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에 선정된 선조님 5분-김두남(金斗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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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20-05-01 07:16 조회877회 댓글0건본문
청백리에 선정된 선조님 5분-김두남(金斗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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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남(金斗南):효종 8년(1657)~숙종 41년(1715)
할아버지는 풍덕도호부사 김인량(金寅亮)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지(金址)이며, 어머니는 수군절도사 민선(閔善)의 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일경(一卿)이며, 호는 탁청헌(濯淸軒)이다.
숙종 7년(1681)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 13년(1687)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후 승정원가주서가 되었고, 이듬해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숙종 15년(1689)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근무할 때 인현왕후를 폐하려고 하자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 80여명의 관리들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숙종의 노여움을 받아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1694년 호조좌랑 등을 지내고 1696년 사간원 정언·헌납 등을 거친 뒤 이듬해 병조좌랑 등을 거쳐 숙종 28년(1702) 울산부사를 지내고, 그해 12월 인동부사에 부임하여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은 토호세력을 원칙대로 대하여 그때까지 체납되었던 관곡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 또 관곡 중 토호들이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착취한 것은 모두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청렴한 아전을 충원하여 정치가 맑아져 백성들이 청덕(淸德)선정비를 세웠다.
이듬해 7월 고종사촌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 상피(相避) 관계로 자리를 옮겼다. 1704년 예빈시정, 이듬해 종부시정 등을, 1708년에는 박천군수 등을 지내고 숙종 36년(1710) 양양부사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관내에 큰불이 나서 수백호가 불타고 많은 사람과 짐승이 죽거나 다쳤다. 이에 관곡을 풀어 이재민 구제에 온 정력을 기울이고 굶주리기를 백성들과 같이하였다. 이 때 김두남을 사간원으로 전임시키려 하자 고을 백성들이 어질고 청렴한 사또를 유임시켜 달라고 요청하여 임금이 그대로 유임시켰다.
그 뒤 헌납·동지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오고 숙종 41년(1715) 안주목사로 근무하다가 사망하였고 경종 때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전고대방에만 수록되어 있음.>
《출처 : 조선의 청백리222 pp65~66/문학박사 조성린/조은출판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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