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에 협장한 분묘는 최소 5기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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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4 16:47 조회1,290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묘소 산송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김령의 <계암일록>과 김광계의 <매원일기>는 우리 홈페이지를 통해 일부 내용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당시 충렬공 묘소 옆에는 김효로와 김해뿐만 아니라 적어도 5기 이상이 협장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의 총체적인 상황을 개략적으로 이해하고자 우선 충렬공 묘소에 협장한 분묘 기수에 대한 내용부터 소개한 뒤 순차적으로 올리겠습니다. 그 동안은 일기 내용의 세부 분석을 갖고 기본적인 윤곽을 파악하였습니다. 오늘 올리는 내용은 당시 상황만 파악하기 위해 주석을 달지 않았습니다. 차후부터는 주석을 달아서 세부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溪巖日錄 四
丙寅 九月 七日 (인조 4년 1626년 음력 9월 7일)
陰, 徃去丁未年間, 金時獻 金大來 金繼道輩, 以內翰兄墓, 逼近上洛公墓, 議欲移出, 未幾大來敗, 時獻諸人, 遷延未果, 己酉冬, 今監司 金時讓, 以京試官來祭公墓, 目見其山削, 無忤話, 盖諸金, 皆上洛後裔, 而金慶建居在近, 實慫慂焉, 至是時讓爲道主, 聲言宗人金自點 金繼道諸宰臣及外泒綾原君 具宏, 皆欲遷內翰墓, 至有語及於曾祖考墓, 而以百年久遠爲重, 聞來駭愕駭愕, 顧念上洛之墓, 世代荒遠, 無人看護, 幾至湮沒, 以是權用經祖葬於其下, 而絶無禁焉, 吾曾祖以七代外孫, 陪葬之後, 四節祭奠, 無異親祖, 守護封植, 百年于今, 其間公之直孫, 名公巨卿, 不爲不多, 未聞有一言以訶, 而皆以爲幸焉, 豈知一朝, 直欲以勢力迫人, 爲此不當理之事乎, 且曠歲而絶未有, 直孫或來循省者, 而今者得勢乘時, 至於此極, 其於天理人事何. ○이하 생략
흐림. 지난 정미년간에 김시헌, 김대래, 김계도 등이 내한 형(근시재 김해)의 묘가 상락공 묘에 매우 가까워 (내한 형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래가 패하여 김시헌 등은 일이 지체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유년 겨울에 현 감사 김시양이 경시관으로 와서 상락공 묘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 산이 깎여 나간 것을 보고도 언짢은 말이 없었다.
(김해 묘를 이장하고자 하는) 여러 김씨들은 모두 상락공의 후예로 김경건이 (예안현)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종용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김시양이 도주(방백)가 되어 종인 김자점, 김계도 등 여러 재상 및 외파 능원군 구굉에게 말하여 (이들이) 모두 내한 형 묘를 옮기려고 하였다. 또한 증조부(김효로) 묘까지 (이장하겠다는) 말이 이르렀다. (증조부 묘는) 백년이나 오래 되었으며, 중차대한 일이다. 들려오는 소리가 정말 놀랍다.
되돌아보건대 상락공 묘는 세대가 너무 멀어져 보살피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 거의 자취도 없이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이에 권용경의 조부를 그(상락공 묘) 아래에 장사지냈으나 이를 금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우리 증조부(김효로)는 (상락공의) 7대 외손으로 (상락공 묘) 뒤쪽에 장례를 지내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드려 친할아버지와 다름이 없었으며, 묘소를 수호하고 흙을 북돋운 것이 지금까지 백 년이다. 그 기간 동안 상락공의 직손으로 명공거경의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책망하는 말이 단 한마디라도 있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대체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어느 날 갑자기 이를 알고 곧바로 세력으로 사람을 핍박하니 이는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오랜 세월 직손이 없다거나 혹은 상락공 묘에 와서 살펴본 자가 있다는 말이 끊어졌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세력을 쥔 틈을 타서 이처럼 극에 이르는 것이 사람으로서 천리에 따른 일이라 하겠는가?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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