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영정-전쟁기념관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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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1-06 21:37 조회1,502회 댓글1건본문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영정입니다.
자료 출전 : 국가문화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홈페이지(http://www.heritage.go.kr/)
소장처 : 전쟁기념관(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1가 8번지)
* 국가문화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홈페이지(http://www.heritage.go.kr/) 기록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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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김시민(金時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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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 / 조선(朝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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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其他) / 기타도서(其他圖書)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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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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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사립(法人/私立) / 전쟁기념(전쟁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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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3) 102031 |
<정의> : 조선시대 호국인물, 김시민(金時敏) 초상화
<발달과정/역사>
조선(朝鮮) 중기의 무관인 김시민(金時敏)의 초상화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본관이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목천(木川)에서 출생하였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훈련원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알루미늄 테두리를 한 합판 액자에 유화로 그린 초상화가 알루미늄판 배접으로 부착된 형태이며, 하단에 공적 설명문이 지사벽지에 실크 인쇄되어 있다. 김시민의 얼굴 모습은 영정 및 관련자료, 종중인사 등을 바탕으로 하였고, 복장은 두정갑주를 표현하였다.
<제원>
액자 규격 - 가로: 45.5cm, 세로 : 76cm, 초상화 - 가로 : 45.5cm, 세로 : 45cm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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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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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해설내용 중에 일부 내용이 ?로 된 것이 있습니다. <국가문화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홈페이지에 정정 요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