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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묘역공사 자문회의(2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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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2-21 09:10 조회1,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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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묘역공사 자문회의 후기>

1. 일시 : 2008. 2. 20(수). 11:00시--14:00시

2. 장소 : 문영공 재실(안양시 관양동 소재. 영모재)

3. 참가자(무순) : 회윤(안-회장), 재광(익-재무), 용주(안-총무)

 * 제학공파 : 상천(제학공파 부회장), 태환(제학공파 이사), 항용,

 * 안렴사공파 : 재홍(안렴사공파 부회장), 태문(안렴사공파 상임부회장), 태선(안렴사공파 이사)

 * 익원공파 : 용대(전 문영공종회 회장)

  이상 10명.

4. 안건

 1)묘비문 확정

   가)각종의 묘비명 번역문(문영공 종회 종사록본, 김익수님본, 김국회님본, 안사연 종합본)의 분석 및 종합, 묘비문 확정

   나)묘비문 전면 대자 확정 및 서예가 선정문제

 2)제평군부인(양천허씨)의 단(壇) 조성관련

   가)문영공과 합묘, 쌍분, 또는 단비만 설치하는 3가지 경우에 대한 협의 결정.

   나)와비에 새길 묘비문(원문-이제현 찬 묘비명) 번역문 확인 및 확정.

 3)일정

   가)08년 3월초 : 회장단 회의 및 이사회 소집, 추경 요구(현 총예산 3천만원에서 약 9백만원 부족)

   나)08년 봄(3월경) : 묘역 공사 시작, 묘지석 확인 작업 실시

   다)08년 봄(4월경) : 문영공 봉분 조성 완성.

   라)08년 9월 경 : 이사회의, 대의원회의 소집- 추경 요구

   마)08년 가을(10월경) : 석물 조성 완료. 고유제 봉행

 

5. 후기

 오늘은 문영공 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문영공 묘역 공사를 위한 자문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회의 안건은 가장 중요한 문영공 묘비문을 확정짓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약 25일 전에 사무국장님(용주님)께서 전 자문위원 여러분에게 본을 달리하는 묘비문 번역문을 우편 배송하여 자가에서 분석 검토하는 기간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별도로 묘비문 관련 회의 자료를 인쇄하여 준비하여 갔습니다. 직장의 일로 잠시 지체되어 회의장엔 약 20분이나 늦었습니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이미 회의는 진행되고 있었고 많은 존경하는 자문위원 여러분께서 와 계셨습니다. 이때 회윤회장님은 문영공 종사록(2006년 문영공 종회 간) 내의 문영공 묘비명 번역문을 읽고 계셨습니다. 나는 죄송하게도 그 도중에 간단히 인사를 올려야 했습니다. 대단히 송구했습니다.

 회장님의 묘비문 낭독이 끝나자 묘비문에 관한 토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준비한 자료를 기초로 각종의 묘비문(안동김씨족보본, 안양문화유적 총람본, 김익수님본, 김국회님본, 안사연본)에 대한 분석 및 이들을 종합한 종합본을 제시하고 한 문장씩 낭독하며 분석, 해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묘지석을 잘못 해독한 글자, 묘비석의 글자를 족보에 싣는 과정에서 誤記된 글자. 그로 인해 오역된 글자 등을 지난 1985년 제가 탁본한 문영공 묘비문 탁본을 전면 벽에 부착해 놓고 합동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몇 글자는 앞으로 묘지석을 발굴한 후 최종 확정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국한문 묘비문으로 제작할 경우 현재와 미래의 가치가 있는 비문 표현 방법, 세로쓰기를 할 경우의 문제, 연대(중국 연호 및 간지년, 서력기원과 단군기원, 왕조년) 표기방법의 문제, 거친 문장에 대한 윤문 방법 및 범위의 문제, 오역된 것에 대한 정정의 문제, 종사록에 빠져 있는 내용(1문단) 확인 등 약 1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열띤 분석과 의견제시, 구체적 방법 논의 등으로 회의는 참으로 진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모인 모든 자문위원들은 문영공의 묘역공사야말로 우리 안김 문중의 약 60-70%를 차지하는 문영공 전 후손들의 자존심과 명예가 달려 있는 상징 의미가 있는 사업이며, 전 종친들의 지식과 지혜가 결집된 총화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며 정성으로 회의에 임하셨습니다.

 약 2시간 30분만에 드디어 묘비석 전면 대자 글자와 측 후면 소자 글자, 제평군부인의 묘비문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시간이 없어 그 외의 나머지 회의 안건은 집행부에 일임하기로 하고 자문회의를 마쳐야 했습니다.

 이에 아래에 이날 발표 되고 확정된 회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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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英公 및 齊平郡夫人 墓碑文 草案

 (2008. 2. 20.   文英公 二十五代孫 金恒鏞 制作)

 

 

1. 文英公 墓碑文

 가. 前面 (大字. 隸書體)

  1)문영공 양위분 합폄(合窆)일 경우

   가)1안 (全 관직명 기록)-45자

(12자) (17자) (16자)

 

  나)2안 (11자 생략 기록)-35자 (선택, 결정 묘비문)

(12자) (11자) (12자)

  

   다)3안 (14자 생략 기록)-31자

(12자) (10자) (9자)

 

<문영공 관직명 조사>

1.중대광(重大匡) : 1308년(충렬왕 34) 종1품으로 제정되었다. 뒤에 벽상삼 한(壁上三韓)의 칭호를 위에 덧붙였다가 1310년에 떼었다. 1356년(공민 왕 5) 폐지하였다가 1362년 다시 제정하고, 1369년 종1품의 하(下)로 하 였다.

 

 *고려시대의 문산계(文散階) : 고려의 위계(位階)제도로서 29계의 문산계를 정했다가 문종때에 5품이상은 이름을 바꾸었고, 1308년(충선왕 즉위)에 비로소 정1품을 두고 正, 從으로 나누어 각 9품계를 두었다.

 

 *1308년(충렬왕34년)

 정1품 : 벽상삼한삼중대광, 삼한 삼중대광

 종1품 : 벽상삼한 중대광

 정2품 : 광정대부(匡靖大夫)

 종2품 : 통헌대부(通憲大夫)

 

 *1310년(충선왕2년)

 정1품 : 삼중대광

 종1품 : 중대광

 정2품 : 상-대광(大匡), 하-정광(正匡)

 종2품 : 상-광정대부(匡靖大夫), 하-봉익대부(奉翊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 고려의 정1품 문산계(文散階).

 1308년(충렬왕 34) 삼중대광을 정1품으로 제정하였고, 뒤에 벽상삼한을 덧붙여서 이루어졌다. 1310년(충선왕 2)에 벽상삼한을 빼고 삼중대광이라 하였으며, 1362년(공민왕 11) 다시 이 명칭으로 고쳤다.

 

 *벽상삼한 : 고려조 문관의 정1품 품계로서 고려조 제25대 충렬왕 때 '삼중 대광' 또는 '벽상삼한'이라 함.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을 '벽상삼한'이라 일컫던 것인데 뒤에 둘을 합하여 '벽상삼한 삼중대광'이라 했으며, 조선조 의 '대광보국 숭록대부'와는 같은 품계입니다.

 

 *문영공께서는 1312년(충선왕4)에 重大匡 상락군에 봉해지심.

 

2.판삼사사(判三司事) : 高麗 三司의 으뜸 벼슬. 종1품. 宰臣이 겸임함. 三 司는 고려시대 국가의 전곡출납, 회계를 담당하던 곳임. 문영공은 1321 년(충숙왕8)에 判三司事(판삼사사)에 봉해짐.

 

3.보문각(寶文閣) : 고려시대 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청. 1116년(예종 11) 예종(睿宗)이 궁궐 안에 설치한 청연각(請讌閣)이 궁중 에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출입과 숙직이 불편하다 하여 같은 해 11월 따 로 설치한 것이다. 관원으로는 제거(提擧) ·동제거(同提擧) ·관구(管句) · 동관구(同管句) 등을 두고, 중추원의 내신(內臣)이 겸직하였다. 후에 대학 사(大學士) 1명을 두었으며 1151년(의종 5) 보문각 내에 문첩소(文牒所)를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보문서(寶文署)로, 1198년 동문원(同文院)으로 개칭되었다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다시 보문각으로 환원되었다. 충렬 왕 이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1420년(세종 2) 수문전(修文殿) ·집현 전과 합하여 집현전에 통합되었다.

 

4.대제학(大提學) :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 둔 정2품 벼슬.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1401년(태종 1)에 대학사(大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 전기에는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세종 2) 에는 집현전(集賢殿)에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 2) 집현전을 홍문관 으로 고쳐 그대로 대제학을 두었다. 대제학은 대개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까지 재임하였다. (고려시대의 해당 관청 및 관직 위계 미상)

 

5. 상호군(上護軍) : 고려·조선 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 정삼품 무반직 (武班職)으로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개칭된 것이다. 상 장군은 고려 전기 이군(二軍) 육위(六衛)에 각각 1명씩 모두 8명이 있으면 서 무반의 최고층을 구성하였다. 고려 후기 상호군으로 개칭된 시기는 불 명확하다.

 

6. 군(君) : 고려, 조선시대 종친이나 신하에게 주던 존호(尊號). 1298년(충 렬왕24)에 관제를 고치면서 종1품의 품계로 정했는데, 1356년(공민왕5)에 신하의 君을 공(公), 후(候), 백(伯)으로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11)에 다 시 종1품이 되었다. *상락(上洛)은 안동의 古地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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