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평양(平陽) 박 선생(朴先生)과 창녕(昌寧) 성 선생(成先生)의 시문(詩文) 발 - 미암 김대래 / 우암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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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5:49 조회36회 댓글0건본문
평양(平陽) 박 선생(朴先生)과 창녕(昌寧) 성 선생(成先生)의 시문(詩文) 발 - 미암 김대래 / 우암 송시열
내가 계상(溪上)에 조용히 지내면서 병든 몸을 요양하고 허물을 반성하던 어느 날에 상사(上舍 생원(生員)ㆍ진사(進士)의 이칭) 전즙(田)이 신읍(新邑)에서 와서 1폭(幅)의 글을 보여 주는데 ‘김교관시권서(金敎官詩卷序)’라 제(題)하였고, 서문 밑에는 ‘평양 박팽년 인수(朴彭年仁叟)’라 쓰여졌으며, 또 그 밑에 김 교관에게 준 시가 있고 시 밑에는 ‘창녕 성삼문 근보(成三問謹甫)’라 쓰여졌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놀랍고 시야가 밝아짐을 느끼면서 ‘이 두 분 선생의 문자는 어디서 입수하였으며, 이른바 김 교관은 어떤 사람으로 두 분 선생에게서 글을 얻음이 이처럼 정중하였단 말인가.’ 하였더니, 전군(田君)이 대답하기를,
“김씨는 결성(結城) 사람으로 이름은 대래(大來)인데, 내가 사는 곳과 매우 가까우므로 그의 내력을 논할 수 있으며, 이 서문과 시는 남 상국(南相國 남구만(南九萬)을 말함)의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베껴서 보내온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어 말하기를 ‘두 분 선생의 추허(推許)가 이와 같음을 본다면, 묻지 않아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지금 두 분 선생의 시대는 이미 2백여 년이나 되었고, 더욱이 그 당시 형륙(刑戮)의 화(禍)를 겪은 나머지 모든 문자(文字)가 거의 사라져 없어졌으니, 진실로 귀신이 아끼고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랴. 병자년의 화를 당한 뒤에 성공(成公 성삼문을 말함)의 부인이 손수 성공의 신주(神主)를 써서 제사하였고, 세월이 흘러 현종대왕 시대에 와서 서리(書吏) 엄의룡(嚴義龍)이 인왕산(仁旺山) 밑의 바위 사이에서 신주를 발견한 바,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으며, 사인(士人) 여필관(呂必寬) 등이 그 외손인, 모관(某官) 엄찬(嚴纘)의 집에 봉안하였다가 노은동(魯隱洞)의 사우(祠宇)에 모셨는데, 내가 일찍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랴. 이것으로써 이 시문의 나타나고 숨음이 반드시 까닭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김공이 이것을 빌려서 이름을 후세에 남김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남(南)ㆍ전(田) 두 사람의 의리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높임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이를 이처럼 발휘 천양하였으랴. 현재 사설(邪說)이 자행되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이들이 도리어 비방을 받고 있으니, 산속에 엎드려 있으면서 비탄(悲歎)을 금할 수 없다. 마침 이곳 선비들이 박 선생을 제사하는 날에 전군이 이를 받들어 와서 함께 제전(祭典)을 집행하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하고는 이 글을 시문 밑에 썼다.
숭정 무진년(1688, 숙종14) 8월 정일(丁日)에 덕은 송시열은 쓴다.
4. 平陽朴先生,昌寧成先生詩文跋
余杜門溪上。養痾省愆。一日田上舍來自新邑。投示一幅文字。題曰金敎官詩卷序。序末書曰平陽朴彭年仁叟。其下又有贈金敎官詩。其下書曰昌寧成 三問謹甫。余不覺心驚而眼明曰。此二先生文字。何處得來。所謂金敎官。是何許人。而獲此於二先生。若是其鄭重耶。田君曰。金是結城人而名大來。余所居與之密邇。故得以論其世也。今此序若詩者。南相國之胤鶴鳴所錄寄者也。余曰。觀二先生之所推許如此。不問可知其爲人也。今去二先生之世。二百有餘年。而況當時刑禍之餘。其不煙沈響絶者幾希矣。如非鬼慳神護。安保其至今無恙哉。當丙子禍後。成公內子。自寫神主而祭之。後幾年。顯宗大王之幾年。書吏嚴義龍得其主於仁王山下巖石間。字不䵝昧。 士人呂必寬等。奉安於其外裔某官嚴纘家。因以藏於魯隱洞祠宇。余嘗記其事矣。此豈人力哉。以此亦知此詩文之顯晦必有所以也。而金公之託此而不朽者。亦非偶然也。然微南,田二君之嗜義尙賢。孰能揮發闡揚如此哉。目今邪說肆行。殺身成仁之士。反見非議。竊伏山間。不勝悲歎也。適此間諸生禋祀朴先生。而田君奉此而來。同執俎豆。其事亦奇矣。遂書此于詩文之下方云。時崇禎著雍執徐八月六丁。德殷宋時烈跋。/ 宋子大全卷一百四十九 /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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