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정기산행(궁궐답사) 보고_02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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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8-02-28 20:37 조회3,769회 댓글5건본문
48회 정기산행(궁궐답사)보고_02 종묘
▲ 종묘 하마비(宗廟 下馬碑) - 종묘는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므로, 종묘 하마비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 종묘 외대문(정문) -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에서는 조선 왕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종묘의 건축물들은 600여년 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제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 종묘건축은 고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기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꼭 필요한 장식만 존재하고 단청(丹靑)도 색채와 문양 사용을 극히 절제하였다. 묘정(廟庭)을 구성하는 건축요소들 역시 극히 간략하고 단촐하다. 신로(神路),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다. 이러한 구성,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은 종묘 공간을 더욱 존엄하게 한다.
▲ 종묘의 궁궐지킴이 사무실에서 환담하는 답사팀.
▲ 종묘의 박석 - 외대문을 지나 종묘 안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박석(薄石)이 깔린 길이 중앙과 좌, 우로 구분되어 뻗어있다. 이 길을 삼도(三道)라 한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神)을 위한 길이라 하여 신향로(神香路)라고 부르며, 우측의 길은 임금님을 위한 어로(御路), 좌측의 길은 세자로(世子路)이다.
▲ 궁궐지킴이 고문준 선생. 어린이를 위한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뿌리 종묘"를 출간한 종묘 전문가이다.
▲ 종묘 연지 - 네모난 연못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잇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생각해서 이다. 섬가운데에 정자가 없고 향나무가 심어져있는데 향나무는 제례 때 사용하는 향을 의미한다. 종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곳이 아니라 제사 영역이므로 연못에 물고기와 연꽃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 망료루(望廟樓).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는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으며 누마루쪽만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 공민왕 사당 - 종묘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의 사당이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 가 조선을 세우고 종묘를 처음 짓게 되었는데 종묘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날 난데 없이 바람이 불더니 족자가 한 점 떨어졌다.공사하는 이들이 다가가 주워 살펴보니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태조는 종묘 한 쪽에 터를 내어 조그만 신당을 짓고 그곳에 공민왕의 영정과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를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 군사 구데타로 집권을 한 태조가 고려의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한 궁여지책 이 아니었을까.
▲ 사당 안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 진정임 고문준 선생. 두 분이 입고 있는 옷이 궁궐지킴이의 겨울 유니폼이다.
▲ 종묘 어숙실은 왕이 목욕하고 재계하며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재궁, 어재실이라고도 한다. 담정과 정문, 동서 협문으로 싸인 어숙실 일곽은 뜰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서쪽에 건물이 있다. 가운데 건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어제실로 왕이 머물던 곳이며, 오른쪽 건물이 세자가 머물렀던 곳으로 세자재실, 왼쪽 건물은 어목욕청으로 제사 전 목욕하는 곳이다
▲ 어숙실에서 정전으로 나가는 서협문. 문틀의 무늬 당초문양(唐草)이다.
▲ 제정 -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이다.
▲ 제정 우물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웬일인지 이날은 물이 말라 있었다.
▲ 뒤에 보이는 건물이 전사청이며 앞의 돌이 덮힌 곳이 천막단이다. 전사청에서 준비한 제례 음식을 정전에 올리기 전에 천막단에 올려놓고 검사를 하였다.
▲ 정전남문. 혼백이 출입하는 문이다.
▲ 정전(正殿) - 국보 제227호, 정전은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19실에 태조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 왕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단일 목조 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총101m)이며, 전면에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넓은 월대를 조성하여 사묘(祠廟)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 종묘의 정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공신당은 태조를 비롯하여 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왕들의 공신 중 8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 정전 전면 첫 번째 기둥열은 모두 묘정 쪽으로 틔어있고, 두 번째 기둥열은 각 칸마다 판문이 달려있다. 이 판문을 통하여 신위가 모셔진 건물 내부로 출입할 수 있다. 판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문짝이 약간 뒤틀려 있다. 마치 혼백(魂魄)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듯 하다. 판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있다.
▲ 정전 건물 후면 일곽은 석축단을 쌓은 북계(北階)와 둘레담으로 조성되어있다. 북계에는 일반 건출물 뒤에 설치하는 화계(花階)처럼 꽃나무를 심지 않았다. 경견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북계 뒷편에는 담을 둘렀는데 정전의 위패를 모신 신실 길이만큼 높게 조성하였다. 신실의 길이 만큼 담의 높고 낮음의 차이를 둔 것이다. 또한 정전 전면은 묘정을 향해 틔여 있지만, 후면과 측면은 전벽돌로 막아 놓았다.
▲ 영녕전 입구
▲ 영녕전(永寧殿) - 영녕전은 정전에서 옮겨진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잇는 별묘(別廟)이다. 세종3년(1421)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16실에 왕의 신주 16위, 왕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 영녕전(永寧殿) 후면. 정전의 후면가 다른점은 칸마다 기둥이 드러나게 마감처리 했다는 것이다. 구석에 축문을 태우던 망료위가 보인다.
▲ 악공청 - 종묘 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정전과 영녕전에 인접해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인 대기실이라 할까.
▲ 악공청에서 바라본 영녕전 전경. 영녕전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장소라는 고문준 선생의 설명이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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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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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답사 후기가 늦어진것이 오히려 복습의 기회를 주어 다시한번 종묘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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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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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늦은 후기가 더욱 새롭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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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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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감사합니다.
이 날 해설사 두 분 선생님 덕에 종묘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고 배웠습니다.
김영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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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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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멀리 토론토에서 보는 안김홈피가 더욱 의미있네요.참석못한 12월의 정기산행을 앉아서 감상하니 죄송하네요.발용대부님!!! 추운 날씨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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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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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대장님
카나다 잘 도착했군요.
외국에서 보는 우리 홈피, 정말 반갑더라구요
한글자판이 있어 다행이십니다.
잘 있다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