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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평군부인 양천허씨 묘지문 국역문-종합본(교정 및 의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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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2-09 09:17 조회1,545회 댓글3건

본문

 

상기 문영공 묘지문과 같이 비문으로 사용할 경우를 전제하여 종합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현 여러분의 기탄없는 수정과 의견을 바랍니다. (기간은 문영공 묘지문과 같이 2008년 2월 15일까지로 함)

 

齊平郡夫人 陽川許氏 墓誌銘 竝書 (김항용 종합본).

                                           益齋 李齊賢 撰

 

 

내용은 사정상 2008. 4. 2.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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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자 소개 :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댓글목록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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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수정안
夫人의 姓은 許氏이니, 中贊 文敬公 諱 珙의 둘째 따님이시다.
1) 許氏이니 => 許氏니

祖父는 樞密院副使이니 諱는 遂이며, 曾祖는 禮賓少卿이시니 諱는 京이시다. 어머니는 尹氏이시니 政堂文學 文平公 諱 克敏의 따님이시다.
2) 祖父는 樞密院副使이니 => 祖父는 樞密院副使니
3) 어머니는 尹氏이시니 => 어머니는 尹氏니

夫人은 나면서부터 勤實하였으므로 文敬公의 사랑을 받았다.
4) 勤實하였으므로 => 勤實하여

尹氏(모친)의 장삿날이 곧 乙丑日인데 어떤 사람이 夫人의 生年이라 하여 다시 定하기를 請하였다. 文敬公이 말하기를, “우리 이 女兒는 뒤에 반드시 福을 누릴 것이니, 嫌疑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자라서 좋은 사위를 고르되 妻家와 緣故가 있는 宰相 上洛君 文英 金公 諱 恂의 아내가 되었다.

金氏와 許氏는 모두 큰 門閥로서 富豪함이 서로 높았으나 夫人이 禮法으로 處身하니, 사람들의 離間하는 말이 없었다.

文英이 늦게 노래와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질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5) 文英이 늦게 노래와 => 文英이 만년에 노래와

文英公보다 十二年 後인 至順 壬申年(一三三二. 충숙 복위 원년) 七月 辛卯日에 病으로 세상을 마쳤는데, 모두 四男 三女를 낳았다. 맏아들은 永暾이니 奉常大夫 典法摠郞이요, 둘째는 永暉이니 興威衛郞將이며,
6) 둘째는 永暉이니 => 둘째는 永暉니

셋째는 出家하여 이름이 思順慈恩大德이며,
7) 셋째는 出家하여 => 셋째는 出嫁하여

넷째는 永煦이니 奉善大夫資贍司使이다.
8)넷째는 永煦이니 => 넷째는 永煦니

뒷부분은 운문(시문)이므로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柔順하고 올곧음
婦德을 갖추었고
넉넉함 은혜로움
母德이 아름답다
오호라 文敬公은
孔明을 거울삼아
더욱이 子孫에게
온精誠 다했으니
君子의 配匹되어
天壽를 누렸구나
碑文에 새긴뜻을
悠久히 傳하리라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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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국회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명부분의 운문식 윤문은 참으로 멋집니다.
그런데 교정 7)번의
셋째는 出家하여 이름이 思順慈恩大德이며,에 대한 수정의견
<셋째는 出家하여 => 셋째는 出嫁하여>는
<出家>가  옳습니다.
셋째는 여아가 아닌 남아로서 出家하여 승려가 된 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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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그렇군요. 착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