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전기> 원고 자료(13)-충렬공 행장(수정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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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5-27 10:00 조회1,955회 댓글0건본문
하고는 홍다구 등을 보고
"죽일 테면 죽여라. 나는 감히 굴복하지 않겠다."
고 하니 홍다구가 묵묵(默默)히 말을 못하고 바로 가 버렸다.
이튿날 공(公)을 대청도(大靑島)로 유배(流配)시키니 그날 온 나라 남녀(男女)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음으로 전송(餞送)하였다. 그리고 차자(次子)인 진주목부사(晉州牧副使) 흔(忻)도 백령도(白翎島)로 유배(流配)되었다.
3월에 왕(王)이 공주(公主)와 더불어 경사(京師)에서 조회(朝會)를 할 때
"방경은 아무런 죄도 없다"
고 하니 황제(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방경을 위득유, 노진의(盧進義) 두 사람과 더불어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으로 보내서 사실(事實)을 밝히게 하라.”
고 하였다. 공(公)은 이들과 함께 연경으로 떠났는데 노진의는 도중(途中)에서 별안간 혀가 타서 폭사(暴死)하고 위득유는 중서성(中書省)에 나가서 진술(陳述)을 하자 도당(都堂=중앙에서 행정전반을 감독하는 기관)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 모두가 크게 웃으니 그 후 십여일에 위득유도 또한 혀가 썩어서 죽었다. 의원(醫員)을 시켜 검시(檢屍)하게 하자 의원의 말이
“병인(病因)은 신경(神經)을 너무 써서 일어난 병이다.”
하니 이때 세상 사람들은 이르기를
“천벌(天罰)을 받아 죽은 것이다.”
고 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으로 하여금 '구직(舊職)에 복직(復職)시키라‘고 영(令)을 내리고 왕(王)을 따라 귀국(歸國)하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다시 중찬(中贊)이 된 뒤로 세자사중대광(世子師重大匡)을 겸(兼)하게 하니 전소(牋疏)를 올려 퇴직(退職)할 것을 원(願)하였으나 왕(王)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경진(庚辰=1280년)년에 공(公)에게 원(元)나라 황제(皇帝)의 조서(詔書)로 중봉대부(中奉大夫)로서 관고려군도원수(管高麗軍都元帥)를 임명(任命)해서 이내 또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라 '는 명령(命令)을 하였다.
그해 섣달(12월)에, 공(公)은 하정사(賀正使)를 겸해서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황제(皇帝)가 대명전(大明殿)에 나와서 조하(朝賀)를 받을 때 승상(丞相)이 만수(萬壽)를 비는 술잔을 올리고 사품(四品) 이상관은 모두 어전(御殿)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때 공(公)은 예(禮)를 간단(簡單)히 마치시고 잔치자리에 나가니 황제(皇帝)가 온화(溫和)한 얼굴로 말을 하면서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시고 진수성찬(珍羞盛饌)을 하사(下賜)하여 특히 백반(白飯)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인(高麗人)은 이런 것을 즐겨 먹기 때문이라"
고 하며 그 대우(待遇)가 매우 풍성(豊盛)하였다. 인해서 3일간의 잔치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에 승상(丞相)과 안동(安童)이란 사람은 북방(北方)에 있으면서 정부에 소식(消息)이 없다기에 공(公)이 은쟁반과 모시를 그의 부인에게 보냈더니 부인이 전어(傳語)로 말하기를
"공이 바로 귀한 재상(宰相)이 아닌가요? 승상(丞相)이 입북(入北)하고부터 국신(國信)이 두절(杜絶)되였는데 공(公)이 아니면 누가 다시 부인(婦人)을 생각해 주리까?"
고 하면서 인해서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공(公)도 또한 울면서 사례(謝禮) 한 즉 그것은 승상(丞相)이 본국(本國)과 더불어 은의(恩誼)가 있었던 까닭이다.
마침내 공(公)이 귀환(歸還)하게 되어 황제(皇帝)가 흰 깃으로 만든 갑옷(白羽札甲)과 활과 화살을 하사(下賜)하고 다시 갑옷과 방패 옷을 각각 1천벌씩 하사(下賜)하며 일본(日本) 정벌(征伐)에 대한 조령(條令)을 지시(指示)하였다.
신사(辛巳=1281)년 봄 2월에 고려(高麗)로 돌아와서 이달 17일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숭문관(崇文館)에 들어가니 군대(軍隊)를 통솔(統率)할 만부장(萬夫長)과 천부장(千夫長), 그리고 여러 군관리(軍官吏)들이 차례로 와서 배알(拜謁)하였다.
3월 16일에 이르러 숭문관(崇文館)에 앉아서 대오(隊伍)를 정리(整理)하여 군제(軍祭)를 지내고 군기(軍旗)를 들고 진(陣)터로 가는데 승제문(承制門)으로부터 나가 용뇌(龍腦) 교외(郊外)에서 자고 18일에는 정동행중서성우승(征東行中書省右丞)인 흔도와 다구(多丘)가 경사(京師)로부터 도착(到着)할 때 황제(皇帝)가 국왕(國王)에게 명령(命令)하여 '합포(合浦)에 가서 여러 군대(軍隊)를 감송(監送)하라'고 하였고 공(公)은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가서 병장기(兵仗器)를 점검(點檢)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5월 3일에 왕(王)이 합포(合浦)까지 와서 송별연(送別宴)을 하고 다음날 모든 군선(軍船)이 주성이 이르러 후풍(候風)을 타고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렀다.
6월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적(敵)을 격살(擊殺)하니 물에 빠져 죽은 자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20여 일이 지난 후에 왜인(倭人)들이 병선(兵船)으로 와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달아났다. 7월 1일에 또다시 싸우는데 저들이 또 달아났다가는 돌아오고 하여 그 이튿날도 또한 이와 같았다. 두 우승(右丞)이 회군(回軍)하려는 의사(意思)로 군관(軍官)을 모아서 의논(議論)하되
"황제(皇帝)의 성지(聖旨)에는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으로 하여금 6월 보름 전에 일기도로 모이라'하였는데 이제 남군(南軍)은 그 기일에 미처 오지 못하고 우리 군(我軍)만이 먼저 와서 대전(大戰)을 자주 해서 식량(食糧)과 병기(兵器)가 장차 떨어지게 되고 군함(軍艦)이 부서져서 물이 새니 그를 장차 어찌할까?"
고 하니 공(公)이 아무 말이 없으니 십 여 일이 지난 후에 또 전과 같이 의논(議論)하였다.
이때 공(公)이 말하기를
"성지(聖旨)로 내리신 3개월 분 양곡(糧穀)이 아직 한 달 분은 남아 있는데 이제 남군(南軍)의 실기(失期)는 법(法)으로서 논(論)해야 할 것이나 또 한 병(兵)이란 것은 흉기(凶器)와 같은지라 황제(皇帝)가 고르지 못하더라도 남군(南軍)이 와서 합세(合勢)하여 공격(攻擊)하면 반드시 섬오랑캐들을 멸망(滅亡)시킬 것이다."
고 하니 모든 장군(將軍)들이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 이달에 강남(江南)의 범우승(范右丞)과 이좌승(李左丞)이 정군 십여만(正軍十餘萬)과 지원군 5천명으로서 대중선(大中船) 삼천소(三千艘)와 소선(小船) 6천으로 내박(內泊)하고 억센 파도(波濤)를 건너온 사자(使者)가 와서 하는 말이,
"청컨대 이곳을 떠났다가 전군(全軍)이 합세(合勢)하여 하륙(下陸)하자"
고 하니 행성(行省)도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
8월 1일에 큰 바람이 불어 몽한군(蒙漢軍)과 남군(南軍)의 전함(戰艦) 과반수(過半數)가 부서지고 또 흩어져 버리고 해서 다시 싸우지 못하고 이내 회군(回軍)을 하게 되니 그 군졸(軍卒) 가운데 배가 부서져서 육지에 있는 자를 공(公)이 영(令)을 내려 병기(兵器)와 군마(軍馬)를 버리게 하고 각 배에 나누어 태워서 돌아오니 총계(總計)가 1천 7십 6명이었다. 8월에 합포로 돌아와서 군(軍)을 해산(解散)시켜 고향(故鄕)으로 돌려보냈다.
이듬해 가을 7월에 또 왕(王)에게 전문(牋文)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청했더니 계미(癸未=1283)년 겨울 12월에 추충정난 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퇴임(退任) 치사(致仕)하게 하고 을미(乙未=1285)년에 와서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으며 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 또한 능(能)하였고, 기골(奇骨)이 보통이 아니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고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다. 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다. 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의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 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다.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을 쳤다.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픔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 무리들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였고,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의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
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충렬공(忠烈公)의 특수(特殊)한 공로(功勞)와 특이(特異)한 업적(業績)은 해와 별처럼 밝게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옛 사람의 공로(功勞)와 업적(業績)이 저와 같으나 그의 자손(子孫)들에 와서 능히 계승하지 못하고 묻혀 버려서 세상에 들리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공(公)의 손자(孫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推誠輔理同德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福昌府院君=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根本)을 잊지 않게 했음이 대개 이와 같고 또한 자손(子孫)들에게 가히 공(公)의 남기신 기풍(氣風)과 공적(功績)이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나서 백세(百世)를 두고 쇠(衰)하지 않을 줄 아노라.
지정 십년 경인(至正 十年 庚寅=忠烈王 2年=1350年) 2月
광정대부 검교 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 안진(匡靖大夫 檢校 都僉議參理 禮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安震)이 끝에 적음(跋)
또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 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되므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子)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하고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미처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
라고 하였다. 나는 다행(多幸)히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어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 여 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
라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僣)함을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가 말편(末篇)에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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