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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묘지 제도8 -문영공의 묘지석 조사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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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1-15 08:35 조회2,2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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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문영공 묘지석(墓誌石) 조사 자료

가. 묘지석 소개

문영공 묘지석은 1941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계면(臨溪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묘지명은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서울, 1979)에 수록되어 있었다. 묘지명은 1321년(충숙왕 8) 민지(閔漬)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김순(金恂 : 1258~1321)의 자는 귀후(歸厚)이며,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증조는 민성(敏成), 조부는 효인(孝印), 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어머니 박씨는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김순은 1279년(충렬왕 5)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한 1295년(충렬왕 21)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는 등 충렬왕 때 관인으로서 활약하였다.

김순은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영돈(永暾), 차남은 영휘(永暉), 3남은 사순(思順), 4남은 영후(永煦)이다. 장녀는 정지(鄭漬)에게, 2녀는 백이정(白?正)에게, 3녀는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인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로 아버지 방경, 부인 허씨의 묘지명이 있다.

 

<찬자 민지(閔漬)에 대하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나. 묘지명 원문

*출전:『安東金氏大同譜』(1979)〕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 墓誌銘 (幷序)

古所謂君子者德行云乎哉功業云乎哉予曰惟德行耳非功業也何也德行在心功業 在時在心者人所修也在時者天所授也能修人之所可修者爲君子耳夫德行本乎忠孝能以忠孝立揚於當世者惟我判三司相君有焉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曾祖諱敏成追封左僕射行掌冶署丞兼直史舘祖諱孝印追封中書令行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舘修撰官知制誥考諱方慶宣授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典理司事上將軍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實封三百戶贈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忠烈公母朴氏中書舍人知制誥諱益旌之女封陰平郡夫人公以善書多寫碑文年方志學以門蔭入仕爲掌牲署丞後改爲別將御牽龍行首職雖從東至西 其志未嘗不在文學盖嚴君雖位極兩朝將相惟以未參桂籍爲恨 冀嗣子之能復祖業故也公由是力學不倦至至元十六年己卯春場一擧爲金榜副元是年初拜攝郎將後改爲國學直講此公之能伸大人之遺憤者也自是先公益推偏季之恩常令不離左右賀正上國無不令隨但其東征船上不許追陪者不從軍?危事也公於是扈駕不待命而先登戰艦頗有扶衛救援之功是公惟專忠孝而奮不顧身者也壬午遷殿中侍史翌年出爲尙州判官政聲登聞未一年而入爲典法佐郞□知通禮門事考功正郞壬戌奉使南方爲陪先公拜祖墓於桑鄕也戊子除秘書少尹知通禮門事是年上命公爲世子府行李別監委以師傅之任壬辰加朝顯大夫典法摠郞知制誥累遷少府尹□□□學軍簿摠郞典理摠郎朝奉大夫秘書尹三司右尹皆兼三字元貞乙未冬同知貢擧所取皆當時名士大開綺席□□□□士朝野莫不嘉歎是先公之極於榮孝者也是年加朝議大夫丙申兼世子舍人大德丁酉遷國學典酒又拜奉烈大夫密直使右副承旨驟遷左副承旨寶文閣直學士翌年加右承旨知版圖司事每遷皆兼三字是年春奉使南方旣還改授通議大夫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又改爲正議大夫集賢殿學士左散騎常侍是年七月復爲密直司右承旨國學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依前三字八月加奉翊大夫三司左使崇文舘學士九月又改爲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充史?修撰官知制誥知軍簿司事十二月拜奉翊大夫密直司副使文翰學士己亥知止乞退翌年八月先公棄世依遣囑葬于桑梓庚戌冬行祭于先公墓壬子起爲重大匡上洛君承襲先公之茅土己未又拜先公墓上命季子永煦奉使以陪行所以重其行也至治元年辛酉命相以賢擢公爲判三司事八月加寶文閣大提學上護軍至是月二十一日寢疾卒于第享年六十四公性敦厚直柔內實剛毅孝悌忠信出於天眞惜乎以公之才德若延數載則利澤豈不及於蒼生名位豈止如是而已哉娶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謚文敬公諱許珙之女生四男三女曰永暾今爲都官直郞知陜州事曰永暉今爲興威衛保勝別將曰思順剃度爲慈恩宗大德曰永煦爲司憲持平女一嫡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鄭?二嫡大匡上黨君白頤正三嫡舍人別里哥不花大元左承相阿忽反之子也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銘曰

 赫赫忠烈 東國汾陽 滿庭蘭玉 幷秀爭芳 白眉爲季 時號最良 家尊所歉 未入桂堂 公承厥志 銳意文場 世傳祖法 時効錦囊 妙齡乙第 名振四方 揚歷臺閣 演誥含香 一提文柄 桃李成行 高堂喜淚 流溢壽觴 眼前拜相 錄鬢金章 力彈榮孝 哀極榟鄕 子道無缺 宜降百祥 暮年閑退 天意范范 終傳茅土 門戶更光 不參時政 虛度九霜 俄登極品 民固邦寧 胡未卒歲 遽促仙裝 在公無慊 爲國可傷 刻銘流耀 庶及無彊

   大元至治元年辛酉十月十四日

   宣授朝列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舘大提學

   監春秋舘事 驪興君 閔漬 撰

 

*안동김씨대동보(기미보. 1979년 간)의 기록인 상기의 <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기록은 묘지명 원문이 아닌 변형 글임. 원문은 <新羅王金傅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임

 

다. 묘지명 역문 (안동김씨 파보-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기록 내용)

고려국이중대광상호군증시문영안동김공순지묘갈명(*필자 주 : 묘비 상단 전액-파보에만 있는 기록 내용으로 잘못된 기록이 있음-이중대광, 증시.)

 

중대광판삼사보문대제학 상호군 김순묘갈명병서

옛적에 이르기를 君子라고 하는 것은 德行을 두고 말한 것이냐? 功業을 두고 말한 것이냐? 하면 오직 덕행이요 공업은 아니다.

왜냐하면 덕행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공업은 때(時機)에 있는 것이니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이요 때에 있는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을 수양하는 것이 군자이다.

무릇 덕행은 忠孝가 근본이 되므로 능히 충효로써 當世에 입신양명한 분은 오직 우리 판삼사 相君이 계실 뿐이다. 공의 휘는 恂이요 자는 歸厚며 신라왕 金傅의 10세손으로 태어나시니 안동부는 즉 그의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고향이다. (김선평부분 19자 생략)

증조의 휘는 敏成이시니 좌복야로 追封되고 장야서승 겸 직사관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孝印이시니 중서령으로 追封되시어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수관수찬관 지제고를 지내시고 고의 휘는 方慶이시니 元帝로부터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食邑 1천호를 宣授하니 實封은 3백호이며 돌아가신 후에 고려에서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贈職하고 시호는 忠烈이라 내렸다.

공의 어머님은 박씨요 중서사인 지제고 益旌의 따님으로서 陰平郡夫人을 봉하였다.

공께서 글씨를 잘 쓰심으로 비문을 많이 쓰시고 소년시절부터 학문에 힘쓰시고 先代의 蔭德으로 벼슬에 들어가 장생서승이 되었고 후에 별장이 되어 견룡행수직을 맡아서 비록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여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두었으니 대개 부친(=휘방경)께서 왕조 兩代의 최고 벼슬인 將相을 지냈으나 오직 과거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음으로 아드님(=휘순)이 능히 조부(=휘민성)의 업적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공이 그러므로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至元 16년 춘계과장에서 금방 부장원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휘방경)의 遺恨을 펴신 것이다. 이로부터 부친(=휘방경)께서는 막내아들(=휘순)을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셨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從軍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 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한 공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써 發奮(발문)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壬午(임오)년에 전중시사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가서 선정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1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전법좌랑00 통예문사 고공정랑으로 薦擧(천거)되었다.

壬戌(임술)년에 남방사신의 명을 받고 선친(=휘방경)을 배행하여 고향 조부(=휘효인) 묘소에 다녀왔으며 戊子(무자)년에 비서소윤 지통예문사를 除授(제수)하더니 그해에 왕이 공을 명하여 세자부 행이별감을 삼고 사부의 책임을 위촉하였으며 壬辰(임진)년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를 첨가 위임하더니 누차 승진되어 소부윤000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에 모두 三字銜(삼자함 : 奉朝賀봉조하 : 종3품으로 치사 후에 특별히 받은 직위)을 겸하였다.

元貞 乙未년 겨울에 과거로 선발된 동지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라 크게 하려한 宴席(연석)을 베풀으니 0000사 朝野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선친(=휘방경)에 대한 극진한 영광이요 효도인 것이다. 이해에 조의대부로 올라가고 丙申년에 세자사인을 겸하고 大德 丁酉년에 국학전주로 승진되고 또 봉열대부 밀직사 좌부승지로 천거되었더니 별안간 좌부승지 보문각 직학사로 승진되고 그 이듬해에 우승지 지판도사사를 더하고 매양 옮길 때마다 모두 三字를 겸하였다. (문영공 종사록에 생략된 부분)

이 해 봄에 南方으로 사신 갔다 돌아와서 다시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로 임명하고 또다시 정중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를 배명하였다. 이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로 拜命하고 三字는 전대로 두었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로 승진되고 9월에 또다시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시가 되고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 배명하였다.

己亥(기해)년에 공께서 그칠 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휘방경)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遺願(유원)에 의하여 고향 선영에 장례를 모셨다.

庚戌(경술)년 겨울에 선친(=휘방경) 산소에 제사를 지내고 壬子(임자)년에 다시 중대광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휘방경)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 받았다.

己未(기미)년에 또 선친(=휘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至治원년 (1321) 辛酉에 어진 정승을 기용하기 위하여 공을 발탁하여 판삼사사를 삼고 8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을 명하였다. 그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돈후)하고 剛直(강직)하고 內柔(내유)하시며 孝悌와 忠信은 천하에 출중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만민에 미치지 않았으며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서 그칠뿐이랴?

配는 광정대부 첨의충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 휘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永暾(영돈)은 현재(*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로 있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으로 있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慈惠宗 大德이 되었고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책(巾+責)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대광 상당군 白頤正(백이정)에게로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영돈의 문중에서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그(=휘영돈)의 선친(=휘순)의 친구인지라 공의 行狀을 가지고 와서 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을 쓰노라. 臣 頁

銘文에 이르기를

혁혁한 충렬은 동국의 황제의 讓位와 같고

(*분양이란 황제의 양위 요 임금이 분양에서 仙人과 나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滿堂한 子姪들은 모두가 수재요 영재로서 白眉와 같이 우수하니

(*백미 :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남, 故 옛날 촉나라 마씨 집안 5형제중 눈썹이 하얀 마량이가 베일 뛰어났던데서 유래한 말)

당시에 이르기를 제일 어질다고 하였도다.

선친(=휘방경)의 遺恨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이더니

공이 그 뜻을 이어 문학에 뜻을 예민하게 세우고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의 법도를 본받아 시시로 錦囊이 찰만큼 시 짓기에 노력하더니

(*금낭 : 시 작품을 넣는 비단 주머니)

묘령 22세에 금방에 급제하여 이름을 사방에 떨치니

臺閣에서 傳播하는 告示文은 향기가 돌았도다.

한번 학문의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列을 이루도다.

尊堂의 기쁜 눈물은 흘러 축하하는 술잔에 넘치고

생전에 정승을 지내어 검은 구렛나루에 金章이 빛나도다

힘껏 榮華와 충효를 다하여 고향 사람들이 애달피 하노라

자식된 도리를 다하니 만복이 내리도다

만년에 은퇴하매 하느님의 뜻이 담당하도다

마침내 先君(=휘방경)의 爵祿(작록)을 襲封(습봉)하니 門戶가 다시 빛이 나도다

정계에 참여치 않고 은퇴 후에 9년간의 세월을 허송하다가

별안간 極品宰相에 올랐으니 민생도 안정되고 나라도 태평하도다.

아직 돌아가실 나이도 아니신데 급작스럽게 황천길을 재촉하니

공에게 있어서는 여한이 없겠으나 나라를 위해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銘을 새기니 흐르는 광채는 천만년 끝이 없으시리라

대원 至元 원년 辛酉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 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 閔漬 지음(撰)

 

라. 문영공 묘지석 소장처에 대하여 (현재 불분명)

 1) <한국금석문 종합 영상 시스템>의 기록

김순묘지명(金恂墓誌銘)

시대 : 고려

연대 : 1321년(충숙왕8년)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미상

출토지 :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소재지 :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민지(閔漬) / 미상 / 미상

 

 2)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소장 자료 검색 결과

<김순>으로 등록된 소장 자료는 1건도 없음(2008. 1. 4. 확인)

 

 3) 국립중앙박물관 담당자 담

가) 1차(2006년) 질의시에는 김순의 묘지석이 박물관에 있다고 함

나) 2차(2007년 11월) 재질의 시 현 박물관에 있는 것은 동명이인인 김순 의 묘지석이라 답함. 결국 박물관에는 없는 것으로 확인 됨

 

 4) 문영공 종중 운영 원로 고증인 담

*창규(昌奎)님 談(제. 93세. 병천 거주. 40여세(1968년 경)부터 문영공 종 사 활동. 문영공종중 종사록 초. 2007. 10. 항용(제) 채록)

1)묘소를 이장해 왔다는 말은 들음

2)묘소를 이장하신 분들로부터 묘지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음.

3)자신 이외 현 생존자들 중에는 이장 과정과 묘지석에 대한 것은 어떤 고증도 해줄 사람이 없음.

 

마. 기미대동보 기록의 오기부분(10世)과 생략한 부분(19자-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에 대하여

 1)묘지명 원문에는 문영공이 경순대왕으로부터 <十五代孫>(현 족보 계통상으론 9대손임)이라 되어 있으나 대동보에는 <10 世孫>이라 번역해 놓음-이는 원문 그대로 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부기에서 간략 언급하는 방안 검토 요

 

 2)기미대동보 해석 생략부분인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의 내손(內孫)은 ‘우리 집안사람, 가까운 일가사람, 족친’이란 뜻으로 外孫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란 학자들의 의견임

 

*해석-삼한벽상공신사종아부 삼중대광 김선평은 우리 집안사람(족친)이다.

*삽입 이유-김선평은 경순왕과 같이 고려조의 개국공신이다. 따라서 경순왕과 동시대 분이요 같은 신라김씨이며 크게 멀지 않은 혈족인 김선평을 삽입함으로써 우리 문중과 문영공의 가계 혈통을 크게 자랑하고 내세우려는 의도로 삽입 한 것으로 보임.

*동일 해석자 : 심경호교수(고려대 한문과), 김익수(한학자. 제주도 문화재위원, 제), 김재갑(한학자, 경기대교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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