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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전기> 원고 자료(7)-충렬공 묘비문(국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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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5-19 09:00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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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묘비문 국역문

  *<벽오유고>를 기본으로 하여 오자 1자(坼-圻)를 바로 잡아 국역함


<高麗 宣忠協謀 靖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洛忠烈公 金方慶 墓碑>

 (고려 선충협모 정란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충렬공 김방경 묘비)

 

 안동김씨의 가계는 신라 경순왕에서 나왔다. 공은 15세손인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려 원종, 충렬왕조에 벼슬하여 공훈(功勳)이 무성하게 드러나고 고금에 크게 떨쳤음이 국사(國史)와 행장(行狀)에 실려 있어 뚜렷하게 살필 수 있다.

 잠시 그 뚜렷이 드러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충직(忠直)하고 신후(信厚)함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행동을 절제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전투에 나아가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했으니, 진도 싸움과 일본 정벌 등이 그 대략이다. 그 뒤로 내외손들의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 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내의 서쪽 능동에 있고, 신도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웠다. 세월이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주1. 禮生-문온공 현손)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의 현감이 되어, 묘갈을 세워 표식하였는데, 이제는 이 묘갈이 깨어지고 부러져 버렸다. 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공의 묘소임을 알 수 있겠는가?

 참봉 김기(주2. 金圻-광산인)와 생원 김평(주3. 金坪-광산인)은 외 후손들로 묘 아래에서 살았는데, 후손인 참봉 경건(慶建)과 더불어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이 다른 돌로 바꾸어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또한 봉식(封植)을 더하고자 하며 내게 찾아와 말하였다. 나는 공으로부터 어머니의 성으로 13대 후손이 되어 일찍이 공의 묘소에 참배하였고 비석을 세우는 데 재물을 도왔다. 이에  그 대강을 기록하도다.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大丘都護府使 巡察使 李某志(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대구부 도호부사 순찰사 이모(李時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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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김예생(金禮生) : 본관 안동. 문온공의 현손(문온공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 사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함.


주2. 김기(金圻) : 본은 광산.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기(圻), 자는 지숙(止叔)이다. 참된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하였고, 큰형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였으며, 깨끗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고, 집안 사람들의 가업을 일삼지 않았다. 수석 사이에 서실을 짓고서 북애(北厓)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경사를 두루 보면서 배고픔을 참았으며, 문을 닫고 죽조차 거의 계속 먹지 못하였으나 그곳에 처함에 편안한 듯하였다. 늘그막에 이르러 참봉에 제수되니 왕명을 받고서 드디어 돌아왔다. 57세에 이르러 졸하니 친구들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 했다. 대암(大菴)은 현풍(玄風)에 산다. 학행(學行)으로 관리의 추천에 응하여 정랑을 지냈다. - 국역 선성지 165쪽

 

주3. 김평(金坪) : 김부신(金富信)의 아들. 성품이 독실하여 일찍 사림의 총망을 입었다. 삼도(三道)의 소수(疎首)가 되어 오현(五賢)의 문묘 배향을 청한 적이 있다. 호는 극재(克齋). - 국역 선성지 226쪽

 

*현 신묘비문의 추가 기록 내용

1)후면 맨 끝 묘비문, 찬자 이시발 다음의 추가 기록 내용

  宣務郞 前行濟用監 參奉 曺友仁 書(선무랑 전 행 제용감 참봉 조우인 서)

  皇明 萬曆三十年 壬寅 二月 日 立(황명 만력 30년(1602. 선조 35) 2월 립)


2)묘비 우측면의 추가 기록 내용

단기 4299년(서기 1966년) 병오 2월

오은공(안렴사공 휘 사렴) 18대손 사옥(思玉)이 구갈문에 의거하여 쓰다.

사촌, 소산(문중)에서 구갈을 세웠고, 오은공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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