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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사 07년 추향과 16년의 회고(2) : 92년 낙성식과 첫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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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3-12 10:27 조회1,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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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고(刻苦) 끝에 재실은 1년만인 1991년에 완성되었고, 사당은 이듬해인 1992년 초가을에 완성되었다. 총 공사비 7500만원이 들었다. 아버님의 끈질긴 집념과 정열의 소산(所産)이었다.

 1992년 7월, 완성된 괴산 재실에서 부친과 좌랑공(휘 時訓)대표 효식(涍植)님, 충익공(휘 時讓)대표 상천(相天)님이 모여 문중회 구성을 위한 발기 회의를 가졌다. 모두 대찬성이었다. 나는 곧 문중회 조직을 위한 구체 작업을 서둘렀다. 제일 먼저 종친들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족보(제학공파보. 1990년 간)를 기초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종친들의 주소를 수소문했다. 전화에 매달린 지 3개월 만에 250여 명의 주소를 확보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문중회 조직과 시제 봉행을 알리는 우편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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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 총회 후>

 

 이 해 11월 15일 11시, 드디어 낙성식과 함께 첫 제례가 있었다. 이 날 총 48명(종친-19명, 근친-4명, 지역 유림-25명)의 참예 및 축하객이 모였다. 큰 감동으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의식은 ‘개회사-선조님에 대한 묵념-경과보고-종손인사-축사-현판 개봉식-위패봉안’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학공파 원로이신 상철대부님(한학자. 1988년 한중일 한시백일장 장원. 생원공 휘 壽眞 15대손, 1918-2002)께서는 축사를 통해 ‘전통이란 역사 진행과정에서 각 시대의 환경에 따라 발전적으로 변하는 것이며, 제례의식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 뒤 세덕사 창건(創建)에 대해 큰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으셨다. 뒤이어 현판 개봉식(開封式)을 한 뒤 위패(位牌) 봉안(奉安)을 했고 이어 첫 시제를 봉행하였다. 이 날은 양덕공(휘 時說)과 그 이하 후손 9위에 대한 시제를 봉행하였다. 시제 봉행 후 정식으로 문중회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 때 제1대 문중회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명식(좌), 부회장-태섭(양), 총무-영회(양), (  )는 약호로 좌-좌랑공파, 양-양덕공파, 충-충익공파) 그리고 회칙을 제정하고 통과시켜 문중회 조직을 마쳤다.

 이날 제수와 음식은 우리 집 전식구(모친, 며느리, 출가한 누님과 여동생들)가 총동원되어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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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년 낙성식 축사-김상철 제학공파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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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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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 개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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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년 첫 시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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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제 제수 진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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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년 첫 시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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