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치수 및 간척사업 정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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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8-12-13 15:04 조회2,398회 댓글0건본문
14.치수 및 간척사업
○「고려시대 · · · 순수한 농경지를 조성하기 위한 간척은 고려 고종 35년(1248년) 몽고병란 시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북부(평안남도 안주, 청천강 하구) 갈대섬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백성들에게 경작케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라는 게시물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28-6 새만금전시관에 설치되어 있다.
《출처 : 새만금전시관/03.우리나라 간척의 역사 게시판》
○우리나라 논농사의 기원은 BC 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특히 삼국사기에 벽골제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수리사업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고종 22년(1235)에 몽고병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遷都)한 후 해상 방어를 목적으로 연안제방(沿岸堤防)을 구축한 것이 시초이다.
농지조성 목적의 간척은 고문헌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35년(1248)에 몽고병란 시 식량 조달을 위하여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안북부(평안남도 안주,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위도(葦島)]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한 후 백성들에게 경작케 한 것이 시초이다.
외국에서의 간척은 간척입국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에서 절대 부족한 국토면적을 확장하기 위하여 10세기경에 시작한 것이 최초이며,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약 49년 후인 1284년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후략) -
《출전 : 한국의 간척/농업기반공사/1996년/pp61)
(1)위도(葦島)
○ 3월에 북계병마사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북계 여러 성의 백성을 모두 옮기어 섬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위도가 있는데, 10여 리나 펀펀하여 농사를 지을 만하나 조수(潮水)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더니,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명령하여 둑을 쌓게 하여 파종하였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무척 괴로워하였으나 가을이 되니 크게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그 덕으로 살아났다. 섬에 우물이 없어서 물을 길러 갔다가 때때로 사로잡혀가므로 방경이 빗물을 저축하는 못을 만들어 그 걱정이 없어지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슬기에 탄복했다.
《출전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년 무신 35년(1248), 송 순우 8년ㆍ몽고 정종 3년》
○ 3월 북계(北界) 모든 성의 백성들을 옮기어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에 몽고 군사의 왕래가 무상하므로 북계병마사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백성을 옮기어 해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안북부[安北府, 지금의 정주(定州) 동쪽 50리에 있다]에 위도(葦島)가 있어 평지 10여 리가 경작할 만하였는데, 조수 우려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명을 내려 방죽을 쌓고 씨앗을 뿌리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 괴롭게 여겼으나,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몽고 군사가 여러 해 계속하여 물러가지 않았는데도, 섬사람들은 이것을 힘입어 살아날 수가 있었다. 섬에는 또 우물이 없어 물 긷는 자가 이따금 사로잡히기도 하였는데, 방경은 빗물을 저장하는 못을 만들어서 여름에는 끌어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얼음을 뜨게 하니 그 근심이 마침내 없어져 사람들은 그 지혜에 감복하였다.
《출전 :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0하 무신년 고종 35년(송 이종 순우 8, 몽고 정종 3, 1248)》
【산천】- (전략) - 위도(葦島) 주의 동쪽 50리에 있다. ○ 고려 고종 때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에 들어가 은신하였는데 그곳이 10여 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하였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김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그걸로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김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제52권. 정주목. 산천》
○ 아모간이 고려의 염주(鹽州)에 주둔하고는 산골짜기로 피난한 고려의 백성들을 모두 몰아내었다. 염주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들었다. 예전에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을 하여 벼를 심었는데, 그 당시에는 백성들이 몹시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산골짜기에서 몰려난 백성들이 이 위도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고려왕이 강화도에 있자, 원나라 사람들이 와서는 왕으로 하여금 육지로 나와서 조서를 맞이하라고 독촉하였는데, 왕은 나오지 않았다.《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출전 :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4권 세기 14 고려 3》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 제13권 지리고 13 산수 1 경내의 산과 도서》
(2)강화도의 제방과 뚝
①강화(江華)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는 항몽 유적지이다. 또한 이곳은 사면이 바다이어서 짠물이 수시로 넘나들어 황무지가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고, 갈대밭으로 덥혀 있어 곡식을 심을 수 없었다. 이에 고려 고종 25년(1248), 조정에서는 북녘의 많은 민간인들을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여 간척사업을 했다.
이때 병마판관으로 부임한 김방경(金方慶)은 강화도의 여러 곳에 제방과 뚝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게 하였으며, 돌피 씨를 심게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해에 이 돌피가 잘 여물어 해마다 몽고와의 병란으로 배를 굶주려 왔던 강화도 군민들은 비로소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사업 초기에는 의심에 가득 찬 민심으로 인해 심한 원망을 사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공은 민심을 크게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때 강화도에는 물이 매우 귀했는데, 공께서는 축성한 뚝 안에 빗물을 저수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그리고 농사철에는 이 물을 논에 대게 하여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얼음을 깨고 그 물을 식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②이때 축조한 제방과 뚝은 제포(悌浦), 와포(瓦浦), 이포(裡浦), 초포(草浦) 뚝 등인데, 이곳에 둔전(屯田 : 주둔병사의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광성(廣城), 굴곶(屈串), 만월(滿月), 오두(鰲頭), 가리(加里) 뚝 등도 모두 이때에 축성 하였다고 한다.
③뚝과 제방 소재지
제포(悌浦), 와포(瓦浦) 뚝 - 강화군 송해면 승천포 부근. 고려시대에 별궁이 있던 곳(상관)으로 그 동리 이름(상관리)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포(裡浦) 뚝 - 1256년 선원면에 축조하였다.
《출전 : 최영준(고려대)/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의 변화/국토와 생활사/한길사/1997/pp186-187》
【강화도 최초 뚝과 제방을 축조한 병마판관 김방경에 대하여 연구를 하여야 한다는 강화문화원 자료】
강화(江華)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는 항몽 유적지이다. 사면이 바다이다 보니 짠물이 수시로 넘나들어 황무지가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고려 고종(高宗)25년(1248)에 북녘의 많은 민간인을 강화로 들어오게 하여 작업을 하도록 했다. 강화 변두리 연안 황무지는 갈대밭으로 되어 곡식을 심을 수 없었다.
이때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은 여러 곳을 정하여 제방과 뚝을 쌓게하고 간척지를 만들어 우선 돌피 씨를 심게 하였더니 민심은 심히 원망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해 피가 잘 여물어 해마다 몽고의 병란으로 굶주려 왔던 강화도 군민들이 굶주림을 면하였다 한다.
그뿐이랴 이때엔 우물이 없었는지라 축성한 뚝에 빗물을 저수하였다가 농사철에는 논에 물을 대게 하여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에는 얼음을 깨고 그 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이때 축조한 제방과 뚝은 제포(悌浦) 와포(瓦浦) 이포(裡浦) 초포(草浦) 뚝이었는데 여기에 둔전(屯田-주둔병사의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기위하여 마련되었던 밭)을 설정하였고 이어서 광성(廣城) 굴곶(屈串) 만월(滿月) 오두(鰲頭) 가리(加里)뚝 등도 이때에 모두 축성하였다.
뚝과 제방 소재지 : 제포·와포 뚝은 강화군 송해면 승천포 부근 고려시대에 별궁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동리 이름(상관리)이 전하고 있다. 이포 뚝은 1256년에 선원면에 축조하였다. 강화도 최초 뚝과 제방(좌 우둔전)을 축조한 병마판관 김방경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강화도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바다가 옥토로 변하게 된 것도 고려시대의 뚝과 제방의 축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출전 : 강화사(江華史) 강도의 맥/강화문화원》
(3)제천 의림지(義林池)
저수지란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의 과다 또는 과소를 조절하는 인공적 수리시설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막연하게 제언(堤堰)이라 불렀으나 수리 시설의 기능이 분화되면서 최근에는 보(洑)·방조제(防潮堤) 등과 구분하여 저수지라 불리게 되었다.
저수지는 지표수 유량을 조절하여 수력발전, 상수도, 공업용수로도 사용할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개발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띠어 수자원의 종합적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그에 따라 벽골제를 시작으로 국가적 규모의 큰 저수지가 여러 곳에 축조되었다. 그중에서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이다.
의림지는 고을을 다스리던 박순(朴淳)이 축조하고 그의 아호 의림을 따서 의림지라 이름한 것이나 일설에는 540년 악사 우륵이 유지(柳池)라 불리던 소규모 저수지를 개축한 것이 의림지의 시원이라는 설도 있다.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194년(명종 24) 개축할 때에 발견된 축조 당시의 기초공사를 보면, 제방 내부의 기초가 흙을 옹기 굽듯이 3층으로 다져 쌓아 누수를 막고, 배수구의 수문은 수톤의 거석을 쌓아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거석에는 '朴義林'이라는 음각글자가 있었다 한다.
1279년(충렬왕 5)에 김방경(金方慶)이, 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鐘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밀양 수산제(守山堤)
【고적】-(전략)- 수산제(守山堤)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을 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 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ㆍ연ㆍ마름ㆍ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6권 경상도 밀양도호부》
【수산제(守山堤) 수문(水門)】
도지정기념물 제102호(1990.12.20)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63
수산제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471-4번지를 기점으로 하여 동북쪽으로 수산리 931번지 도연산(道淵山) 부근에 이르는 약 1km에 달하는 고대 삼한시대에 축조된 향토로 만들어진 제방으로 국농소(國農所)에 범람하던 용진강[龍津江 : 일명 해양강(海陽江)] 물을 막아주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전북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충북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밀양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서 "미리는 용(龍) 즉 크다(大)는 뜻이고, "미동(彌凍)"은 모탁(牟 )이나 미동(未冬)등과 함께 물둑, 물동 제방(堤防) 등으로 일컬어서 물과 관계되는 커다란 제방(大堤 : 守山堤) 때문에 얻은 이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수산제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가 형성되었다가 점차 지금의 밀양시 소재지 방면으로 그 중심권이 이동된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되고, 자연스럽게 수산제의 축조연대 또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삼한시대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수산제 주변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패총, 지석묘 등과 함께 수많은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1986년 11월 24일 하남읍 수산리 972번지 지하 자연암반에서 수문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수산제 수문인 것이다. 이 수문은 AD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의 입석수문보다 더 원시적으로 자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고증되어 축조년대가 국내 최초임이 입증된 바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수산제의 길이가 728보(步)로 되어 있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040m에 달하고 수산제에 포함되었던 이 수문은 높이 181cm, 너비 152cm, 길이 25m, 연결수로 7m의 규모이다.
수산제의 변천과정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證東國與地勝覽)』,『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점필제집(佔畢齊集)』,『밀주구지(密州舊誌)』등에서 살펴 볼 수가 있는데 고려 충렬왕 원년(1274년)에 동남도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사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이곳에서 제방을 고쳐 쌓고 군량미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도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농정(國農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신수리시설을 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수산제가 일본인들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어 버렸는데, 최근들어 밀양시 당국에서 발굴 조사작업을 거쳐 옛제방(守山堤)의 일부를 복원하고, 전시관, 수구보호각, 미니저수지, 경작체험답, 야외전시시설, 야외공연장, 주차장, 휴게실, 화장실, 안내판 등을 설치하여 학습장으로 활용코져 열심히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출전 : 밀양시청 홈페이지/문화유산》
(5)밀양 오산(鼇山)과 자라목(오산 鰲山)
【오산(鼇山)】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동산리
밀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남행 버스로 30여분 거리에 오산이 있다. 이곳은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에 진을 치고 둑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군량(軍糧)을 갖춘 곳이다.
【자라목(오산 鰲山)】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서 금포리(金浦里)로 가는 길목 산기슭에 있다. 모래들 마을 뒤산에서 동쪽으로 볼록하게 나와 있는 나즈막한 산(山)으로서 마치 자라목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신라왕(新羅王)이 이궁(離宮)해 와서 수산제(守山堤)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이곳에서 머물던 곳이었다고 하고, 또 고려 시대에 김방경(金方慶)이 여(麗)·원연합군(元聯合軍)과 함께 일본을 원정하기 위해 이곳에서 진을 치고, 군수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는 오산조대(鰲山釣臺)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는 낚시터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또 이곳에는 패총의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비록 그 원형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도 신라왕(新羅王)이 이궁해 와서 남긴 유적지로 생각된다.
《출전 : 밀양지명고》
(6)정읍 고부 눌제(訥堤)
【送瀛州尉之任】
瀛州舘外又衰年。薄宦栖栖海一邊。花趁下車開萬日。雨因停盖霽三川。古堤水濶金方慶。烈日天生宋象賢。政是朝廷借君重。郡中還有弊紛然。萬日寺名。○高麗金方慶始鑿訥堤。其大亞於碧骨。○宋象賢。本州人也。
《출전 : 한국문집총간 자저(自著) 권13 율시/유한준(兪漢雋)》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
- (전략) -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는 개답이 국가적으로 장려됐고 벼농사가 널리 퍼졌다.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의 개축과 증축등 수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 특히 몽고의 침략에 따른 여파로 경지가 피폐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적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22년(1235) 몽고군에 밀려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구축한 해안 제방에 대한 기록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전해지는 등 제방축조의 토목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방조제를 쌓고 논을 개간하는 최초의 간척사업도 고려시대의 기록에 남아 있다.
간척사업은 고려시대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라는 이에 의해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됐는데<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그는 강화도 뿐 아니라 정주,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다녀 제방축조 토목기술 전문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전북 고부의 눌제도 그가 개축했다는 기록(· · ·世傳高麗時金方慶因舊修築 · · ·)이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전해온다.
《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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