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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모포 구진마을의 지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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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8-12-03 18:17 조회2,0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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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현 변산의 검모포진(黔毛浦鎭)
[부안 땅이름-8] 진서(鎭西)라는 땅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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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면 구진마을, 이 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말까지 수군 진(검모포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다./자료사진ⓒ부안21


  변산(邊山)과 고흥의 천관산(天冠山)에서 건조된 900여척의 함선에 몽고군 2만여명, 고려군 5천3백여명으로 연합군을 편성한 여·몽동정군(麗蒙東征軍)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1274년 10월 초에 합포(合浦:지금의 마산(馬山))를 출발 곧바로 대마도(對馬島)와 일지도(壹岐島)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규슈의 비전국(肥前國), 축전국(筑前國) 등을 점령 크게 분전하였으나 마침 큰 태풍을 만나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고 철수하여 합포로 돌아오니 죽은 자가 13,5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정벌에서의 실패한 내용이었다.

  일본정벌군의 뒷바라지에 너무나 힘겨웠던 고려왕의 호소에도 불고하고 원나라의 세조(世祖:구비라이)는 일본정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고려로 하여금 전함, 군수물자 등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일본은 태풍이 도왔던지 어쨌던지 1차의 전투에서 기가 살아나 더욱 완강하여져 두 차례나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죽이고, 국서를 찢어 불태우고 규슈의 하카다(博多)에 몽고방누(蒙古防壘)의 성벽을 쌓는 등 다시 침공하여 올 것에 철저하게 대비를 하였다.

  그후 충렬왕(忠烈王) 7년, 즉 1281년 5월에 다시 편성된 여·몽연합군인 동로군(東路軍)은 중국 남쪽의 만족(蠻族)으로 편성된 강남군(江南軍)까지 합하여 10만 여의 대병을 편성하여 제2차 일본정벌에 나섰는데 이때도 고려에서 병선(兵船) 900여척, 초공 수수(梢工 水手:배를 운항하는 인부) 1만 5천여 명, 정군(正軍) 1만 명에 군량곡 11만석을 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병선(兵船)은 그 건조한 곳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시 변산과 고흥의 천관산에서 건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2차의 일본침공도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60여일을 싸웠으나 7월 1일 또 태풍이 내습하여 전함과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돌아오니 고려인은 27,250명 중 생환자는 19,397명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 연합군 수송 함대의 선박을 건조한 구체적인 장소로는 당시 보안현(保安縣) 변산의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이 있었던 구진(舊鎭)마을이었을 것으로 보고 이 구진마을의 변천하여 온 연혁(沿革)을 좀더 밝혀보기로 하겠다.

  오늘의 진서면(鎭西面)이라는 땅이름의 뿌리는 검모포진(黔毛浦鎭)의 진(鎭)이 그 뿌리다. 구진리(舊鎭里)는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鎭西面) 면사무소가 있는 곰소(熊淵)로부터 동쪽으로 1.5km 쯤의 바닷가 마을이다. 검모포(黔毛浦)가 서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이곳에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인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이 설치되면서부터 진영(鎭營)마을로 생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본다면 마을의 생성된 시기는 백제(百濟)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마을 뒤에 작은 동산을 배산(背山)으로 검모포 앞 바다를 향하고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의 남향 마을을 이루고, 40여호에 인구 190여명인데 바닷가 마을이긴 하지만 지금은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인 마을이다.

  마을 뒷동산 서편의 중턱에 남향으로 옛 진영(鎭營)의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그 뒤로 석누(石壘)를 쌓은 성벽의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다. 진영 터에서 서남으로 바라보면 검모포가 드넓은 서해 칠산으로 뻗어 있어 서해바다의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진영 터의 동편으로 수 백년 된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 당산 신목(神木)이 마을의 수호신목으로 용줄을 밑동에 감고 바다와 마을을 굽어보며 유연하게 서 있음은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부안현(扶安縣)의 관방(關防) 조에 「관방일검모포 병선박입(關防一黔毛浦 兵船泊立)」이라 하였으니 수군(水軍)들의 진영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진의 연혁을 밝혀보자.

   구진마을에 천여 년 이상 있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모포진영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12년(純祖:12년)에 진영(鎭營)의 관아와 거기에 따른 모든 시설 일체를 금설원(金設院)이 있었던 금설원평(金設院坪)인 지금의 진서리(鎭西里) 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만호(萬戶, 또는 첨사(僉使)) 1인, 수군의 정원 830명에 병선이 두 척이었다고 전한다. 수군 830명이란 정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지로는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7년에 간행된 부안지(扶安志:일명 丁亥志)의 관방조에 의하면 「검모포영 : 재현남 51리 수군만호 1인 당우계유혁파(黔毛浦營 在縣南五十一里 水軍萬戶一人 當于癸酉革罷)」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구진리에 있어 왔던 검모포진 수군의 진영은 1812년에 진서리(鎭西里)로 옮겨가 1873년(고종 10년)에 혁파(革罷:폐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영(鎭營)이라는 정부의 관아(官衙)가 옮겨짐으로 해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데 새로 진영이 옮겨진 곳의 마을 이름은 신진리(新鎭里) 또는 진의 서쪽마을이라는 뜻으로 진서리(鎭西里)라 하였고, 새로 자리 잡은 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을 진동리(진동리)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옛 진영 터의 마을은 옛 진영이 있었던 마을이란 뜻의 구진마을(舊鎭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서면(鎭西面)이라는 면의 이름도 검모포진(黔毛浦鎭)의 서족에 있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니 수군의 진영이 있는 위치의 변동에 따라 생성된 11역사 문화적인 내용이 담겨진 땅이름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진서면 구진마을은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서해를 지키는 요충지에 있었던 진영(鎭營)의 마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몽동정연합군 수송선단의 배 수백 척을 건조(建造)한 조선소의 마을이었으며, 고려말 우왕(禑王)초에는 일본 해적집단인 왜구(倭寇)들이 50여 척의 선단으로 내습하여 와 구진의 검모포진을 점령한 후 적현(狄峴:호벌치)을 넘어 부령현까지 점령하고, 동진교를 헐어버린 왜구들의 난을 가장 심하게 겪은 마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구진마을은 화석(化石)된 부안의 역사·문화 일부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한낱 구진(舊鎭)마을로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정말로 이 고장의 역사·문화를 발굴 수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고장의 문화를 바르게 정립하려 한다면 겉치레 낯내기 문화행사, 푸석하고 알맹이 없는 문화행사는 이제 그만두고 구진마을 같은 「역사의 현장 마을」 한곳이라도 찾아내어 그 입구에 「마을의 연혁비」라도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가슴 안에  향토문화를 채워주는 일이며 후손들에게도 생생한 역사·문화의 현장을 알려주는 일이 것이다.

/김형주

<자료출처 : 부안21  http://buan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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