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봉(南峯)公 김치묘갈(金緻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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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8-02-21 23:45 조회1,603회 댓글0건본문
김치묘갈(金緻墓碣)
공의 성은 김(金)이요, 휘(諱)는 치(緻), 자(字)는 사정(士精)이며 호는 남봉(南峯)이다. 13세조인 고려 상락공(上洛公) 휘 방경(方慶)이 공을 세워 안동(安東)에 채읍을 받았으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11세조인 휘 충갑(忠甲)은 사헌부 지평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니 공의 대고(大考)이다.
첫 부인은 한림(翰林) 김신동(金神童)의 따님으로 휘 시회(時晦)를 낳았다. 정묘년에 급제하여 사필(史筆)을 잡았으나 이름과 지위는 크지 않았으니, 공의 고(考)이다. 재취(再娶)는 내금위 이성춘(李成春)의 따님인데 휘 시각(時覺), 시민(時敏), 시신(時慎), 시진(時進), 시민(時敏)을 낳았다. 학생(學生) 서응문(徐應文)의 따님에게도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진주 판관(晉州判官)으로 있을 때 해구를 만나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겨, 병마절도사에 자급을 올려 제수되었다. 또 적과 큰 전투를 벌여 세 번 패하자 직접 성(城)을 순찰하다가 마침내 날아온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니 공의 양고(養考)이다.
고(考)의 배필은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 양언개(楊彦漑)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정축년(선조 10, 1577년) 7월 7일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체격이 다부지고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정유년(선조 30, 1597년)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었다. 기해년(선조 32, 1599년)에 춘방(春坊) 설서(設書)에서 사서(司書)로 승전하였으며,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사, 헌부 지평을 거쳐 해미 읍재(海美邑宰)로 나가 은덕(恩德)과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이속(吏屬)은 단속되고 백성들은 삼가게 되었다.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다시 옥당(玉堂)과 미원(薇垣)으로 들어갔으며 이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가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 1609년)에 제주 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몇 자 해독 불능--
곧 회복되어 성균관 사예(司藝)와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역임했다. 계축년(광해군 5, 1613년)에 영남 균전사 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조정에 들어가 병조 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를 하였다.
을묘년(광해군 7, 1615년)에 양대부인(養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병조와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와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광해(光海)의 정치가 어지럽고 인륜이 바로서지를 못하여 대비를 폐위하자는 의론이 제기되었다. 공이 한탄하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하고는 드디어 용호(龍湖)에 머물며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며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동래(東萊)는 왜(倭)와 접한 중요한 지역이라 하여 공을 부사로 임명하였으니, 재주와 국량이 뛰어나서일 뿐만이 아니라 폐비론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공은 백성을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을 보듯이 하여 여러 폐단을 없애 주었는데 백성들은 구리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 주었다. 왜(倭)에게 연향(宴餉)의 음식을 대접할 때 정결하게 하였고, 세폐(歲幣)를 바칠 때에도 그 마땅함을 얻어, 왜(倭) 역시 공의 덕에 감복하여 보검과 진기한 기물(器物)을 보내왔다.
을축년(인조 3, 1625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묵은 병이 재발하여 5월 27일 객사(客舍)에서 졸하였으니, 향년이 49세이다. 청안현(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사 지냈다. 정유년(1657, 효종 8)에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공은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깊었으며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고 굉략(宏略)이 출중하였다.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상공(相公)은 공을 도수(都帥)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천거하였는데, 시대의 의론을 따른 것이었다.
부인은 이조 참의 목첨(睦詹)의 따님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득신(得臣)이다. 문과(文科) 장령(掌令)이다. 장령 김성발(金聲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딸 다섯을 낳았다. 장남 천주(天柱)는 학생(學生) 유성하(柳成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둘째는 딸인데 문과 현감(縣監) 최연(崔演)에게 시집가서 2남 2녀를 낳았다. 셋째 천정(天挺)은 진사 이계도(李繼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다. 넷째는 딸인데 현감 이중휘(李重輝)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다섯째 천규(天揆)는 유학(幼學) 이승연(李承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작은집에서 나온 첫째 아들은 득령(得岺)인데 사마(司馬)이며, 둘째 아들은 득성(得成)이며, 셋째 아들은 득평(得平)이다.
아아, 지극한 정에는 글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 다만 서(序)할 뿐이다.
열세(列世)의 방계 자손들이 사실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후인들이 어찌 보겠는가.
아들 통훈대부 행 장악원 정 겸 지제교 득신(得臣) 짓다.
손서(孫壻) 통정대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최연(崔演) 쓰다.
숭정(崇禎) 기원 47년 갑인년(현종 15, 1674년) 9월 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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