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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2007. 5. 1.3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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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3 조회1,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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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이익주(천안공전교수)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 명쾌한 설명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 필요는 없을까? 실제로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1270년대를 중심으로 앞뒤 시기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을 좀처럼 지우기가 어렵다. 그 앞뒤의 상황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야별초’를 조직하다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것은 대략 1220년대의 어느 때이며, 당시는 최씨무인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이다.

여기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삼별초의 모체가 되는 야별초가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여기에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로 만들고 전투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삼별초의 성격을 밝히기에 앞서 야별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도적과, 도적을 막기 위한 경찰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하지만 도적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여기에 ‘도적의 사회사’ 가 있다. 최우가 야별초를 두어 막으려 했던 도적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을 막기 위해 따로 군대를 설치했을 정도라면 당시 도적의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특별 군대를 만들어야 할 만큼 도적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인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쟁탈전에 급급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자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다. 망이. 망소이나 김사미. 효심 등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여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1196년(명종 26) 에 최충헌이 집권하여 항쟁을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전처럼 군현을 단위로 하는 대규모 항쟁을 벌이지 못하고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모여 활동하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적, 산적, 화적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당시 사료에는 초적이란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최우가 야별초를 만들어 진압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즉, 야별초가 상대했던 도적이란 그저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라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에 저항하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별초의 모체가 된 야별초의 반민중적 성격이 있다.

더욱이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핵심적인 군사력이었다. 최우가 야별초를 조직한 뒤로는 거의 집권자의 사병처럼 이용되어 백성들의 항쟁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녹봉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많이 받고 권력자로부터 보너스도 두둑하게 지급받았으며,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항몽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본래 역할은 최씨정권을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가 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최씨정권, 대몽항전을 정권유지에 이용하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려는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 때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초적들조차 자원하여 몽고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처럼 몽고의 1차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말 그대로 총력적이었다.

몽고군이 일단 돌아간 뒤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인정권은 항전을 주장했고, 문신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희망하였다. 당시 최씨정권의 항전론은 정권 유지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즉, 최우는 몽고와 강화를 하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게 되리란 점을 경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몽고와의 전쟁 상태를 이용하여 정권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씨정권은 전쟁 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항쟁론과 강화론의 대립은 일단 강화도로 천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표출되었다. 그러나 천도와 그를 통한 항전은 최씨정권의 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였고, 따라서 강화를 전제로 천도에 반대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함으로써 이제 대몽항쟁은 고려의 국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천도는 지배층 안에서조차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최씨정권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욱이 백성들에게는 이 천도가 국왕과 소수 권력자들의 안전만을 지키려는 일종의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항전에 대한 공감대는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국왕과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갈 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몽고군을 피해 가까운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따라서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끈질기게 항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또한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재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졌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다. 단적인 예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몽고, 정부, 민중의 삼각 대립

한동안 뜸했던 백성들의 항쟁도 다시 나타났다. 전쟁 중이던 1236년 경에 전라도 일대에서 초적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내세워 봉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이것은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에 침입했다 돌아간 직후에 발생하였는데, 전란으로 정부의 통치력이 이완된 틈을 이용하여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정부, 몽고 침략자, 그리고 고려의 일반 백성들이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는 삼각형의 대립 관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문신관료들이 주도한 이 흐름은 일찍이 강화 천도에 반대하면서 큰 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조심스럽게 표현된 적이 있었지만, 최우의 항전 의사가 워낙 강경하여 받아들여질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나자 문신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명분으로 강화

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마침 이 무렵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정권이 내부의 분열로 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몽고에서도 요구 조건을 누그러뜨려 결과적으로 강화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졌다.

강화론이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설득력을 더해가고,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고, 이들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강화 이후 고려에는 강화파 문신들과 무인정권의 잔여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강화의 대세 속에서 항전을 주장하던 무인정권의 입지는 불안하였다. 더욱이 몽고에 파견되어 친히 강화 교섭을 벌였던 태자가 왕위에 올라 친몽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무인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인정권 내부에서는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다시 항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고, 무인정권 안에서도 강경파였던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하고 이어 국왕마저 폐위한 뒤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고가 군대를 보내 시위하면서 원종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임연의 원종 폐위는 강화 이후 궁지에 몰리던 무인정권이 감행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한편, 몽고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는 등 친몽고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띠어 갔고, 급기야는 직접 몽고에 가서 무인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종이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강화도의 무인정권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강화도에서 이에 호응하는 정변이 일어나 무인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270년의 일이다.

 

또 하나의 고려 정부,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무인정권의 붕괴는 1170년 무인정변으로 탄생한 하나의 정치체제가 꼭 100년 만에 종식되었음을 뜻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외세의 간섭이 전개되리란 것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였다. 그 간섭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점에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자리잡고 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무인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국왕과 강화파로 구성된 정부는 삼별초를 없애고 명단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모여서 새 왕을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다. 이어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천도’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한다.

진도에 자리잡은 삼별초 정부는 이듬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273년까지 고려.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도 거제도와 마산, 김해, 동래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나주와 전주, 심지어는 인천 근방까지 진출하여 위력을 떨쳤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개경에서는 관청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몽고에서 파견한 다루가치와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들어가 삼별초에 가세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곧이어 경기도 화성군의 대부도 사람들이 개경 관청 노비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섬 안의 몽고군을 죽이고 합세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는 이와 같은 사례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의 세력이 왕성해지자 각 지방 사람들이 항복하고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왕을 진짜 국왕으로 섬겼다고 한다.

사실 당시 삼별초에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도로 내려가면서 용손, 즉 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왕실이 12대째로 끝나고 남쪽으로 내려가 황제의 서울을 세우리라는 참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강제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던 상황에서 그처럼 백성들이 삼별초를 지지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일 따름이었고, 몽고와의 강화는 새로운 권력층과 침략자의 결탁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몽고 침략 및 지배층의 과중한 수탈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로서는 이제 몽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오고 또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그려졌던 삼각형의 대립 관계가 이제 고려정부. 몽고 연합 세력과 반몽고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단순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 삼별초의 항쟁 대상과 일치함으로써 그에 호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행된 삼별초의 항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항쟁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 무인정권의 잔존세력이 일으킨 정치적 반란이고, 다른 하나는 12세기 말 민란의 전통과 대몽항쟁의 전통을 계승한 백성들의 항쟁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 위의 것이며, 그 의미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결탁한 지배층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의한 제주도 함락은 삼별초뿐 아니라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의 항쟁이 진압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성들의 항쟁이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무력 기반이었고, 권력 내부의 정쟁에서 무인정권이 패배하자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 해답은, 삼별초가 떠받들고 있었던 무인정권을 회복하고, 가깝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이 몽고와 결탁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이 대몽항쟁의 연장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인정권의 앞잡이였던 삼별초의 전력이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정변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삼별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내려져 왔다. 이것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현실에서 삼별초의 대외항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5. 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결핍된 정통성을 만회할 목적으로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란 구호를 내걸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는 고려의 무인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상징을 조작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 조직이 무인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최씨정권의 항전론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유지를 위한 것이었나를 구분했던 것처럼, 삼별초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1세기를 바라보며‘세계화’를 외치는 오늘에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민족만을 앞세우다 보면 전체주의나 국수주의 같은 극우의 논리로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이 반민중적인 존재는 절대로 민족적일 수 없다. 독재자가 표방하는 민족주의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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