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 전기> 원고 자료(3)-충렬공 묘지문 분석(국역문-수정본)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8-05-15 08:05 조회1,502회 댓글0건

본문

무릇 천하(天下)에서 존경(尊敬)을 받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덕(德)이요, 둘은 수(齒=壽)요, 셋은 벼슬(爵)이니 군자(君子)가 처세(處世)함에 그 하나 둘을 얻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그 셋을 다 얻을 수 있겠는가? 그 세 가지를 결(缺)함이 없는 분은 오직 우리 상락공(上洛公)뿐이다.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諱)는 방경(方慶)이니 영가군(永嘉郡)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사호(司戶) 벼슬을 지내신 의화(義和)로 증 검교 군기감(贈檢校軍器監)이시고, 조(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暑丞兼直史館)을 지내신 민성(敏成)으로 증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贈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이시고, 고(考)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官修撰官知制誥)이신 효인(孝仁)으로 증 금자광록대부 중서령(贈金紫光祿大夫中書令)이시니, 모두 공(公)으로 인(因)하여 추봉(追封)된 것이다. 비(妣)는 원흥진부사낭장(元興鎭副使郎將) 김해부 송기(金海府宋耆)의 따님이시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근면(勤勉)하시며, 공손(恭遜)하시고 검소(儉素)하시며, 신의(信義)있고 후덕(厚德)하시며, 과묵(寡默)하고 엄숙(嚴肅)하시며, 비록 무관(武官)으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재간(才幹)이 능(能)하시어 장군(將軍)으로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셨다. 또 어사중승(御使中丞)을 겸(兼)하시고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으로서 지각문사(知閤文事)와 지어사대사(知御使臺事)를 지내시고, 어사대부(御使大夫)와 대각(臺閣)을 역임(歷任)하시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매사를 결단(決斷)함에 있어 신명(神明)하였으며 늠름(凜凜)하고 엄숙(嚴肅)한 기풍(氣風)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서북(西北)지방을 여러 번 진압(鎭壓)하시고 은혜(恩惠)와 위엄(威嚴)을 병용(倂用)하니 그 지방(地方)의 민요(民謠)는 지금까지도 공(公)을 사모(思慕)하고 있다.

국가(國家)가 경오년(庚午=1270)에 이르러 강화(江華)에서 다시 송경(宋京)으로 나오자 역신배(逆臣輩)들이 난(亂)을 일으켜 남하(南下)하니 공(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진도(珍島)를 포위(包圍)하고 익년(翌年) 5월까지 대전(大戰)을 15차례에 걸쳐 치르고 진도의 적들을 평정(平定)하여 마침내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중서시랑 평장사 판리부사 대자대보(金紫光祿大夫守大尉中書侍朗平章事判吏部事大子大保)를 배명(拜命)하였다. 이 싸움에서 도망(逃亡)한 적도(賊徒)들이 다시 탐라(耽羅)로 들어가 멀고 험함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자 또 공(公)을 행영중군 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를 삼아 계유(癸酉=1273) 4월 28일에 전함(戰艦)을 이끌고 큰 바다를 건너 적진(賊陣)을 소탕(掃蕩)하니 마치 큰 산(山)이 계란(鷄卵)을 누르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소생(蘇生)하는 희망(希望)이 보였다.

원조(元朝)에서 청(請)하여 공을 침전(寢殿)에 모시고 가곡(歌曲)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위로(慰勞)하고 수대사 개부의 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판어사대사(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鑄(柱)國判御史臺事)를 봉(封)하였다. 그 해에 원제(元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초청(招請)하여 광한전(廣寒殿)의 승상서열(丞相序列)에 앉히고 대연(大宴)을 베풀고 친히 탁상(卓上)의 진미(珍味)를 주시고 금부(金符), 금안장(金鞍), 백은정(白銀鋌)과 많은 폐백(幣帛)을 상(賞)으로 내리시니 천하(天下)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삼한(三韓)에도 인물(人物)이 있음을 가히 알게 되었다. 다시 동정(東征)의 명(命)을 받고 갑술(甲戌=1274)년에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하여 포로(捕虜)와 참수(斬首)한 자가 매우 많았다.

몇 해 후 기묘(己卯=1279)년에 두 번째 글을 올려 퇴직(退職)을 원하였으나 상왕(上王)께서는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어 간곡(懇曲)히 말하기를 "내가 경(卿)에게 궤장(机杖)을 주고 싶었으나 시국(時局)이 다난(多難)한 때이므로 예의(禮儀)를 갖추지 못하니 내 마음이 불안(不安)하노라, 청(請)하니 경(卿)이 다시 일어나 일을 보아 달라"고 하니 공(公)은 퇴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진(庚辰-1280)년 겨울에 원경(元京)에 들어가니 원제(元帝)는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를 제수(除授)하였다.

신사(辛巳)년 여름에 또 일본을 정벌하러 들어갔는데 남송군(南宋軍) 도착(到着) 시기(時期)가 삼개월이나 늦어짐으로 인하여 전함(戰艦)은 부패(腐敗)하고 질병(疾病)이 발생(發生)하자 원(元)나라 군사들이 매양 군대(軍隊)를 철수(撤收)하여 돌아가기를 권유(勸誘)하였으나 공(公)은 불가(不可)하다고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여러 번 전쟁(戰爭)을 치른 후에 부득이 환국(還國)하였다.

계미(癸未1283)년에 또다시 소장(疏章)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간청(懇請)하니 왕은 부득이하여 삼한벽상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中重大匡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 봉(封)하고 이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께서 마음속으로 미안(未安)하게 생각하여 병신(丙申=1296)년 겨울에 또 관작(官爵)을 상락공(上洛公)으로 가봉(加封)하고 식읍(食邑) 일천호를 봉하였으며 실봉(實封)은 삼백호(三百戶)였다.

공(公)께서 재직(在職)시에 항상(恒常) 밤에는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시고 이내 수레에 오르시기를 한결같이 하였으며, 오직 나라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항상(恒常) 염려(念慮)하셨다.

대덕4년(大德4년=1300년) 8월 16일에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백목동(栢木洞) 앵계리(鸚溪里)에서 돌아가시어 9월 초3일에 예안현(禮安縣) 서쪽 산록(山麓)에 유교(遺敎)에 따라 안장(安葬)하였다.

아! 슬프다. 난(難)을 구원(救援)하고 백성(百姓)을 구제(救濟)하고 나라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덕(德)이 그 하나요, 연세 89세에 돌아가시니 수(壽) 또한 하나요, 상국[元]의 도원수(上國都元帥)로 작(爵)을 더 봉(封)하였으니 벼슬이 또 하나이다. 세 가지를 다 구비(具備)하고 결함이 없는 것은 대개 사실(事實)대로 기록(記錄)할 뿐이오, 과장해서 찬미(讚美)함이 아니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기거랑지제고(起居郞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으로서 삼남 삼녀를 나셨으니 장자 선(小宣)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將軍)을 지내시고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차남 흔(小斤)은 관고려군 만호 진국상장군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管高麗軍萬戶鎭國上將軍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將軍)이시며, 삼남 순(恂)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密直司副使判秘書寺事文翰學士)이시고 장녀는 참지정사 조계순(參知政事 趙季恂)의 2자(二子) 변(小卞)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변(小卞)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이시다. 둘째따님은 지첨의부사 김광원(知僉議府事 金光遠)의 장남(長男)인 조현대부 신호위 보승장군(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 김원충(金元沖)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通禮門事) 권윤명(權允明)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두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通禮門祗候) 채의(蔡宜)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여러 자손(子孫)들이 계속(繼續) 줄을 잇고 또한 창달(暢達)하니 난초(蘭草)를 꽂고, 옥(玉)을 꽂듯이 문호(門戶)에 광채(光彩)가 빛났다. 공(公)께서 연세 90이 되셔도 홍안(紅顔)의 소년(少年)같았고, 손자(孫子)의 손자(孫子)를 생전(生前)에 보셨으니 이는 또한 특이(特異)한 일이로다.

무릇 전쟁(戰爭)을 할 때에도 항상 원(元)나라 군마(軍馬)와 더불어 출입(出入) 응대(應對)함에 있어서 오로지 법(法)에 의하여 처리(處理)하였으며, 비록 온화(溫和)하면서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비록 항거(抗拒)하여도 노(怒)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면 삶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하나하나의 공업이 모두 녹권(錄券)과 국사(國史)에 널리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仔細)히 말하지 않고 다만 대강(大綱)만 기록(記錄)하노라. 나는 과갈(瓜葛)의 친분(親分)도 있고, 또 특별(特別)히 알아주시고 대우(待遇)를 받은 자(者)이며, 또 사자(嗣子)이신 상국(相國=나라의 재상. 3子 恂)의 간청(懇請)도 있으므로 해서 삼가 붓을 잡고 명(銘)을 쓰노라.

명(銘)하기를

큰집이 사람을 가려줌은 오직 기둥과 초석(礎石)이요

추위와 더위가 침노치 못하니 풍우(風雨)도 두렵지 않네

천년가고 만년 가도 무너지지 않으니

높고 높은 우리 충렬공(忠烈公) 주공(周公)보다 위대하시도다.

좌명(佐命)의 공(功)과 정란(定亂)의 책(策)으로

지금까지 삼한(三韓) 백성(百姓) 그 혜택(惠澤) 누리도다

국노(國老)께서 영원(永遠)히 가시니 천지(天地)가 아득하고

사람들은 갈 바 몰라 금석지감(今昔之感) 금치 못하네.

고향(故鄕)의 승지(勝地)에는 송백(松栢)이 가득하고

조상(祖上)님 영혼(靈魂) 있는 곳 근처 길지(吉地)에 유택(幽宅) 정했네

유원(遺願)이 분명(分明)하니 다시 무엇을 택(擇)하리오

공 홀로 편안하지 않으시니 그 자손(子孫) 음덕(蔭德) 크게 입으리라

대덕(大德) 4년(1300년) 경자(庚子) 9월

전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前 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 이 진(李瑨) 지음(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