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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사 07년 추향과 16년의 회고(10-끝) : 제16회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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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4-05 07:58 조회1,88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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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어 모두 사당에 다시 앉아 제16회 정기총회 행사를 가졌다. 총무인 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개회사-경과보고-회장님인사-전년도 총회 의결사항 보고-금년도 주요 활동과 행사 보고-감사보고(태호 감사)-결산보고-안건 상정과 토의 및 의결-신임 임원 선출-기타사항 의결-문중역사 자료 학습(제3회-호칭과 항렬자에 대하여)-공지사항 전달(취묵당 문화재 지정, 하담 신도비 문화재 지정 진행과정 소개, 주요 시제일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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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두응)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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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총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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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태호) 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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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후 기념촬영>


 이어 제6대 임원 개편이 있었다. 회장으로 영회(양덕공파)님이 선출되었다. 문중회 창설 초기에 총무직을 맡으신 분이다. 비안공 문중 회장은 충익공파와 양덕공파가 번갈아 맡기로 묵계(默契) 되어 있다. 감사는 규성(충익공파)님이 선출되었다. 부회장은 각파에서 2명 씩 추천하기로 되어 있어 좌랑공파는 유임되어 진응, 용달님이, 양덕공파는 태현, 태호님이, 충익공파는 규동, 태진님이 위촉되었다. 나는 오랫동안의 총무직을 면직시켜 달라고 요청드려 총무는 부총무였던 상석대부님이 맡기로 했다. 나는 일을 계속 맡아 달라는 주문에 따라 상임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점심식사는 마당 잔디밭 천막 아래에서 정담(情談)과 함께 진행되었다. 천막 2개조는 3년 전에 회장단에서 기증한 것이고, 야외 의자와 접이식 식탁은 상석대부님이 금년에 기증한 것이다. 모두 감사한 맘으로 사용했다. 작년까지는 식사 후 개인 봉송(奉送)을 싸드렸는데 금년부터는 생략하기로 했다. 시제 음식량도 줄었고 봉송 싸는 일손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단체 촬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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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

식사를 마치자 곧 성묘를 갔다. 이번엔 모두 괴산읍 능촌리로 갔다. 새로 조성한 개향산(開香山) 묘원 아래의 계단 입구에는 <柏峴墓苑>(백현묘원)이란 표석이 새로 세워져 있었다. 개향산을 바라 보니 정말로 잣나무가 많았다. 옛날엔 이 고개에 방앗간(연자방아)이 있어서 마을 이름도 방아재라 불렸던 곳이다.

 작년에 새로 조성한 묘역엔 새로 돋은 잔디가 더욱 보기 좋았다. 맨 위 참판공(휘 彦默)부터 영상공(휘 錫), 비안공(휘 仁甲) 묘소를 순서대로 참배해 내려왔다. 참배하는 사이 상천대부님과 나는 간단한 해설을 덧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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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 능촌리 묘소(참판공, 영상공) 참배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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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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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공 묘소 참배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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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리 백현 능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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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능원 표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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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리 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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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신축한 능촌리 관리사옥>


 안주공 묘소와 하담신도비 앞을 지나 충익공묘소, 합천공 묘소를 참배한 다음 일행은 이번에 문화재로 새로 지정된 취묵당(醉默堂)으로 갔다. 유유히 강물(괴강)을 바라보며 충민사 옆 언덕 위에서 한 마리 학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이 서 있는 절경(絶景)의 정자(亭子)였다. 나는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취묵당>의 현판이 없어진 구전담(口傳談),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는 시 <용호>(龍湖) 등을 해설하였다. 그런데 주련 한 구가 없어져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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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공(휘 번)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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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공(휘 번) 묘소에서 10대손 상석대부님의 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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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공(휘 번)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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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공 묘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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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공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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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홍수로 계단이 일부 무너져 상석님이 직접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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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리에 있는 연천공(휘 가행) 영정각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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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공 영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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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익공(휘 시양) 묘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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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익공(휘 시양)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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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묵당에서>

 

 

   용호(龍湖)-용산 앞의 한강을 말함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 가을 산엔 소낙비가 들이친다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없어진 주련 부분)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 어부는 급히 뱃머리 돌리네


4. 시제를 마치고

 이제 모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취묵당 답사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능촌리 충익공 신도비 앞에서 내년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세덕사로 돌아와 아버님과 뒷정리를 하고 난 뒤 서울로 향했다. 빨리 서둘렀으나 벌써 4시이다.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함께 한 상석대부와 함께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서울로 향했다. 단풍 관광 차량들과 합쳐 상행길은 고생 좀 되리라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택했다. 음성-일죽-양지-용인-분당-성남으로 상경하는 도로는 나의 비로(秘路)였다. 상석대부와는 저녁 식사도 함께 못하고 용인쯤에서 헤어졌다. 이번에 고생이 참 많으셨다.

 서울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3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고속도로보단 나았으리라. 괴산의 아버님께 도착 전화를 드리고 나서 저녁 식사 후 다리를 펴니 곧 잠이 쏟아져 내렸다.

 이튿날 각 지방의 종친님들에게 도착 안부전화를 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해 상경하시는 분들은 모두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구, 신회장님께 행사 뒷마무리가 잘 끝났음과 전 종친들이 무사히 귀가했음을 전화 드렸다. 또 오늘 불참하신 종친들께서 통장으로 보내온 향촉비 내용을 정리하고 그 분들께도 감사의 전화를 했다. 행사의 모든 내용을 일지에 기록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또 홀기와 축문을 수정하고 코팅도 다시 했다.

 한 일이 끝나면 쉴 새 없이 새로운 일과 행사들이 앞을 막아선다. 앞으로는 젊은이들과 내자(內子)분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 행사를 벌이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관리사옥 신축문제에 대한 장단기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내년부터 위탁할 제수 전문 업체도 결정해야 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사당 청소 및 제례행사도 이젠 문중회 일로 삼아 담당자를 정해야 한다. 여름에는 친목 행사를 겸해 독축법, 창홀법 등의 제례 예행연습과 문중 역사 연수 실시, 문중의 장단기 중요 사업 계획 등도 수립해야 하리라. 그동안 준비해 온 <세덕사> 책자 발간도 서둘러야 했다. 비안공 묘소 정비 사업에 대한 구체 계획도 수립해야 하고 여러 묘소들의 불량한 잔디 관리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끊임없이 문중회와 관련한 사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무직을 마치면서 그동안의 문중회 경과과정을 겸한 세덕사 시제 봉행기를 작성하기로 했다. 16년이 지난 오늘이 있기까지 본 문중회를 위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애쓰신 전 현직 회장님들과 부회장님들, 그리고 감사 및 임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린다. 님들의 높은 철학과 숭조정신, 헌신적 활동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문중역사에 기록되어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큰 원동력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나와 앞으로의 신세대들은 본 문중회가 유지 발전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임을 굳게 다짐하고 또 믿는다.

        2007년 12월 2일 호산재(湖山齋)에서 金恒鏞    (끝)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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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년 세향의 역사와 세덕사의 변화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제학공파 문중의 숭조 정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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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재된 내용 모두 잘 읽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 儒家의 숭고한 행사를 현대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한편의 드라마요 서사시였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