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하담김시양 문집(13)-학봉서첩 발문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8-02-05 07:55 조회1,427회 댓글0건

본문

학봉 서첩의 발문-학봉서첩발(鶴峰書帖跋)

    출전 : <하담 김시양문집> 274p

 

 만력 경인(萬曆 庚寅. 주: 선조23년. 1590)에 나라에서 일본(日本)에 통신을 거행할 일이 있어 사신으로 가는 자가 3명이 있게 되었는데, 나는 바로 어린 나이였는데 항간에 소문나기는 사신(使臣) 한 사람은 기절(氣節)을 스스로 지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바로 서의(書儀)를 받았는데, 비록 저들이 추악한 무리임을 충분히 알게 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존경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면서도 당시에는 어려서 누가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지만 물어 보지를 못했다. 그 후 10여 년 후 나에게 비로소 길을 가는 사람에게 채찍이 되는 이름이었으며, 또한 통신사(通信使)로 가게 될 조정의 사대부가 있으면, 모두 서로 이르기를 그 능력을 마치 경인(庚寅. 주: 선조 23년. 1590) 사신이 굴함이 없는 기품과 절도를 유지했던 것 같이 하면 다행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밑으로 대흡(臺皀)과 여예(閭隸)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신(使臣)된 자도 역시 모두 깐깐하게 스스로 경인(庚寅)년의 강경한 태도를 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 성명(姓名)을 물어 알고 보니 학봉(鶴峰. 주: 金誠一) 김선생(金先生)이었다. 사신(使臣)이 바다를 건너감에 모두가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글을 받기까지 조치할 바를 몰라 여러 의례를 감히 교정하지 못하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을 얻은 양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이웃에 침을 뱉으며 국명(國命)에 욕을 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학봉(鶴峰)공에게 더욱 탄복한 것은 오로지 대하지 못하게 되어도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는 선비로, 말세에는 더욱 쉽게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公)은 정색(正色)을 하고 조정에 섰고, 군주에 가까운 사람에게 전혀 아부하지 않아(주: 곧은 자세로 豊臣秀吉을 면접한 것을 지칭함), 본디 청총마(千驄馬)의 소리가 있는 이른바 옛날에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않는, 사방으로 파견되던 곧은 사신이었던 것이다. 특히 시서(詩書)중에 업적을 이뤄 내었다. 삼가 절개를 위하고 의리를 위해 죽는 선비로서, 강력하게 권하여 감히 간언(諫言)하는 가운데 구하는 것은 진실된 말이었다.

 내가 일찍이 공(公)의 바름을 흠모하고 공(公)의 절개를 공경하여, 채찍을 들고 모범을 보이는데 오직 사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세상을 떠난 후, 묘지가 만들어지지 않아 개탄스러운 생각이 나는 것은 때늦은 생각이 든다. 생각 같아서는 공(公)이 남긴 글이라도 한번 읽고 세 번이라도 탄식하고 싶어하며, 평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황마지세(黃馬之歲. 주: 戊午. 光海10년. 1618)에 나는 막 삭방(朔方)에서 영주(寧州)로 양이(量移. 주: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지를 가까운 데로 옮김)되었는데, 이웃에 사는 백진사[白上舍] 영감님이 오랫동안 요청을 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시문장 한첩(一帖)을 보여 주었는데, 시문장도 있고 서간문도 있었는데, 바로 공(公)이 평소에 백상(白相)과 손수 주고 받던 것이었다. 이것은 공(公)의 서한집의 머리말 등이어서 비록 공(公)이 전부 읊은 것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음미하여 읊어보는 것 역시 그의 사람됨을 상상해 볼 수 있기에 충분한 즉, 그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힐문 당하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가 30년을 우러러 생각했던 것에 위로를 하며, 어찌 다만 한 조각을 맛보고 큰 바다를 바라보겠는가. 공이 이루어 놓은 일과 문장은 나라의 역사에도 올라 있고, 그와 백(白)이 서로 절개를 허락하였으며 백(白)이 공(公)을 추모했던 정성은 임(林), 황(黃) 두 공(公)의 말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하필 나그네인 내가 입을 조아리겠는가.

 

주: 金誠一…1518-1593. 문신. 자 士純. 호 鶴峰. 본관 義城. 시호 文忠. 저서 鶴峰集 海槎錄 등.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 통신사로 다녀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