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전쟁-그 상세한 기록>소설 속-항몽작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김방경(위도 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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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08-10-23 18:07 조회2,112회 댓글1건본문
충간위 자료-<항몽전쟁> 소설 속의 <충렬공의 항몽전>-위도 입보(立保)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 1, 2, 3권> 2007년 7월 초판, 구종서 지음, 살림 펴냄
이 소설은 1196년, 최충헌의 집정(執政)부터 전개되어 최우(최이)-최항-최의-김준-임연-임유무 까지 무신정권기인 고려 명종~원종 간에 펼쳐진 간헐적인 백성들의 항몽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항몽전쟁>이라기보다는 열거한 무인집정자들이 1270년, 원종이 몽골 쿠빌라이의 몽병을 빌려 개경으로 출륙환도 할 때까지 왕권 위에서 군림하며 철저하게 짓밟히는 강토와 대륙에서 몰아온 말발굽에 도륙당하는 백성들과 여인들이 유린되며 몸부림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정권의 유지와 사리사욕’을 누리려 왕들을 위협, 심지어 폐위시키기도 하며 1232년, 최우의 강화천도와 강도(강화수도) 38년사의 무인천하에 이루어진 <무신정권기 고려사>가 더 어울릴 만큼 무신정권들에 의해 핍박받는 고려를 엿볼 수 있다.
강도시기, 집정자들은 몽골장수들과는 달리 직접 전선에 나서지 않고 가병인 야별초, 신의군 등의 별초를 움직여 자신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병력을 투입시켰고 본토의 산성과 해도에도 역시 직속부하를 별감으로 파견하는 한편 몽골의 소환명령에도 국왕을 보내 그 비겁함을 드러냈다. 끝내는 자신들의 죽음이 두려워 국왕의 환도명령에도 불복하며 버티다가 강화출신의 반왕파 배중손, 김통정 등은 왕온을 임금으로 내세워 반기를 들고 삼별초를 움직여 반정을 한다.
저자가 밝힌 방대한 참고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강화출생인 작가 구종서는 사서와 전문서, 답사지, 논문 및 기사, 사전 및 지도, 향토사 관련서까지 놓치지 않고 섭렵한 듯 1, 2, 3권을 편년체로 기술하며 주해와 함께 단원의 중간마다 보충자료를 달았는데 작가는 몽사(원사)의 완벽한 재현은 물론 여몽의 열전에도 충실하여 역사 인물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특성과 관직이동, 사상 등에서는 마치 행장을 더듬는 듯 그려냈고 소설의 분량만큼이나 고려조 삼별초 반란 전 무신정권기 70년의 동북아 역사와 몽골의 유라시아 대외정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소설이랄 수 있다.
책의 2권-참혹한 산하 편
소제 <제4차 몽골 침공편 276~278쪽>에서 1247년 홍복원을 앞세운 몽골의 고려침입 부분에 기술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산성이나 해도(도서지역)로 입보할 때 적이 사용할 물자는 가져가거나 불태워 없애는 전술을 작가는 청야(淸野)작전 이라 설명하고 있다.
소설 원문-
이때 청야작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장수는 김방경(金方慶)이다.
김방경은 그때 36세로 북계의 병마판관(兵馬判官)을 맡고 있었다. 몽골군이 접근해 오자 김방경은 북계의 백성들을 위도(葦島, 평북 정주)로 입보시켰다.
위도는 청천강 입구의 서한만(西韓灣)에 있는 군도 중의 한 섬이다. 이 섬에는 폭이 십여 리나 되는 넓은 벌판이 있었지만 바다물이 드나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래서 몽골군에 사로잡히는 일이 잦았다.
넓은 펄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논밭으로 만들어야지.
김방경은 이 황무지를 개간키로 했다. 우선 백성들을 동원해서 제방부터 쌓았다. 제방의 위 부분은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고 두터운 길로 만들었다.
피는 생존력이 강해서 거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 때문에 염분을 빨리 없애 줄 것이다.
제방 공사가 끝나자 김방경이 명령했다.
“올해는 제방의 안쪽 땅에 피를 심어라.”
백성들은 좀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뚝(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느라 고역을 치른 백성들은 김방경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피를 심으라니? 우리보고 피나 먹고 살란 말인가?”
“군인이 뭘 안다고 피를 심어라 말라 하는 게야”
“맛 좋고 넘쳐나는 물을 놔두고 이 섬에 들어와 별 고생을 다하는구만.”
“입보인지 뭔지 해서 왜 이리 백성들을 들볶고 고생시키는 거야 원.”
“이기지 못할 싸움을 왜 이리 길게 해. 빨리 강화도에서 나와 항복하지 않구서.”
그런 백성의 볼멘 소리가 김방경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갓 간척한 갯벌의 흙은 짜다. 그런 땅에 벼가 되겠는가? 우선 생존력이 강한 피를 심어 소금기를 제거한 다음에 벼를 심어야 한다. 피는 짠맛이 있는 땅에서도 잘 될 것이다. 두고 봐라. 식량이 떨어지고 목이 마르면 내 생각이 날 것이다.”
백성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군사들이 나서서 독려하는 바람에 새로 개간한 개펄 땅에 피를 심었다. 저수지 공사도 끝나 거기에다 빗물을 채웠다.
육지에서는 쉽게 물러갈 것으로 알았던 몽골군들이 물러가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다. 농민들은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벌써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피는 잘 자랐다. 열매도 잘 여물었다. 김방경은 피를 거둬들이게 했다. 대풍이었다.
그해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도록 몽골군은 물러가지 않았다.
위도에 입보한 북계의 백성들은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새로 개간한 간척지에서 거둬들인 피로 그들은 그해 겨울을 굶지 않고 넘길 수가 있었다. 그렇게도 불평을 많이 했던 위도인들은 겨울이 되어서야 김방경의 뜻을 이해하고 고맙게 생각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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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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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새롭고 귀한 서적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 1, 2, 3권>의 자세한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충렬공의 기록, 어서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