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박중식의 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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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6 01:43 조회1,407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묘소 산송사건에 대한 김령의 <계암일록>과 김광계의 <매원일기> 내용을 옮깁니다.
여러 가지로 미흡하고 잘못 옮긴 내용이 많으니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홈 게시판은 글의 분량이 일정하게 제한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번에 다 올라가지 못해 몇 개 파일로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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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박중식의 서찰
◆溪巖日錄 一 ①戊甲 二月 十九日 (1608년 선조 41년 2월 19일)
風, 午聞野火自西北延于此里後山, 令奴輩撲減之, 午後徃見判生二兄于中間溪橋, 以志伯仲李士安皆會, 以志出示朴仲植書, 京中金繼道 金時獻, 以翰林兄墳域, 挾上洛公葬會議, 將欲呈官, 刻日移葬, 而此亦有中間挑起者, 仲植意, 則指金景建也, 盖吾曾王父墳, 與上洛同原, 而上洛居前, 上洛於王父, 爲七代外祖也, 事具先生所撰碣文, 王父之葬, 已將百許年, 每歲節日, 具饌先祭, 上洛碑石, 歲久仆破, 頃於壬寅, 言于監司 李時發, 李亦上洛外派, 遂協力改竪, 上洛姓孫雖衆, 各在異處, 邈不相聞, 墓所亦不知顯於世者亦多矣, 未聞有展省而來者, 徃在辛卯秋, 敬差 金公昉, 過先大夫, 以金公上洛裔, 言其墳所, 金甚喜, 遂徃展掃, 咨歎而去, 翰林兄之葬, 則在亂後, 而在上洛之前, 亦未聞, 有橫詰者今如是, 可慮.
바람. 낮에 들불이 서북쪽에서 이 마을 뒷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종들을 시켜 들불을 끄게 하였다.
오후에 ②판사 형과 생원 형을 중간 계곡 다리에서 만났다.
③이지(김광계) 형제 중에 맏이와 둘째(김광실), 이사안도 모였다.
이지가 ④박중식의 서찰을 꺼내 보였다.
서울의 ⑤김계도와 김시헌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⑥한림 형(김해)의 묘가 상락공의 묘에 바짝 끼어 있기에
관청에 소장(訴狀)을 내서 날을 잡아 이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중간에 도발을 일으키는 자가
박중식의 생각으로는 ⑦김경건이라고 지목하였다.
대체로 나의 ⑧증조부(김효로) 묘소는 상락공과 같은 언덕인데,
상락공 묘소가 앞에 있다. 상락공은 내 증조부의 7대 외조부이다.
이 사실은 ⑨선생(퇴계 선생)이 지은 묘갈문에 기록돼 있다.
⑩증조부의 장례는 이미 100년쯤 전이다.
매년 절기마다 음식을 장만해 (상락공에게) 먼저 제사를 올린다.
⑪상락공 비석은 세월이 오래 돼 엎어져 깨졌다.
⑫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무렵에 감사 이시발에게 말했더니,
이시발 역시 상락공의 외손이라 마침내 협력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다.
상락공의 후손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제각기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현달한 자 역시 많으나 (상락공의) 묘소를 모르고 있다.
성묘를 하거나 찾아오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지난 신묘년(1591년 선조 24년) 가을에
⑬경차관(敬差官) 김방 공(公)이 ⑭선친(김부륜)에게 들렀는데,
김 공이 상락공의 후손인지라 그 묘소를 말해 주었다.
김방이 매우 기뻐하며 드디어 찾아가 성묘하고는 한숨을 쉬면서 한탄하다가 돌아갔다.
⑮한림 형 장례는 임진왜란 후에 있었는데,
(한림 형 묘가) 상락공의 묘 앞에 있으나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힐난하는 자가 지금 이와 같으니 가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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