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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전기> 원고 자료(9)-충렬공 신도비문(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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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5-21 15:48 조회1,9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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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신도비문(홈 소개본)을 족보에 수록된 대로 수정하였습니다.

<충렬공 신도비>(수정본)


忠烈公 金方慶 史蹟

"굳센 물은 모진 바람에서 알 수 있고 곧은 신하는 板蕩中에서 볼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아아 저 內外的으로 多事多難한 판국에 出將入相 盡忠竭力 능히 이를 克復하여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긴 高麗朝의 金忠烈公과 같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公의 諱는 方慶 字는 本然 貫은 安東이요 考는 兵部尙書 翰林學士 諱 孝仁이라. 公은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特異하고 夙成하여 高宗14년 16세에 散員兼式目錄事를 除授 仕路에 나서 그 후 公은 昇進을 거듭 監察御使에 任하여 强直한 氣風을 보였고 高宗35년(37歲)에 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는 蒙古兵의 侵入을 避하여 葦島에 入保, 住民을 耕食케 하다.

 그 후(元宗時) 南京留守 西北面兵馬使를 歷任 간 곳마다 善政을 행하고 들어와 刑部尙書樞密院副使의 要職을 띄다. 이때는 高麗가 이미 元(蒙古)의 節制를 받고 內外的으로 복잡한 環境속에 있었으나 公은 오직 忠直과 誠實로서 任務를 다하니라.

  元宗(원종)11년(59歲) 三別抄亂에 公은 元將과 더불어 珍島에 移據한 賊을 쳐 이듬해 이를 掃蕩하고 그 功으로 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入相)에 昇進되다. 賊의 餘黨이 耽羅로 入據하매 同王13년(61歲) 公은 또 行營重軍兵馬元帥로서 元軍과 合勢하여 上陸作戰을 敢行, 이듬해 드디어 亂을 平定하고 凱旋하니 元宗은 公을 慰賀하고 紅鞓을 下賜하고 侍中(首相)을 拜하다. 同年七월에 元帝의 부름을 받고 元에 가니 帝는 公을 禮遇하여 金鞍綵服과 金銀을 賜하고 寵愛함이 極盡하였고 돌아와 開府儀同三司를 加授하다. 帝의 要請으로 公은 元將과 더불어 많은 戰船을 이끌고 對馬, 一岐島를 攻破하고 내키어 九州北岸을 치다가 颱風을 만나 돌아와 俘虜 器仗을 바치니, 王은 公에게 上柱國判御史臺事를 加하고 同年(충렬왕 원년)에 官制改革으로 인하여 僉議中贊(侍中) 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를 拜하고 또 이듬해 元帝로부터 最高武功勳章인 虎頭金牌를 받았다.

 忠烈王七年(70歲)에 再次 日本征伐의 命을 받아 公을 元軍과 合勢, 博多를 攻擊中 또 颱風을 만나 돌아오다. 公은 年老를 理由로 屢次 致仕(退職)를 乞하였으나 王은 이를 不許하고 元帝는 公에게 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를 除授하였으며(충렬왕6년) 同王 九年(72세)에 또 致仕를 乞(걸)하니 王은 公에게 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典理司事世子師를 삼아 致仕케 하고 다시 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 食實封三百戶를 封하였다. 公은 致仕한 뒤에도 憂國如家, 大事가 있을 때는 반드시 王의 諮問을 받더니 同王 二十六年 庚子(1300년) 八月 十六日에 享年 八十九歲로 卒하매 朝野가 모두 痛嘆하니라. 忠宣王 卽位初(1307년)에 王旨를 내려 [故 上洛公은 社稷에 有功함이 帶礪와 같다]하여 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을 追贈하고 諡를 忠烈이라 하고 命하여 神道碑를 세우게 하였다.

 嗚呼라! 公은 실로 憂國盡忠으로써 始終一貫한 偉人이었도다. 그 그릇과 度量은 弘大하여 小事에 拘碍치 않고 天稟氣質은 凡人과 달라 늙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고 盛寒極署에도 疾病을 몰랐다 하니 公의 長壽가 여기에 緣由함을 알겠도다. 또 그 '忠直信厚' '嚴毅寡言' '不怨不尤'의 君子人的 性格 '文武兼全' '博識故典' '處事無錯'의 才識과 智略 또 그 律己는 嚴格하여 낮에는 누어본 일이 없다 하니라. 이로써 公의 多事한 難局을 克服하여 큰 功勳을 세웠으니 그 重重한 爵號와 그 諡號가 其宜를 得하였다 하겠도다. 公의 아들에는 愃, 忻, 恂, 小侖이 있어 長男 愃은 官이 副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그의 뒤 역시 名公巨卿으로 連連하여 東國의 華門大族을 이룩하다.

  公의 옛 神道碑가 不幸히도 壬辰倭亂에 毁損遺失되어 그 후 改竪치 못한 것을 遺憾으로 여겨 金氏大宗會에서 이를 再建코자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나는 일찍부터 公의 崇高한 精神과 圓滿한 人格을 追慕하는 터이라 不文이나마 삼가 略述하노라

                     서기 1971년 10월 일

                                學術院長 文學博士 李丙燾 謹撰    

                                後世孫 醫學博士 思達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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