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3) 나의 소원은 ... 백범 김구선생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8-03-12 09:53 조회1,655회 댓글0건 이전글 다음글 수정 삭제 목록 본문 제목 :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3) 나의 소원은 ... 백범 김구선생 작성자 : 솔내영환 • 조회수 : 21 2006-08-25 09:34:00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나의 소원은 김 구 김구(金九) [백범일지]는 1947년 그의 아들 신(信)이 초판본을 펴낸이래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이며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거약할 수 없어 유서 대신으로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기록한 만큼 비장감이 넘치는 감동을 준다. 상.하편과 말미에 수록된 [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범(白凡) 김 구(金九:1876-1949)라는 이름을 접하면 대한독립과 통일정부를 연상케 된다. 그 까닭은 바로 그의 삶과 행동이 철저하게 이 두 가지 일에 결부되어 있었고 또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끈기와 집념을 불태우다가 비명에 죽었기 때문이리라. 백범은 의사와 열사, 정치가와 혁명가의 행동과 신념을 보였으나 끝내 이 모든 이름을 아우르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남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굵게 세 단계로 나눌 수가 있다. 백범은 황해도 해주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탓인지 19세 때에는 동학접주로 황해도 일대의 포수를 이끌고 황해감영의 공격에 나서서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본명인 김 창수(金昌洙)가 일제에 알려졌고 그 후 계속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줄기차게 의병항쟁에 나서기도 했다. 교육-계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 장교를 살해하기도 하고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기도 하고 탈옥하여 중이 되기도 한다. 백범은 20대에 열혈청년의 기개를 한껏 과시했다. 백범의 나이 30에 접어들자 나라는 더욱 기울어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졌는데 이때 그는 상동교회의 비밀집회에 참석하여 이 회영, 이 동녕 등의 지사를 만난다. 이어 기독교계 인물중심으로 신민회가 창립되었을 적에 여기에 가담하여 황해도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때 양 기택, 안 창호, 이 동휘 등의 지도자를 알게 된다. 이런 속에서 체포되어 4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농감(農監)이 되어 3년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이때의 7년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조용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생애의 첫 시기가 된다. 임시정부의 파수꾼 1919년 민족의 거대한 힘을 보았다. 그는 15명의 동지를 이끌고 상해의 임시정부청사를 찾아들었다. 이때 그의 동지 안창호가 내무총장을 맡고 있었는데 백범은 그에게 “나는 실력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청소를 할 적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번 우리나라 정부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으니 임시정부의 정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직제에도 없는 경무국장이 되어 그 후 약 25년간 임시정부 주인이 되게 했던 것이다. 백범은 5년간 문지기 노릇을 했다. 처음 임시정부가 흥청망청하면서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 적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켰고 때로는 밀정을 가려내는 심문관 노릇도 하였다. 임시정부에 자금줄도 끊어지고 많은 인사들이 흩어져간 뒤에 내무총장을 맡아 입각하였던 것이다. 이어 임시정부가 계속 분열과 혼동을 보이자 그 돌파구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없애고 국무령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몇 사람의 국무령을 거친 뒤 1926년 마침내 백범이 국무령에 앉았다. 백범이 4개월 정도 이 일을 보았을 뿐인데 최고지도자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고, 연이어 주석제로 바뀌었을 적에 내무장, 주석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고 만주사변과 만보산(萬寶山)사건이 터져 중국 사람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임시 정부활동이 부진하기만 했다. 특히 계급혁명을 들고 나와 임시정부 중심세력과 이념적 갈등을 빚고 있던 공산계열과 그 지원자였던 소련의 볼세비키정권에 대해 백범은 증오심과 적대감마져 보이며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임시정부의 부진을 메워 특수공작을 결행할 수 있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백범 주도로 이봉창의사가 일왕(日王)에 폭탄을 던진 의거와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으로 일군 수뇌부를 제거한 의거가 일어났다. 이 두 사건은 백범의 존재와 임시정부의 실체를 널리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었고 중국군관학교의 한국인 교육에도 협조적이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의 반일 열기가 가속되고 있었다. 이럴 적에 중국관내의 민족해방운동단체를 결집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나 1932년 김 규식, 김 두봉(金枓奉)등에 의해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국독립당, 조선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의 간부가 참여하였다. 이 동맹이 구체적 활동이 없자 1934년 완전한 대한단결체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벌어져 위의 네 정당을 포함, 대동독립당 등이 해체하여 들어오고 중국과 미주의 교민단체까지 규합하여 민족혁명당을 발족시켰다. 민족혁명당을 민족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조 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三均主義) 곧 민족의 자주독립. 민주공화국의 건립. 평등의 경제제도의 건립에 그 이념적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백범과 그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이 두 가지 일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가담치 않았다. 그 까닭은 혁명운동을 벌일 적에 역량결집보다 투쟁이 중시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하였다. 이런 노선을 견지하기 위함일지 백범은 장 개석을 만나 협조를 얻어내기도 하고 민족주의 우파의 역량을 확대하여 새로운 한국국민당을 결성키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항일운동에 새로이 연합체의 결성을 도모하여 그 대표자회의를 열었는데 조선혁명당계 당원인 이 운한(李雲漢)이 돌입하여 권총으로 회의장에서 저격하였다. 그리하여 백범은 심장 옆에 탄환을 맞았으나 용케 살아났는데, 이 탄환은 평생 그의 몸에 박혀 있어야 했다. 이때 우파는 일단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백범은 임시정부를 궁벽한 중경으로 옮기고 그전과는 달이 좌우합작을 모색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의 합작모색은 그의 운동노선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완전한 독립, 민족의 통일 백범은 일본군에 쫒겨 다니면서 광복군을 조직하기도 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하기도 하고 미국 OSS와 합작으로 광복군 특공대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을 계획하였으나 끝내 결행하지 못했다. 그의 통한은 바로 광복군을 조국땅에 상륙시키지 못한 것이요, 또 임시정부가 승전국 정부가 되어 귀국하지 못한 것이다. 백범은 임시정부에 정통성이 부여되기를 바랐으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고 개인자격으로 만강의 비분을 안고 김 규식, 이 시영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제부터 새로운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백범은 해방조국에서 크게 다음 몇 가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첫째는 임정의 법통성(法統性) 확인이었다.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들어왔으나 한때 미군정을 접수하려 들어 점령군사령관을 놀라게 만들었고 점령군사령부는 임정요인을 처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백범은 처음 한민당계가 임정이 정부의 기능을 맡아 줄 것을 건의하는 등에 고무되었으나 인공계와 공산당계의 거부로 좌절되자, “다시 말하면 우리 임시정부는 결코 모일계급(某一階級), 모일파(某一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족단결의 정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민족이 총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있습니다. ”(임시정부개선 환영대회 답사)라고 말했다. 이런 타협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입정은 여러 사정에 의해 그 법통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둘째는 신탁통치의 반대운동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를 일정기간 위임통치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백범은 즉각 반탁을 들고 나왔다. 백범는 반탁의 지도요령을 발표하였는데 반탁이 독립운동으로 재출발한 것과 신탁안이 완전취소되고 자주독립이 될 때까지 반대운동을 계속하자고 강조하였다. 공산당계와 중도좌파계가 탄착을 벌인 적에 이점에서만은 이승만과 완전히 뜻을 같이 했던 것이다. 셋째는 통일정부 수립운동이었다. 유엔에서 남한만의 촌선거로 군정수립을 결정하자,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를 환영하였 으나 백범은 “나는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 단독선거도 북한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남북통일에 최후까지 조력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반대운동을 펴기 위해 홍 명희, 김 창숙 등과도 손잡았고 끝내 그 실현성이 없자 김 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넘어갔다. 백범은 김 일성, 김 두봉과 만났으나 그의 뜻대로 될 리가 없었고, 끝내 그의 계열이 참여치 않은 속에서 총선거가 이루어져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백범은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회한의 나날을 보내던 중 한 암살가의 손에 쓰러졌다. 오늘에 되살아나는 백범 백범은 중국 땅에서도 순수하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탓으로 좌우합작이나 통일전선에 미온적이거나 거부의 태도를 보였는데, 해방공간에서는 때로 민족주의우파의 단결을 모색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우합작을 도모하기도 하다가 끝내 김일성과도 만났던 것이다. 이런 행동이 그의 이상 탓 만이겠는가. 오늘날엔 통일의 새 기운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통일정부수립 노력에 새롭게 역사적 의의가 주어지고 있다. 이런 탓인지 대통령후보 중 다수가 존경하는 인물로 그를 꼽고 있다.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이 이화 지음 김 영환 옮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수정 삭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