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문온공)선조님과 동방(대과에 같이 합격)분-2-우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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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2-05 10:57 조회1,758회 댓글0건본문
우현보(禹玄寶)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적성군(赤城君) 길생(吉生)의 아들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집의·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
(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하여졌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이를 막기 위한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회군이 성공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尹彛와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하여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다.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여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
(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손 성범(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색 (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척약재집에서
245)上禹宰相
상우재상
山川蕭瑟秋風起 산천소슬추풍기
回首靑雲千萬里 회수청운천만리
飄然無賴一狂生 표연무뢰일광생
四年高臥驪江水 사년고와여강수
死生榮辱是誰爲 사생영욕시수위
不覺時時仰天笑 불각시시앙천소
江魚村酒發長謠 강어촌주발장요
過眼風雨知多少 과안풍우지다소
(245)우재상께 올리다
소슬한 산천에 가을바람 이는데
고개 돌리니 푸른구름 천만리일세
표연히 의지할 곳 없는 한 미친사람은
4년동안 여강가에 누워만 지내는군
생과사 그리고 영욕은 누구때문인가
때때로 하늘 우러러보며 웃는 것도 깨닫지 못하네
농주에 물고기안주로 민요가락 부르며
눈앞에 어른거리는 비바람은 알길이 없네
*우재상=우현보(1330-1400)을 가르킨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原功, 호는 養浩堂, 본관은 단양이다.
赤城君 吉生의 아들로 척약재와는 을미년(1355년 공민4년)禮部試 同年이다.
342)漢陽有作 呈禹宰相玄寶
한양유작 정우제상현보
漢陽今日作京城。한양금일작경성
水繞山圍景氣淸。수요산위경기청
冠蓋紛紜人撲地。관개분운인박지
蒼生從此看昇平。창생종차간승평
聞說君王放鄭聲。문설군왕방정성
漢陽山水豈無情。한양산수개무정
誰能更獻經綸策。수능갱헌경륜책
堯舜君民在此行。요순군민재차행
342)한양에서 지어 우현보 재상께 드리다.
漢陽이 오늘 京城이 되니 (*845)
물이 두르고 산이 감싸 景槪와 氣象이 맑네
수레 덮개가 어지럽고 사람들이 땅에 가득하니
백성들은 지금부터 昇平을 보게 되리.
듣자니 군왕이 鄭나라의 소리를 내쳤다고 하니 (*846)
한양의 산수가 어찌 무정하랴?
누가 다시 經綸의 계책을 바치랴?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이 행차에 있네
*이 시의 첫 수는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된 날의 환희를 담고 있다. 사나수가 수려한 한양이므로 백성들은 지금부터 태평시대를 구가할 것이라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이다. 둘째 수에서는 태평성대에 대한 구체적인 조짐으로, 왕이 鄭나라의 소리를 내쳤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鄭나라의 소리’는 음란한 소리를 뜻한다. 왕이 한양산수의 음덕에 힘입어 음란한 행동을 멀리한다는 것은 바로 태평성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김구용은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그는 경륜책을 바친 신하가 나타나기를 희구하고, 이번의 한양 첮도로 인해 요순시대가 구현되리라고 믿고 있다. -성범중의 책 81page에서..--
*845) 이겻은 1382년(우왕8년)9월 癸酉일에 우왕이 한양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2월 기축일에 송경으로 돌아올때까지 반년 가량 한양으로 천도한 일을 가르킨다. 이때 수시중 이자송이 개성유수로 있었고 대신의 일부는 한양에 扈從하였다.
*846) ‘鄭聲’은 함란한 소리를 뜻한다 ‘논어’ ‘衛靈公 ’에 “정나라는 소리를 내치며, 편녕한 사람을 멀리할 것이니, 정나라의 소리는 음란하고 편녕한 사람은 위태롭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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