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설악산기(登雪嶽山記)12-오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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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2-24 07:31 조회1,911회 댓글1건본문
8시 30분, 하산을 시작했다. 봉정암에서 하산하는 길은 오세암(五歲庵)을 경유하여 영시암(永矢庵)으로 가는 험한 길과 영시암으로 바로 내려가는 편한 길 두 갈래가 있다. 오세암을 꼭 들르고 싶었던 우리들은 험한 길을 택했다. 흰 껍질을 한 자작나무가 많은 길 초입에 ‘이 길은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경사가 급했다.
<설악산의 대표적 야생화>
설악산엔 다람쥐가 참 많다. 그런데 사람을 가까이하는 이놈들이 퍽 귀엽다. 잠시라도 앉아서 쉴라치면 여지없이 주변 가까이에서 맴돌며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른다. 장난삼아 빵과 초콜릿을 던져 주면 잘도 받아먹는다. 장난기가 일어 바로 옆 자리 바위 위에 빵을 여러 조각내어 주-욱 늘어놓고 이놈을 꼬였다. 벌써 주변 여기저기에는 여러 놈들이 정신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난리가 났다. 그런데 가까이 오는 놈은 한 놈뿐이다. 제일 용감하거나 두목인가 보다. 한 조각을 잽싸게 입에 물고는 저만치 도망쳐서 먹는다. 그리곤 곧 다시 왔다. 이번에는 아주 그 자리에 눌러 앉아서 먹어댔다. 이놈이 이젠 신이 났다. 그런데 걱정도 된다. 무슨 탈이 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변이종이라도---.
<빵 먹는 다람쥐>
<길옆 괴이한 모습의 적송>
하산 길은 몹시 험했다. 여러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발을 내딛는 마지막 순간까지 접지점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전문가 죽우의 조언이다. 작년 홍수로 시설물들이 곳곳에 무너져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다. 민첩한 행정력이 아쉬웠다. 오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때론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들이 평상복에 보통 운동화를 신고 올라오신다. 봉정암 신도분들인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한 내가 까닭없이 부끄러웠다.
오르내리는 작은 고개를 수없이 넘고 또 넘었다. 퍽 지루했다. 4시간 만인 12시 30분이 돼서야 오세암(五歲庵)에 도착했다. 암자라고는 하나 꽤 커 보였다. 전면 중앙에는 천진관음전(天眞觀音殿)이 있고 그 앞엔 종각(鐘閣), 좌측으로는 문수동과 보형동, 우측으로는 소원 불법당과 공량간이 있으며, 뒤쪽으로는 잘 지어진 오세동자전, 관유전, 연화동이 있고 더 뒤쪽 좌측으로는 선방(禪房)과 삼성각(三聖閣)이 있었다. 오세암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가 지었는데 그 때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세암 안내도>
<오세동자전>
<천진관음전>
이 오세암에는 암자 이름과 관련된 신비로운 전설이 하나 있다. 어느 겨울날 스님(설정대사)이 5세밖에 안 된 어린 아이 하나만을 암자에 남겨 두고 공양미를 구하러 산을 내려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렸다. 스님은 할 수 없이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 눈이 녹은 뒤에야 돌아오게 된 스님은 아마도 아이는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암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스님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으니 아이는 웃으며 ‘관음세음보살(觀音世音菩薩)님이 먹여 주고 보살펴 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아이로 인해 오세 동자전이 지어졌고 조선 인조(1643년)때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오세암(五歲庵)'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암자는 6. 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은 참선도량으로서 큰 이름을 떨쳤으며 유명한 스님들도 많이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불교 부흥을 꾀했던 보우선사가 기거했었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선생이 한 때 머물렀으며, 근대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스님이 된 곳이라 한다. 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나는 꼭 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 곳 저 곳을 살펴보았다. 만해선사께서는 어디쯤에서 출가(出家)를 결심했고 유심(唯心)을 생각했을까?
관음전을 오르는 돌계단입구 양 옆에는 동물 석상이 퍽 재미있다. 좌측에 는 개 한 마리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앉아 졸고 있고, 우측에는 거북이가 큰 돌을 등에 지고 있는데 게처럼 생긴 앞발을 높이 올리고 좁고 작은 목을 내밀면서 어디론가 열심히 기어가는 고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세암 관리자분의 말씀을 들으니 전혀 딴 이야기다. 좌측의 석상은 당나귀 상으로 최근에 다시 만든 것이며, 우측의 석상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앉아 있는 소의 모습이란다. 오세암을 지을 때 건축 자재를 운반하던 소와 당나귀가 죽자 이를 위해 석상으로 조각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름 없는 어느 석공의 세련되지 않은 조각품 속에 스며 있는 순수함에 왠지 친근한 애정이 갔다. 한참을 보았다.
<관음전 입구 좌측의 당나귀 석상>
<관음전 입구 우측의 소 석상>
영시암에 머물렀던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 삼연 김창흡(金昌翕)선생이 이곳에 와서 이렇게 한 수 시를 남겼다.
到五歲菴 (오세암에 이르러)
自我爲山主 : 내 스스로 산 주인이 되려
頻頻到此菴 : 자주 이 암자에 왔네
方能詞客伴 : 나란히 시인의 짝이 될 만하기에
已厭老禪參 : 이윽고 늙은 선사가 참여했네
聽磬仍呼韻 : 풍경소리 들으며 운자를 부르니
眠雲共倚龕 : 구름과 함께 감실에 기대어 잠드네
淸寒知己在 : 맑고 가난한 내가 있음을 아는지
孤月照松楠 : 외로운 달만 소나무와 녹나무를 비추고 있네
月往西峯寂 : 서녘 산봉우리로 지는 달은 고요하고
東南尙數星 : 동남쪽엔 또 별이 드문드문 하네
巖雲留澹白 : 바위에 걸린 구름은 맑은 흰빛이고
庭栢貯深靑 : 뜰의 잣나무는 짙푸르구나
得友融仁智 : 어질고 지혜로운 벗을 얻어
惟詩發性靈 : 오직 시로써 감성을 드러내네
高林有黃鳥 : 높은 나무의 꾀꼬리
今古所淸聆 : 예나 지금이나 맑은 소리 들려주네
*출전 : 三淵集拾遺卷之九.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후안동김씨).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아들이다. 1673년(현종 14)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친상을 당하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집》·《심양일기 瀋陽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삼연선생이 불의(不義)와 암투(暗鬪), 모함(謀陷)과 살육(殺戮)이 난무하는 모순덩어리의 속세가 싫어 이곳 설악산에 들어와 살며 자연을 벗 삼고 스님과 함께 시를 짓던 곳이다. 암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절 아래 조금 떨어진 길 옆 물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계곡 물위에서 잣 한 송이를 주웠다. 아까 빵을 얻어먹은 다람쥐의 선물인가 보다. 향이 진하다.
오후 2시, 다시 출발이다. 하산길이라 편히 내려가는 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르내리는 길이 전처럼 험하고 힘들었다. 작은 고개들을 수없이 넘고 또 넘었다. 경사는 가팔랐고 길 폭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자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얕잡아 봤던 하산길에 그만 지쳤다. 대상을 업신여겼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평범한 삶의 이치를 체험으로 또 깨우쳤다.
댓글목록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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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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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도량에 얽힌 사연과 묵객들의 발자취, 어느 쪽도 놓치지 않으신 점 글자마다 아로새겨져 있음을 느낍니다.아직 가 보지 못한 구석구석이 더 많지만 오세암에서 바라다 보이는 설악의 비경이 어찌나 절경이었던지 지금도 황홀함을 버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