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의 생애와 행적(1)-(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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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3 조회1,347회 댓글0건본문
조심성이 있게 어지러움을 기다리고 고요함으로써 시끄러움을 기다렸던 장수
金方慶의 生涯와 行蹟
張 東 翼*
1258년(고종 45) 20여년에 걸쳐 몽고군에 저항하면서 국가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오던 고려왕조는 최씨의 무신정권이 붕괴됨에 따라 몽고국과 복속을 전제로 하여 일단 강화를 맺게 되었다. 그렇지만 최씨의 그늘에서 성장했던 김준․임연 등과 같은 무신집권자들은 몽고국에의 완전한 항복을 수긍하지 않으려 하여 항쟁과 강화의 두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지배층의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또 한반도의 북부지역에는 몽고군이 여전히 주둔해 있으면서 무력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어서 국가의 존폐를 가늠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난국에 처한 고려의 지배층들은 국가의 온전한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의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의 정국을 이끌어 갔던 인물들의 생애와 현실대응의식 그리고 사상들이 검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주목되어야 할 인물로서 항쟁론자인 무신 김준․임연, 강화론자인 문신 최자․김지대․이장용․유경․이세재 등이 있고, 이들의 뒤를 이은 무신 김방경, 문신 허공․조인규 등이 있다. 이들 중의 일부는 생애와 활동이 부분적으로 검토된 적이 있으나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하는 김방경(1212~1300)에 대한 연구 성과는 1986년 이래 세 편의 석사학위 논문이 차례로 발표되어 연구의 깊이를 더하여 왔다.1) 그 과정에서 삼별초난의 평정과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과 관련되어 검토된 적이 있고,2) 특정사건을 중심으로 김방경이 처하고 있었던 정치적인 형편을 검토한 업적도 발표되었다.3) 이어서 기왕의 성과들을 참조하면서 당시의 내외 정세와 관련하여 김방경의 생애를 조감한 업적도 나와 주목되고 있다.4)
이러한 기왕의 연구 성과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김방경에 관련된 자료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고, 종래에 간과되었던 자료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요청된다. 이를 위해 김방경의 생애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연보형태(年譜形態)로 정리하고, 그 중에서 주목되는 업적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가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무신(武臣)에 의한 정권 장악, 몽골족[蒙古族]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저항과 뒤이은 굴욕,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에 의한 동족상잔에의 참여, 그리고 강요된 일본원정에의 참여 등으로 13세기의 대부분을 살아가면서 영욕(榮辱)을 맞보았던 무장 출신의 관료인 김방경의 생애와 업적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김방경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의 문집이 남아 있지 않아 후대에 만들어진 기록이나 그가 남긴 시문을 통해 그의 행적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관련된 주된 기록은『고려사』열전․『안동김씨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묘지명․행장 등인데,5) 먼저 이들 자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자.
『고려사』열전17에 수록되어 김방경에 대한 내용은 당시의 여타 인물의 그것에 비해 비교적 상세하지만, 그의 경력을 전반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지 못하다. 또 특정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여 주목되는 자료도 있지만, 일본 정벌과 관련된 사안 중에서 중국 및 일본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月日이 분명치 않은 한계점도 있다. 또 그가 1300년(충렬왕 26) 8월 16일에 별세한 직후 10여일이내에 문한학사(文翰學士) 이진(李瑱, 1244-1321)에 의해 만들어진 묘지명에는 가계(家系) 및 자녀(子女)에 대한 사항은 상세하지만,6) 그의 업적과 경력은 극히 간단할 뿐만 아니라 종주국(宗主國)인 원(元)과 관계된 내용은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이 시기에 정동행성관(征東行省官)이 증치(增置)되어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임명되어 온 고리기스[闊里吉思]의 천권(擅權)에 의해 고려의 조야(朝野)가 숨죽이고 있었던 형편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7) 그리고 행장은 그가 별세한 50년 후인 1350년(충정왕 2) 2월에 첨의참리(僉議參理) 안진(安震, ?-1360)이 찬한 것으로 열전과 묘지명에 비해 상세하지만 후대에 편찬된 것이기에 경력(經歷) 및 사실(事實)의 기술에서 전후가 바뀐 것이 많이 찾아진다.
이들 세 자료는 특정부분에서는 소략한 점도 있고, 전후의 사실이 뒤섞여 있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고려사』세가․『고려사절요』의 내용, 아들 金恂의 묘지명을 위시한 기타 자료, 그리고 몽고․일본의 자료를 추가하여 김방경의 주요한 행적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2) 민현구,「몽고군․김방경․삼별초」『한국사시민강좌』8, 1991.
3) 권선우,「고려충렬왕대 김방경 무고 사건의 전개와 그 성격」『인문과학연구』5, 동아대학, 1999.
4) 박재우,「김방경」『한국사인물열전』, 돌베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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