로 소산으로 공주로 해어졌다고 보는거야 천오백 한 오년 십년에 년도는 그래서 먼저 우리가 저 부사공할아버지 년도가 안나와 있잖아요 그거 안나와 있는거 내가 어떻게 뽑았노하면은 부사공할아버지의 맏형 이자 동자 거는 출생년도가 있더라고요 그다음 고 밑에 동생 났는 년도 있고 또 고 밑에 성자 동자도 성자 동자는 누구로 하면은 김자점할아버지의 고조부잖아요 그죠 세자 용자의 5대조그던 그어른 년도가 나와있는데 내가 생각에는 5년은 절대 안틀려 왜그로 하면은 맏이가 85년에 났고 동생이 88년도에 나고 여동생이 (이천??)에 났으이 그 중간에다가 끼아넣은 날짜래요 이걸 먼저번에 가이께네 대종회가이 족보책이 없는데 인종씨하고 내보고 연도를 누가해였노 해서 내가 해였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두루온 자식 같으면은 연도가 안맞는데 5형제가 틀림없이 우리 문정공할아버지의 아들이 틀림없다면은 맏이나고 둘째나고 우리할아버지는 연도가 없고 성자 동자 그때 이자 동자는 났는 연도가 다 있는데 요사이가 7년이 빗어 빗는 중간에다 우리할아버지 연도를 내가 였어 틀림없다고는 못그지만은 10년은 안틀린거야 두루 왔으면 틀리는데 그래 그이야기하니까 대종회 저 아무소리 못하더라고 맞잖아요 그거 찾니라고 내가 몇집책을 봤어요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도 이거 참 나쁘게 말해서 어느 누구하나 우리 고조부나 5대조쯤된이가 이거는 확실하다 웃대에서 내가 보니까 언제 어디 했다 이래되뿌마 그게 역사가 되뿌는데 그죠 그런데 그게 지금 고증이 안되니까 이거 자꾸 토의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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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 열전 고려사를 보든지 고려사절요를 보면은 거기에 충렬공 할아버지는 경순왕 16세손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담에 우리 족보 젤먼저 나온 경진보에 보면은 11대손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치면은 16대가 맞다고 그런데 그거는 과하다 그래가주고 경진보에서는 그말 언급이 없는데 고다음 나온게 기미본가 거기 보면 고게 안맞는다고 나온다고 그래서 요렇게 맞추면 연대가 맞다고 나온다고(관중: 30년을 대략 맞춰놨다고) 그것도 또 문제가 생기는게 뭔고 하니까 경순왕이 나라를 개성에 가서 바쳤뿌고 거기에서 부마가 되서 아들낳은 어른이 은자 열자로 나오는데 그때는 이미 이태만에 나왔는지 삼년만에 나왔는지 몰라도 애는 놨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30년이라는 계산이 그래되고

조사자 : 다음은 묘소 시제시 제수 비용은 얼마나 들었는가.. 지금 이야기 말고 하여튼 1970년 이전에 내용은 있는지

제보자 : 그전에는 내가 듣기로는 소산서 하든지 의성서 하든지 소산서 하면은 거가서 재물을 장만하는게 아니고 소산서 해가주고 짊어지고 삼일동안 걸렸다고 하더라고 하루가고 지내고 하루 나오고 그거 내 우리 아부지한테 들은 이야기래요 (관중: 짊어지고 그러니까 위토 장만하고 저 재실 장만하기 전에는 한해는 소산서 장만하고 한해는 사촌서 장만하고 그당시에는 방법이 그러니까 사촌서도 삼일걸리고 소산서도 삼일걸리고)

조사자 : 1920년 이전이시더 그죠? 1920년도에 위토를 장만했으니까 말하자면은 그 산소를 찾을때부터 1920년간까지는 대체로 소산서 한해 지고가고 사촌서 한해 지고가고(관중: 그렇지) 그때 그러면은 제수 장만은 소산서 하고 또 한해는 사촌서 하더라도 제의에 참여하기는 다같이 했죠

제보자 : 제사를 참석하는 사람도 사촌하고 소산사람 뿐이래

조사자 : 그렇죠 말하자면은 저가 말씀 드리고 싶은거는 소산서 제수 장만할 때는 안동사람만 가고 그렇게까지는 안했다그말씀이죠 제관은 다같이 참여를 하고 제수 장만은 한해는 소산서 하고 한해는 사촌서 했다 그말씀이죠

제보자 : 그렇지

조사자 : 혹시 제수가 어느정도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거대한..

제보자 : 그때는 돈이 있어도 지고 갔으니까 떡을 한말안했겠지 어에하든간에 적게했겠지

조사자 : 그런데 전부 모이시면은 가는데 하루 하루지내고 오는데 하루 이랬다그면은 거기서 숙식을 해야되잖니껴 장소 주무시는 장소야 그렇더라도 일단은 드실꺼는 아무래도 맹 장만을 해가꼬 가야되기 때문에 상당히 안 만엤을리껴 제관이 어느정도 참여했는지

제보자 : 내가 기억을 처음에 참석했는데 625전에 해방되고 내가 참석했거든 그랬는데 내가 고 때 기억이나 집안에 어른들하고 따라갔어 제수를 어에했는지 그거는 전혀모르겠고 그때는 여관이라는 것도 없으니까 갔다가 당일 못가면 당패아니라 그래가 중간에 어디 누집에 가서 잤는데 그런기억이나 친척 뭐 그런 기억이 나는데 제수는 내가 1946년 해방되고 고 이듬해쯤되가 참석 함 했는거 같은데 좌우간 그래 갔다 왔어 그런 기억은 없어 소산서도 한해 한분이나 두분밖에 못가 그때 그당시에 왜냐하면 교통도 나쁘고 모두 바쁘고 소산 대소가에서도 한두분가마 많이가고 사촌도 그정도 그래서 인원수 굉장히 적다고 봐야돼 밥 사먹을때 있나 잘때가 있나

제보자2 : 요세사람들 잘 이해를 못하는데 안동같아도 가마 주막이라고 있어 요세같으마 모텔 여관도 하고 밥도주고 술도파는데가 한 50리간격에 다있어 안동도 여 안기동에 역이 있지 예안도 가면은 선성카는데 그모티에 가면 한군데 주막이 있어 중간중간에 하룻걸음에 갈만큼 70리 내지 80리 가면은 한군데 있고 그다음 뱃나드레 가면은 자에도 주고 먹에도 주고 돈안주고 비단줘도 되고

조사자 : 당시에 여행할때는 저기 그 삼소재문집에 보면은 삼소재할배가 서울 상소문 드리로 갔다가 오시면서 쓰셨는 일기가 있거든요 그 일기에 보면은 주막에 가서 묵으시는거 보다는 근처에 연비 그런데 가서 많이 묵으셨더라구요(관중; 그렇지 연비집에가서 자지) 아부지 어렸을때 소산에 대추나무 있잖니껴 대추나무 밑에 당나귀가 없던적이 없다 그러더라구요 

제보자 : 그얘기 들었다고 내가 어렸을때 봤는 기억은 아닌데 들은 기억이라 우리는 남인집아니라 그래 우리집하고 저쪽집 종가가 저저 건넌데 그런데 서울서 오는 손님이나 외부손님이 우리집에는 많이오고 저집에는 별로많이 안갔다 그런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그래 우리는 살림은 별로 없었는데도 말하고 당나귀는 늘 자주 왔다고

조사자 : 손님이 오시면은 구담할배가 도포 채려입고 같이 내려오셔가주고 할배하고 같이 손님 맞고 그런이야기는 들었거든요

제보자 : 당나귀가 요세같으면 자가용이

제보자 : 그러고 이거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그때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채보상을 할라고 돈을 모았어요 그게 대구에서 일어났거든 대구에 서상돈이가 1907년이라 그때 인제 안동경찰서장이 인제 각지방 유지들을 한면 하나씩 불렀다고 불러가 너들이 독립할라그러는데 너 돈이 뭐있노 너나라에 너 나라 다팔아도 우리 군함하나도 못사는데 왜하노 그래 그래 거기 모였는 사람들이 워낙에 격분해서는 나와가주고 보니까 담뱃불 붙이면서 말이 맞다는거라 그래가주고 국채보상운동을 했는데 그때 촌에 노인들도 다 담뱃대 꺽고 반지 모으고 전국적으로 했는데 한 1년 2년 하니까 경찰서 정보과에서 중간에서 돈 다덜어먹었다 소용없다 했는거라 그거는 국민들이 참석하고 그래도 우리가 식민지 생활을 이만치 해도 해방되니까 인제 조선사람 안된다 이거지 국채보상운동해서 돈모아놓은거 다덜러먹는데 좀있으면 철도 다 덜어먹을꺼다 그랬다 해 그런생각이 나는거라 그건 요번이야기랑은 관계가 없지

조사자 : 그러니까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는 거네요 그래보면 되겠네요 제관이 참여해봐야

제보자 : 비용이 중요한게 아니고 제사를 안잊어뿌는데 목적을 두는거지

조사자 : 많아야 20명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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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자 : 그럼 제수비용은 주로 맹 번갈아가면서 했으니까 또 그래도 어느정도 안그랬으겠니껴 맹 또 다 우리나라 사람이 저집에서 이마이 하마 우리도 체면이 이정도는 해야 안되나 이런게 맹 있어가주고 참 뭐 부끄럽지 않을정도는 할라고 맹

제보자 : 제물을 장만할 때 그당시에 공식이 있어

조사자 : 예 공식이 어떤게 있는지

제보자 : 뭐뭐 내용이 뭐 맹 편은 뭐 몇 대를 한다던가 양문중에 실과는 몇가지 한다던가

조사자 : 혹시 그런내용이 어디 있는게 있니껴?

제보자 : 없지뭐 그 내용이 요세 뭐 큰차이는 없으깨라 맹 과일은 종류는 그정도하고

조사자 : 주과포

제보자 : 그렇지 주과포 하고 편이지 뭐요

조사자 : 그렇겠네요 그러고 맹 거기 가신분들이 음복하실 정도는

제보자 : 그렇지 그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꺼라 지금하는거하고

제보자 : 음복은 거서 하는게 아니고 소산서 채린다고 가정을 하면은 해방뒤에만해도 소산에 나만은 어른들 전부다 가짓수만해서 봉지로 유사가 봉지로 싸가주고 그래 주면은 요세같으면은 복주라 해가주고 우리 쪼맨할때도 어디갔다오면은.. 밤하고 인제 가주와서는 어떤이야기가 있었냐하면은 그 집에도 이제 종부가 왔니가 딸만 놓는 집 있잖아 할아버지가 가왔는 밤 먹으마 그이듬해 아들 놓는다고 그집에 주고 이래

조사자 : 지금도 우리 그 정월대보름에 안동 구신목에가 제 지내마 동사무소가마 안주더라구요 시청에 있을때는 그 떡을 전부서 다 돌렸거든요 맹 거 같다와서 음복 정도 될 정도는 했을꺼다.. 예

----------------- 약 30초간 채록불가------------------------------

제보자 : 그기 아주 영광스러운거라

조사자 : 예전에 음복돌리는거 저도 보니까 인제 한지에다가 전부 떡도 조금하고 떡도 종류별로 과일도 짤라가주고 종류별로 해가주고는 한지로 싸고 새끼줄로 쫙 묶어가주고 그렇게 돌리더라구요 예전에 조기도 굉장히 귀해가주고 전에 저도 할배 노끈 꼬시는거 봤거든요 요래요래 말아가주고는 그걸로 책을 묶고

제보자 : 그게 없어진지가 지금 한 30년 정도밖에 안됐다

제보자 : 요 이야기하고 또 다른데 내가 초임을 어디갔노하면은 저게 예안면 동계학교라고 1947년에 근무했거든 2년있었는데 나는 지금도 우리집안이야기 잘 모르잖아 왜그로 하면은 나는 우리집 아버지가 글공부 안하셨고 또 중간이고 맏이도 아이고 뭐 우리 조부님도 똑똑하시고 우리아부지는 뭐 농사만 지이 나도 그 영향을 받고 공부는 했고 그런데 거게 부임을 해가주고 1년을 있는 동안에 그 어데있냐하면은 영양군하고 바로 접경이라 우리 안동군에 젤 오지라 그런데 거게 한 서너집 요게 한 서너집 요래사는데 거게 예안이씨들이 많이있고 또 농암선생 영천 그집이 몇집있고 또 여러 성이 있는데 내가 소산서 왔다그이 다 소산이 어떤집인가요 노인들이 다 알드라고 50 60노인들이 와가주고 인사하니까 전부다 알드라고 나는 뭐 내가 그리잘난집도 아니께고 우에아노 싶은데 다알아 그래 자기들이 과거에 연비가 다 있어가주고 그렇겠기도 하고 퇴계집이나 영천집이나 우리하고 뭐 과거에 인연이 좀 많고 하니까 하이튼 내가 인사하니까 다알드라고 그내 내가 놀랬지 다 알드라고

조사자 : 저가 저 사실 아부지한테 들은 말씀으로 그런말씀 하시더라고요 첨에 낙남하실 때 다른분하고 의논을 했데요 안동을 간다하니까 안동가면은 교혼할 혼사할 집도 없는데 거게 왜 갈라그러노 그래 이야기를 했다고 아부지는 그카시더라구요 말하자면은 음 그때 우리가 낙남할때까지만 해도 우리집은 중앙에 귀족이고 안동에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었다는 그런걸로 그래 들리더라구요 그래 내려와가주고는 인물을 못내가주고 

제보자 : 그래 이상한게 그사람들 대부분 다 알드라고

제보자 : 그집에 거 내려가면은 혼인할 때 없으껜데 그런소리를 했다 그래 그당시에는 보자 하회도 없었지 퇴계 나기전이지 없다고... 농암도 없고

제보자2 : 이알로는 정몽주 밖에 없었거든 그다음 권근이가 있었고 권자 근자가 있었고 1500년도 전에는 우리할아버지가 안동오마 혼사할때가 없어 광산김씨도 그때 입향을 안했어

제보자 : 그러마 영가지는영가지는 나는 특별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을해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그게 동국여지승람에는 첫 번째 나오는 거는 책이 없어졌고 그다음에 증보동국여지승람에 지금 존재하는 책이 그책이라고 거기도 보라고 고 책에 안동에 인물들의 수가 말이야 젤 많은게 안동권씨지 거의 3분의 1조금 넘잖아 그다음에 우리가 3분의 1 그다음에 나머지 다 합치면은 우리정도라 그래 그당시에 사람이 없다고

조사자 : 그르이 제수 준비는 양쪽 집에서 번갈아가면서 했고 제수 운반은 아까 말씀처럼 아마 지게로 뭐 달구지 안되께고 머슴등에 지애가주고 뭐

제보자 : 그당시에는 달구지 없고 뭐 그르이 뭐 여러사람이 산소 가도 못했어 그당시에 나무가 뭐

조사자 : 혹시 큰집에 문집을 삼소재문집은 발견을 해가주고 국역을해자주고 발간을 해냈는데 다른문집은 혹시 뭐 없니껴 그때 뭐 있다고 들었는데

제보자 : 딴문집은 없고 삼소재할배는 고조부가 애 저 적은 외삼촌이 휘자가 뭐 그양반이 아 덕자 영자 유고가 있는데 발간 못됐어

조사자 : 유고가 지금 있니껴

제보자 : 지금 있어 있다고

조사자 : 거기에 혹시 제수라던가 뭐 삼소재문집에는 암만찾아봐도 제수라던가 제문같은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제보자 : 제문이 본래 없잖아 축문이 있으면 뭐

조사자 : 축문이라고

제보자 : 축이라 그는 거는 제사 지내고나면은 축문을 사르게 되어있다고

조사자 : 분축

제보자 : 분축하는 장소가 있고 뭐 사르게 되어 있다고

조사자 : 홀기라던가 사람이 일단 적으나까 그때는 홀기도 없고 그랬다고 보니더 그죠

제보자 : 지금 현재 홀기 그게 언제껀데 창홀 그게 오래 안 됐나

제보자2 : 오래됐다 창홀 오래되가 하마 해방뒤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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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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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태홍님 큰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이 원고는 다시 안동 조사자(재교님)에게 보내 발설자(제보자)의 이름, 불분명한 부분 보강 등의  작업을 마친 뒤, 종합 정리하는 단계를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