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 묘소 성역화 사업(백범김구) 와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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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작성일08-02-26 10:50 조회1,732회 댓글4건본문
1. 白凡金九參拜碑
겨례의 큰 스승이신 白凡 金九(1876-1949)先生은 安東金氏 文英公(諱 恂)의 23代孫이다 1945년 8월 고생 끝에 민족해방을 맞이하였고 그해 11월에 中國 上海를 거쳐 還國하셨다 國事의 기틀을 바로 잡는 바쁜 와중에서도 조상을 찾아 崇祖하는 일을 잊지 않으셨으니 이듬해인 1946년 4월5일 한식일(節祀)에 검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안양 관악산 남향자락 문영공 산소에 참배하러 오셨다 이 때 많은 종인들이 귀국 환영참배를 위해 모였으며 그 자리에서 원활한 정치활동을 위한 기금도 모았으나 先生께서는 '이 돈은 받을 수 없다' 하고 만류하시자 문영공 종회에서는 종답을 더 사들이면서 활성화 되기 시작하였다 先生은 매년 참석하시며 늘 읊었던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의 夜雪 글귀에서 家門의 충효정신은 더욱 빛났다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신 忠孝傳家의 휘호는 五十萬 子孫들의 가슴에 감동적 전률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千秋의 세월에 지켜 가야할 里程標를 후손들에게 주셨다
西紀 二00八年 五月
安東金氏 文英公(諱 恂) 宗中 謹立
안양 문영공(휘 恂) 절사(節祀)를 마치고 (전열 뒤로 3열 중앙에 검은 두루마기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右로 갸우뚱하고 있는 분이 백범 김구 선생)
2 (수정문)
상석님의 지적사항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다음과 같이 수정해 보았습니다.
後 記
公께서 文武首長으로 活躍하시다 歿한지 六八七年의 歲月이 흘렀으니 어찌 迂餘曲折이 없을 수 있으랴 그러나 不幸中 多幸인 것은 實存한 墓誌銘을 바탕으로 聖域化 사업을 할 수 있음이었다 專門家 後孫들이 모여 文獻.文集을 중심으로 歷史的 考察과 檢證을 통해 墓碑文을 整理하였으며 高麗末 財相의 墳墓樣式을 綜合하여 外形的 틀도 마련하였다 특히 用事를 主觀한 종중 任員은 不撤晝夜로 計劃하고 推進함에 熱과 誠을 다하였다 聖域化 事業은 하나됨을 보여 주면서 자손 五十萬名이 結集하고 일어서는 힘이며 矜持라 믿어질 뿐이다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기 바라며 翼元公派의 자손중에 白凡 金九와 같은 民族의 큰 스승이나 또는 많은 棟梁들이 나와서 國家와 歷史에 貢獻하기를 懇切히 祈願할 뿐이로다
西紀 二00八年 八月 十五日
文英公(諱 恂) 宗中 後孫一同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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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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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백범 김구선생님의 와비명 감사함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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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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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문영공 묘비문 후기 초고는 어찌 되셨는지요
현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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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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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안동김씨 문영공 (휘 순)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지는군요. 충효를 대대로 이어가는 忠孝傳家 백범 김구선생님의 깊은 뜻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삶의 이정표입니다. 명문가 안동김문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 기립니다. 백범 선생님과 같은 민족의 대들보 역할을 할 큰 스승들이 수없이 나오길 바라겠습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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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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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후기 중 - "他門中의 墓域을 分析 綜合하여~" 를 '고려조(또는 여말) 재상의 분묘양식으로" "'原形復元-이장 전의 사진자료나 실측 또는 기록문서가 없기 때문에 복원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봄'을 目標로~"를 문맥에 맞게 약간 수정요. (그 사이 조금 수정 되었군요)-- '後孫중에는~<익원공 이하 언급 후> 白凡 金九와 같은'으로 하면 어떨까요? 文英公(諱 恂) "宗中 會員一同"이나 "후손일동"이 좋을 듯 합니다. 할아버님의 묘역 석물 하나에도 만세에 부끄럽지 않을 글귀가 남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감히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