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백범과 망명지의 세 여인] ② 아내 최준례 여사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8-08-14 11:04 조회1,885회 댓글0건

본문

[백범과 망명지의 세 여인] ② 아내 최준례 여사
쿠키뉴스  기사전송 2008-08-12 16:30 
h080812sanghai.jpg
[쿠키 문화]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상하이. 지난 6일 찾은 상하이에서 최준례를 떠올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가 첫 아들 인을 데리고 남편 김구의 뒤를 쫓아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20년. 불야성의 국제도시로 변한 현재의 상하이와는 격세지감의 세월이다.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 역시 이태 뒤인 1922년 상하이로 왔다. 김구 가족은 실로 오랜만에 한 지붕 밑에 살게 된 것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재미있는 가정을 꾸렸다”는 한마디 말로 망명자의 심정이 드러냈다.

영경방(永慶方) 10호 2층. 김구 일가가 살던 당시의 주소다. 비록 조국을 등진 망명자 신세였지만 네 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아가던 시절은 김구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사이 최준례는 임신을 해 1922년 8월 둘째 아들 신을 낳았다. 그러나 단란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최준례는 신을 해산하고 몸조리를 하던 중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친 뒤 폐렴까지 겹쳐 1년 너머 고생을 했다. 며느리의 병구완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며 세숫물을 떠다놓는 시어머니의 수고가 황송한 나머지 스스로 물을 길러갔다가 계단에서 실족해 굴러 떨어진 것이다. 거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내리사랑과 효부의 규율이 있다.

상하이 소재 대한민국 임정 청사 관리인과 현지인에게 물었으나 최준례가 살림을 했다는 ‘영경방 10호 2층’은 찾을 길 없었다. 거리명이 바뀌어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임정 청사에서 도보로 20분쯤 떨어진 중산로의 허름한 가옥을 찾았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낡은 집이었다. 겉은 3층 연립주택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가파른 계단을 이어붙인 5층이었다. 최준례 역시 이런 환경에서 가정을 꾸려갔던 것이다. 물기가 묻어 있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급경사의 계단은 위험했다. 한 층에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방이 대 여섯 개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짙은 어둠이 내리 깔려 대낮임에도 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어둠이 낯설었다.

그 시절, 전깃불은커녕 등잔불도 켜기 어려운 살림이었다. 생활은 그렇게 궁핍했다. 최준례는 상하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은 뒤 서양 선교사가 무료로 운영하는 홍구폐병원에 입원했지만 별다른 약도 써보지 못한 채 1924년 1월1일 눈을 감았다. 최준례가 입원한 홍구폐병원은 일본 조계지에 있어 백범은 단 한 차례도 아내를 문병할 수 없었다.

최준례의 임종을 지켜본 이는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자동이 엄마’로 불리던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1900∼1991)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임종하기 전에 백범을 부르려고 했으나 최준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일경에 쫓기는 남편이 올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정화의 연락을 받고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서른 여섯 살 젊은 아내를 떠나보낸 백범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 것인가.

역사에서 가설은 금물이지만 폐렴에 특효라는 페니실린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아내를 죽음에까지 이르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연구원은 “김구 선생은 단 한 푼이라도 임정 예산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면서 “아내의 폐렴 증세가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서도 임정을 유지, 개혁하는데 주력한 김구의 냉정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최준례의 참모습은 김구에 의해 가려진 면이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은 무엇일까. 상하이 취재를 떠나기 전, 김신(86) 백범기념사업회장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를 넣었으나 답변은 없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짤막한 대답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 홍구폐병원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인에게는 의미 있는 항일의 흔적일지언정, 중국인에게는 한낱 스쳐가는 외국인의 죽음이었을 것인가. 김구의 동지들은 최준례가 겪은 고초야말로 나랏일에 공헌한 것이라며 의연금을 추렴해 장례를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장례식은 1924년 1월4일 오후 2시 프랑스 조계 숭산로 경찰서 뒤쪽의 공동묘지에서 기독교 식으로 열렸다. 묘비는 유명한 한글학자 김두봉이 썼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단기 4222년 3월 19일)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대한민국 6년 1월) 최준례 묻엄(무덤) 남편 김구 세움. ‘ㄱ,ㄴ,ㄷ.......ㅈ,ㅊ’은 차례대로 ‘1,2,3,....9.10’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는 해방 직후 환국한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아내의 시신을 이장해 올 때 함께 가져오지 않아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준례가 입원했을 때 아들 인도 병이 깊어 입원 중이었다. 둘째 아들 신은 겨우 걸음마를 익히는 젖먹이였다.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니의 빈 젖을 물어야 잠이 들었고 이후 말을 배울 때부터 오로지 할머니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지아비와 아내,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지상에서 영원으로 갈렸다. 초라한 망명지 누옥 계단이 저세상으로 가는 길일 줄이야!

김구는 아내 최준례 여사를 만나기 전에 수 차례에 걸쳐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다. 스승인 유학자 고능선의 장손녀, 여옥이라는 여인, 그리고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등이 그들이다.

선생의 인연은 따로 있었다. 최준례는 이미 집안에서 약속한 혼처가 있었지만 거부하고, 김구를 만나 경성 경신학교로 유학을 간 신 여성이었다. 약혼한 집안의 추궁이 있었지만 둘은 결국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1906년 김구의 나이 서른한 살 때의 일이다.

결혼 뒤에도 김구는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 가정은 평안할 날이 거의 없었다.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 둘째 딸 화경은 죽어 있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그때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 너는 살아왔지만, 널 극히 사랑하고 늘 네가 보고 싶다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에 기별도 하지 않았다. 일곱 살도 안 된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 하더라.”

이렇듯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김구는 임정을 이끌었다. 상하이 임정은 김구가 딸과 어머니와 아내를 잃으면서 일궈 낸 건국의 둥지였다. 최준례는 남편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경성과 지방을 전전하면서 그야말로 별별 고생을 다했다. 경성에서 지낼 때는 일본인 책 공장에서 온갖 고된 일을 하기도 했다. 한 외국인 여성이 그녀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를 하도록 돕겠다고 했으나 그것도 거절하고 김구를 기다린 것이다.

풍파와 고초는 그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가난살이를 묵묵히 지켜낸 최준례는 당시의 우리 민족의 처지와 똑같이 극히 검소하고 지극한 여성이었다. 혁명가 아내의 쓸쓸한 죽음. 목숨과 꿈이 으깨진 자리에서 대한민국은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내를 앞세운 자리. 영웅적 측면에 치우쳐 있는 김구에서 벗어나 고뇌에 찬 인간 김구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일이야말로 백범 김구를 학문으로 정립하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상하이=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