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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이진, 이제현과 우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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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2-09 09:45 조회1,8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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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제 이제현선생은 문영공의 배위이신 제평군부인 양천허씨의 모지명을 썼고 그의 부친 이진선생은 충렬공의 묘지명을 썼습니다. 부자간이 동시대 우리 집안의 아버지와 며느님의 묘지명을 쓰셨습니다. 

이에 전에 올려 졌던 글을 다시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다시 보는 이진, 이제현과 우리 가문> (김주회(안) 제공 자료)

1. 이금서(李金書)는 경순왕의 사위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좌명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알평(李謁平)이 있었는데, 그 후손인 소판 거명(居明)이 병부령 금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傅)가 국토를 바치려고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의 딸 낙랑공주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금서의 아내로 삼아 주어 윤홍(潤弘)을 낳았다. -----

상의(尙衣)가 증 좌복야 휘 핵(  )를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 시 문정공(文定公) 휘 진(王眞)을 낳았다. 진이 대릉직 박인육(朴仁育)의 딸 진한 국대부인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 정해년(1287) 경진일에 이제현을 낳았다.



 

2. 이제현의 부 이진

 

1244(고종 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


2-1) 이진의 모는 김씨(金氏)

선군(先君=이진)은 3형제분이었는데, 조모(祖母) 김씨(金氏)의 성품이 근엄하시어 몸소 서사(書史)를 가르치셨으며, 백부(伯父)와 계부(季父)는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고 선군만이 연세 80에 이르렀는데, 자질(子姪)들을 교양(敎養)하여 세업(世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백부의 아들은 내서사인(內書舍人) 전(?)인데, 성균시(成均試)와 대과(大科)에 모두 장원(壯元)하였으며, 그 아우는 덕원목사(德原牧使) 규(?)이다. 계부의 아들은 지금 첨의평리(僉議評理)인 천(?)인데, 나의 가형(家兄) 이암공(怡庵公) 및 나와 함께 모두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었으므로 민묵헌(閔?軒 묵헌은 민지(閔漬)의 호)이 선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제현의 역옹패설>



2-2) 이진과 김흔 장군

◀충렬공(김방경) 둘째아들 김흔 장군은 1290년대 후반 충렬왕파와 충선왕파의 권력투쟁시 이승휴, 김흔, 박전지, 이진 등은 충선왕파의 측근이었고, 김흔 장군은 1299년 원나라에 가 있을때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는 기록이 있음 <고려사 열전>



2-3) 1300년 9월 이진은 충렬공 묘지명을 찬하였다.

충렬공(김방경)께서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이때(9월) 전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前 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 이진(李 )이 충렬공 묘지명을 찬(撰)하였다.


묘지명에서 이진은  ---나는 과갈(瓜葛)의 친분(親分)도 있고, 또 특별(特別)히 알아  주시고 대우(待遇)를 받은 자(者)이며, 또 사자(嗣子)이신 상국(相國=나라의 재상)의 간청(懇請)도 있음으로 해서 삼가 붓을 잡아 명(銘)을 쓰노라.--- 하고 있다.


◀과갈(瓜葛) : 인척관계 라 하는데 충렬공과 이진과의 인척관계는 알 수 없음.

다만, 1)이제현의 조모 (즉 이진의 모)가 김씨 였다는 기록<역옹패설>, 2)충렬공 백부 김창의 외손자 이윤온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윤온은 경주이씨인 듯하다.


[대전외손(帶傳外孫)]: 평장사(平章事) 김창(金敞)이 붉은 가죽띠를 외손자인 밀직(密直) 학사(學士) 이윤온(李允蘊)에게 전해 주었고, 밀직은 또 그 띠를 외손인 제학(提學) 이방직(李邦直)에게 전해 주었다. 제학은 또 외손 이천동(李天童)에게 전해 주었는데, 이때 시를 지어 주기를,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제5권



 

3. 익재 이제현과 우리 가문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역10翁).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이 신흥관료로서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그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



3-1) 1287년 출생

1287년, 12월 경진일에 이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대릉직 박인육의 딸로 진한 국대부인이다.



3-2) 1314년 이제현은 김영돈, 김영후 등과 함께 백이정의 문인이었다. 백이정은 김순의 사위였다.

1314년, 백이정의 문인으로서 정주학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사 원명선 조맹부 장양호 우집 등과 교유하여 문학이 크게 진취되었고, 조맹부의 서체를 배워 왔다.

◀김영후는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1860 화해사전 제자서술>



3-3) 1332년 이제현은 김순 처 허씨 묘지명을 찬하였다.

김 문영공 부인(金文英公夫人) 허씨(許氏)의 묘지명 병서 <익재난고 제7권>



3-4) 1339, 1341년 이제현은 김영돈, 김영후, 김륜, 김승택 등과 함께 조적의 난을 막았다.

1339년, 충숙왕이 훙(薨)하고 정승 조적이 난을 도모하자 충혜왕이 이를 격살하였는데, 원나라가 충혜왕을 불러 들이니 민심이 동요되었다. 이에 이제현이 원나라 조정에 상서하여 사건을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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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년(충혜왕복위2) 6월 조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 김영후는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봉해져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3-5) 1342년 여름에 역옹패설을 지었다. 김창, 김방경, 김순 기록을, 역옹패설 후집에 김승용 기록을 실었다.

역옹패설 (翁稗說) : 이제현이 1342년(충혜왕3), 그의 나이 56세 때에 지은 수필적인 평론집이다. 선생이 연경에서 돌아오자 간신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날뛰니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서기로 결심하고 자연 속에 은거하고 말았다. 그 무렵 1342년(충혜왕3)에 <낙옹비설>을 지었으니 한가로이 자연 속에 묻혀 산 지 2년 만에 나온 책이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1814년(순조14)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된 것이 전해진다.


평장사(平章事) 금의(琴儀)ㆍ수상(首相) ★김창(金敞)ㆍ상서(尙書) 박훤(朴暄) 등 여러 명사들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진출하였는데, 당세에서는 이를 영광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할 것인 줄 알지 못하였다. -----


위득유(韋得儒)ㆍ노진의(盧進義)가 한희유(韓希愈)와 공을 다투어 서로 싸우고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에게 고소하였는데, 공은 위씨와 노씨를 바르지 못하다고 판결하였다. -----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


역옹패설 후집 후집 1

★김 밀직(金密直) 승용(承用) 이 나에게 이르기를, -----

★김공(金公)이 인하여 말하기를, "과거 영광군(靈光郡)에 있을 적에 띠를 엮어 술을 거르는 것을 보았는데 술이 지극히 맑아서 견직물(絹織物)의 자루에 넣어 거른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



3-6) 1351년 공민왕 즉위초 개혁정치 추진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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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즉위(1351-)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 가문은 김영돈(1348졸), 김영후(1361졸), 김승택(1358졸)은 정승의 반열에 있었고, 공민왕 즉위 초 이제현을 수반으로 하는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면서 신진 유학세력을 대거 육성할 때 김사렴, 김구용, 김제안 등이 문과에 급제하여 이색,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정공권(=정추), 이존오 등과 함께 활약을 하게 된다.



3-7) 1352년 이제현은 김영후, 김자, 김승택 등과 함께 공민왕 서연(書筵)을 열었다.

1352년, 서연시강으로 있었는데, 조일신이 시기함을 보고 여러번 사임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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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김영후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3-8) 공민왕초(1353년)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을 급제시켰다.

1353년 정월에 우정승을 사임하고, 5월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822년 남공철 찬 고려명신전>


◀익재 이제현과 우곡 정자후, 그리고 죽헌 김륜 은 모두 철동(수철동=앵계리 동쪽)에 살았다. 이들은 당대의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단한 분들이어서 [철동삼암-鐵洞三庵]이라 불리웠다. 정승 죽헌(김륜)이 돌아가시자 그의 사위인 급암 민사평이 그집에 살게 되었으며, 이 집에서 척약재(문온공 김구용)과 내서사인공 김제안 형제가 외할아버지인 급암선생께 수학하였다. 물론 이 삼암 선생에게서도 어린시절 많은 지도를 받아서, 삼암(익제,우곡,죽헌)의 학맥이 급암에게로 이어지고, 또 척약재와 김제안공에게로 이어져 왔다. <솔내영환 제공, (2004-10-01>


◀1358년(공민왕7)에 김사렴은 비서감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3-9) 1363년 문집 <익재난고>를 엮었다. 김순처 허씨, 김영돈 기록이 실렸다.

익재난고 (益齋亂藁) : 고려 말기 문신·학자 이제현(李齊賢)의 시문집. 1363년(공민왕 12) 아들 창로(彰路)와 손자 보림(寶林)이 그의 시문을 모아서 《익재난고》 10권을 처음 간행했다.


익재난고 제4권 시 詩

귀봉(龜峯) ★김 정승(金政丞) 영돈(永旽) 을 슬퍼하다 -----


익재난고 제7권 비명 碑銘

★김 문영공 부인(金文英公夫人) 허씨(許氏)의 묘지명 병서 -----



3-10) 1365년 요승 신돈과 대립하였다.

1365년, 왕이 신돈을 총애하므로 이제현은 신돈의 골상을 들어 경계할 인물임을 아뢰었고, 신돈은 백방으로 이제현을 해치려 하였다. ---신돈이 실각하자 공민왕이 말하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 없도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되었다." 하였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김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1822년 남공철 찬 고려명신전>


◀1360년대 중반,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여 권문세족, 신진 유학세력 등 기존의 세력을 멀리 하면서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고, 후에 신돈이 타락하게 되면서 우리 가문과 많은 충돌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우선 김사렴은 정추, 이존오에 이어 신돈을 탄핵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김정, 김제안 등은 신돈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 김제안은 사천김씨로, 김정은 수안김씨로 분적하게 되고, 일설에 김사렴을 해주김씨의 원조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사건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돈의 등용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이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하여 왕에게 가까이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1366년에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貶逐)을 당하기도 하였다.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김원명 등이 제거하려고 밀의(密議)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하였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류되던 도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3-11) 이제현의 아들 이창로는 한공의와 김묘의 사위였는데, 김사렴의 형 김사겸도 한공의의 사위였다.

공(이제현)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세 번째) 수춘국부인 박씨는 ---휘 거실(居實)의 딸로 1남 (창로) 3녀 (박동생, 송무에 출가, 충?왕비 혜비)를 낳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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