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선조 筆蹟과 墓誌銘을 찾아서-제2회 안사연 학술발표회(2002. 1. 27. 김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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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4 조회1,901회 댓글0건본문
2002. 1. 27 (일)
선안동김씨 사이버학술대회
- 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
고려시대 선조 筆蹟과 墓誌銘을 찾아서
주제발표 : 金 柱 會
(충렬공 25세손, 안렴사공 21세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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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先안동김씨 詩·書·畵 찾기] 추진경위
▣ 우리 문중의 선조들과 관련된 자료를 산발적으로 단편적으로 수집하다 보면 전체적인 현황이나 윤곽을 파악하기가 어려움
- 우리 문중의 선조들께서 남기신 詩·書·畵, 즉 시와 글과 필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일정기간 테마를 정해서 여러 종친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수집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시작하게 된 것임
- 한 두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여러 종친들께서 역할을 분담하여 기회와 시간이 닿는대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 서로 격려도 되고 보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됨
▣ 수집할 자료는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할 수 있음
Ⅰ. 고려시대 선조 필적과 묘지명
Ⅱ. 조선시대 선조 필적과 묘지명
Ⅲ. 선조 문집과 선조 글이 수록된 문집
Ⅳ. 고려시대 선조 시문
Ⅴ. 조선시대 선조 시문
▣ 옛 필적은 주로 비문이나 탁본에 남아 있어서 금석학 책자를 보게 되는데, 금석학 관련 책자에는 비문 외에도 묘지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 그래서 비문 필적을 찾는 기회에 묘지문도 같이 찾고자 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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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문집은 우리 문중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 외에
전국 유명 도서관이나 박물관, 고서점 등에 소장된 것이 많이 있음.
- 내용 파악까지는 어렵더라도 어느 곳에 어느 선조의 문집이
소장되어 있고, 대략 내용은 어떤 것이고, 혹 번역본이 있는지 정도의 현황만이라도 파악하여 정리하고자 하는 것임
- 이렇게 우리 선조 관련 필적과 묘지명과 문집을 정리한 후에
다른 고서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선조관련 내용을 포함해서 선조들깨서 남기신 시와 글을 최종 정리한다면 우리 가문의
詩·書·畵를 어느정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됨
▣ 구체적으로 찾을 필적
- 1) 비석 또는 단석 실물, 2) 탁본 실물, 3) 탁본첩,
4) 비문 내용
<상서공 김효인>
1-1. 보경사 원진국사비 (1224, 김효인 書)
1-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1238-1241 또는 1250, 김효인 書)
1-3. 도갑사에 있었다고 하는 김효인 書 필적
<충렬공 김방경>
충렬공 김방경 어고필적 [상서공 유묵 원진국사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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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김순>
2-1.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2-2.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2-3.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척약재 김구용>
소천서원 청원정
▣ 구체적으로 찾을 묘지명
- 1) 묘지명 실물, 2) 묘지명 사진, 3) 묘지명 탁본첩, 4) 번역본
묘지-1. 김은열 묘지명
묘지-2. 김방경 묘지명
묘지-3. 김순 묘지명
묘지-4. 김승용 묘지명
묘지-5. 김순처 허씨 묘지명
묘지-6. 김영돈 묘지명
묘지-7. 김묘처 민씨 묘지명
묘지-8. 김사렴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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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시대 선조 필적을 찾아서
1. 상서공 김효인 필적
1) 상서공 김효인 문헌기록
▣ 안동김씨 족보
公性嚴毅 善隸字 文章事業 傑出一世 事見勝覽
師事致仕英烈公琴儀 名冠士林 早年登第 世稱琴學士 玉筍門生
筆跡在 淸河內延寺 靈巖道甲寺 康津月南寺 遺基等地 而俱以君命書碑文
공은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니,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인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 둔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름이 사림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필적이 청하(淸河)의 내연사(內延寺), 영암(靈巖)의 도갑사(道甲寺), 강진(康津)의 월남사(月南寺) 등지에 있는데, 모두 임금의 명으로 비명(碑銘)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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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본관은 안동,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
성격이 엄하고 굳세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고종11년 甲申(1224)에 세운 보경사 원진국사비는 이송로가 글을 짓고 보문각 교감 김효인이 글씨 및 전액을 썼으니 청하 내연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글자체는 조금 살이 쪘으나 그래도 골력이 원만하고 굳세며 맑고 아리따워 사랑할 만하다. <서청>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서예부흥의 3대기수>
고종시대에는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따라서 서예도 중기말의 침체상태에서 재흥의 활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즉 고종대 반세기간에 서예부흥의 3대기수가 나타났다.
우선 문호 이규보를 비롯하여 집권자 최이, 한림학사 병부상서 김효인 등 3거두가 모두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 3대가 중에서도 김효인의 글씨가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書蹟도 두 개의 名碑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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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인은 일세의 文章家이기도 했었는데 文才, 書才를 兼全한 것이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글은 역시 이규보의 존재가 더 컸고, 글씨는 김효인이 더욱 빛나는 존재였다.
<김효인의 두 개 名碑의 書蹟>
본관은 안동,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서예를 잘 쓴 당대의 명필이었다. <書鯖>에서 그의 書風을 "字體雖微帶肉 而骨圓勁 淸婉可愛(자체수미대육 이골완경 청완가애" 라고 평하였다.
그가 쓴 書蹟이 보경사의 원진국사탑비와 송광사의 진각국사원소탑비에 유존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의 보경사 경내에 서 있다.
김효인이 碑書를 쓴 또하나의 진각국사 원소탑비는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 송광리의 송광사에 있다. 그러나 이 비는 일찍이 倒潰(도궤)되어서 斷石으 유존되어 있는데 비신 하부의 좌반부 뿐이다. 단석은 高가 3척8촌, 橫이 2척1촌인데 거기 잔존한 비문은 16행이다. 입비년대는 그 이듬해 (12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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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보경사 원진국사비>
비는 입적 3년 뒤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썼다. 김효인은 충렬왕 때의 명장 김방경의 아버지로 글씨에 뛰어났다.
따라서 이 비문은 구양순체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렸다.
<서예>
고려 중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트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보인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탄연의 문인 기준(機俊)은 탄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들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단속사 대감국사비가 바로 그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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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탄연의 서법으로 쓴 것으로는 운문사 원응국사비가 있으나 쓴 사람의 이름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12세기에 이르러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문인들은 모두 활기를 잃어 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 말기에 최씨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수한 작가로서는 유공권, 김효인 등이 있다.
김효인은 고종 때의 사람인데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물 제252호)는 탄연의 서법을 계승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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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서공 김효인 필적 탐구
1-1. 보경사 원진국사비 (1224, 김효인 書)
○ 비석 실물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물 제252호) 로 경북 포항 보경사 내에 위치
○ 탁본 실물
全面탁본 실물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보존)
- 소장기호 : 3993-1 (구 2317)
- 연대 : 1224 (고려고종 11)
- 소재 : 보경사 (경북 포항)
- 규모 : 172.7×103
<참고자료>
- 해동금석원 상
- 대동금석서
- 삼한금석록
- 조선금석교
- 조선금석총람 상 (1919, 조선총독부)
-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1984, 허흥식, 아세아문화사)
○ 탁본첩
탁본첩1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全面탁본과 部分탁본 (상1, 상2, 하1, 하2)이 있다.
※ 全面탁본의 맨 왼쪽 둘째 줄에 "將士郞大官署丞兼寶門閣校勘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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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첩2
[한국금석문대계]에 全面탁본과 部分탁본 1점이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있는 部分탁본은 [한국금석문대계]에
있는 部分탁본을 전재한 것인데, 비의 맨오른쪽 위 부분이다.
※ 全面탁본의 맨 왼쪽 둘째 줄에 "將士郞大官署丞兼寶門閣校勘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음
탁본첩3
[대동금석서]에 部分탁본 1점이 있는데, 이 탁본은 [국역 근역서화징]에 전재된 탁본으로 비의 맨위 중간 부분이다.
탁본첩4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속의 금석청완에 탁본 1점이 있는데 비의 어느 부분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항용종친 비디오 촬영>
<항용종친 확인내용>
가)1P:비명제목글씨(圓眞國師碑銘)를 원문의 글씨보다는 약 50% 축소된 글자로 제작. 좌우 2열로 나누어 3자씩 배열.
나)2P, 3P: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각 장 13행 8열로 약 200여 자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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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1238-1241 또는 1250, 김효인 書)
○ 비석 실물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보물 제 호)가 전남 강진 월남사지에 있는데
비석 前面 (이규보 撰, 김효인 書)은 깨어져 없어지고 後面(최자 撰, 탁연 書)은 일부 존재
○ 비 단석 실물
비 단석1
- 송광사에 있었던 비 前面 단석은 현재 소재 불명
- 조선금석총람에 송광사에 있다고 설명하고 게재한 비 단석 탁본이
있는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단석 실물과 같은 것임.
- 따라서 조선금석총람이 간행되는 1919년 이전에 송광사에 있었던 비 단석이 어느 시기엔가 (?광주박물관 개관시) 광주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으로 판단됨
-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 前面 단석 (78×98cm)
비 단석2
- 1972년 비 주변 대밭에서 민현구 교수가 수습한 비 前面 단석
(80cm*55cm)은 현재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비 윗부분 가로70 행중 4-21행, 세로34열중 13-43열에 해당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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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본 실물
全面탁본 실물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탁본( × cm),
- 소장기호 : 4014 (구 2285)
- 연대 : 1235 (고려고종 22) ?1250
- 소재 : 송광사 (전남 승주) ?월남사 (전남 강진)
- 규모 : 비신 결손 266×125
<참고자료>
- 대동금석서
- 삼한금석록
- 조선금석교
- 동국이상국집 권35
- 조선금석총람 상
- 한국금석문대계 1 (1983, 조동원, 원광대)
-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1984, 허흥식, 아세아문화사)
- 한국중세불교사연구 (1994, 허흥식, 일조작)
- 민현구, 음기 일고찰
○ 탁본첩
탁본첩1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全面탁본 1점과 部分탁본 4점 (상1, 상2,
하1, 하2)이 있음
※ 全面탁본의 맨 오른쪽 둘째 줄에 "將士郞 中書舍人 知制誥太子司義郞賜紫金魚袋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 가능,
※ 또한 비 後面 (1250, 최자 찬, 탁연 서) 에 진각국사의 문도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秘書監 金孝印"을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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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첩2
한국금석문대계 1권(전라남도편)에 部分탁본 1점이 있는데, 비의 어느 부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음
탁본첩3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는 김효인 書 수선사비 (송광사 진각국사 원소탑비) 탁본은 비의 위에서 아래로 7∼16행, 우에서 좌로 1○∼14열 부문의 45글자 탁본으로, 1972년 민현구 교수가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주변 밭에서 수습한 비 前面 비편과 8글자가 중복된 탁본임
○ 학문적 연구 동향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에 대하여는 학문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 허흥식의 [진각국사 혜심의 원비와 해석의 보완]
(계간 정신문화연구 제16권, 1993년)
- 민현구의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비음기에 대한 일고찰]
(1973 목포대학교박물관, [진단학보]36집, 서울 진단학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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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도갑사 필적 (김효인 書 필적)
○ 족보에 왕명으로 쓴 비명이 영암의 도갑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 으나 현재 어느 비인지 확인이 불가능하고 탁본이나 문헌기록등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음
○ 옛날에는 도갑사에 말사가 13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개밖에 남아 있지 않음. 추측컨대 없어진 10개의 말사중 진각국사와
관련된 말사 어딘가에 세워진 비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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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렬공 김방경 필적
1) 충렬공 김방경 문헌기록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본연. 본관은 안동. 학사 김효인의 아들. 벼슬은 평장사 상락공에 봉해졌다.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憂國如家의 김방경>
김방경(1212-1300)은 고종대의 명필 김효인 한림학사의 아들로서
부전자전의 서예 명문이었다.
본관은 안동이요, 신라 경순왕의 원손이다. 그런데 그는 나약한 시서풍류가가 아니고, 실로 우국일념의 고려 명장이었다.
그의 書蹟이나 금석문의 書蹟등 유존물이 없으나 <? 文齋 書畵譜>에 "志學善書(지학선서)" 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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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렬공 김방경 필적 탐구
2-1 상서공 유묵 원진국사비명 (충렬공 김방경 어고필적)
족보에 충렬공 김방경 御考筆蹟 [상서공 遺墨 원진국사비명]이 게재되어 있는데, 아버님이신 상서공 김효인께서 書하신 보경사 원진국사비 題額을 충렬공 김방경께서 써서 보관해 온 것으로 판단되는데, 다른 기록은 발견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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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영공 김순 필적
1) 문영공 김순 문헌기록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귀후. 본관은 안동. 상락공 김방경의 아들. 벼슬은 밀직부사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충렬왕24 戊戌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김순의 동화사 碑書>
김순(1258-13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 고려 명장 김방경의 아들이요 김효인의 손자이다. 그래서 3대 書家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35>에 의하면 "그의 천성이 寬厚하고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또 <金石評>에는 그의 書蹟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 탑비에 남아 있다. 동 비문은 김훤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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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代麗史資料集錄 (1997, 장동익)
제4절 불교에 관련된 기사
1.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85)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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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86)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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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제7절 元瓘(원관, =김승용의 장인)에 관련된 기사
1.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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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69)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70)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2)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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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영공 김순 필적 탐구
3-1.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 비 실물
현재 소재 불명
○ 탁본 실물
全面탁본 실물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 소장기호 : 4046-2 (구 2198)
- 연대 : 1298 (고려충렬왕 24)
- 소재 : 서울 柳正秀 藏 舊탁본
- 규모 : 154.5×84.8
○ 탁본첩
탁본첩1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 : 1점 (비편 4점을 모아 1장으로 탁본)
<참고자료>
- 대동금석서
- 해동금석원
- 조선금석총람 상
-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1984, 허흥식, 아세아문화사)
탁본첩2
대동금석서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 탁본으로 장서각 소장 탁본의 4조각중 좌측 아래 조각과 대동금석서 탁본 우측 위 4-5글자는 같은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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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첩3
금석청완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의 어느 부분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항용종친 비디오 촬영>
가) 3P:비명제목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
나) 4P: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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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 비 실물
현 소재 불명
문헌에 강원도 회양부 금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비를 찬한 閔漬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현재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 탁본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탁본인지 기록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3-3.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 비 실물 및 탁본
현 소재 불명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음
※원공은 김순의 조카인 김승용의 장인 원관이라는 분임
김방경-김선-김승용
김방경-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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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척약재 김구용
4-1 소천서원 청원정 (영환종친 게시자료)
13.문온공 친필 遺墨 암각문 .
*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김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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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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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고려시대 선조 묘지명을 찾아서
묘지명-1 김은열 묘지명
○ 소재 :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 조선정조 8년 (1784, 갑진)에 발견, 다시 묻음
○ 연대 : 광종19년 (무진, 968) ※추정
<참고문헌>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합 1982)
- 경주김씨세적보 (함흥경주김씨파보소 1925
-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은열 묘지명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김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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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이 묘지는 조선정조8년 (1784, 갑진)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명문은 매우 간략하며, 고려시대의 다른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형태와도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실제로 주인공인 김은열이 사망한 직후, 즉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묘지와 함께 의종4년 (1150)에 제작된 김경보(*경주김씨)의 묘지명도 함께 발견되었으므로, 이것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명문에 나오는 김은열의 졸년, 즉 술진년을 고려 초기에서 찾아보면 광종19년 (968)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묘지명이 작성된 연대도 일단 광종19년으로 추정해 두기로 한다.
명문에서 보듯이 김은열은 신라 경순왕의 8자중 제4자이며, 한편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외손자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전혀 나오지 않으며, 그의 자로 소개된 강릉군 김태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손들은 이후 번창해 갔는데 특히 무인정권 당시 활약하던 김봉모, 최이의 사위 김약선, 충선왕대의 재산 김혼 등을 유명한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은열의 묘소에서 정북서 5보 되는 곳에서 또 하나의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생 략> 이 명문은 경순왕의 제2자인 김황의 묘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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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황의 생몰년대나 묘지명 작성연대를 밝혀주는 기록이 전혀 없고, 명문의 내용 또한 일반적인 묘지의 기술형식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로 소개를 해두고자 한다.
▣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29. 대안군 김은열
은열공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시며 벼슬은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내셨고 대안군에 봉해졌다.
고려 현종 19년 서기 1028년 3월 4일 己丑에 졸하니 묘는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에 모셨으나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이조영조 8년 서기 1784년 갑진에 황가 사람의 투장으로 인하여 誌石이 노출되고 많은 부장품이 현출되어 다시 치분하고
헌종 15년 기유 서기 1849년에 후손인 유수 金鼎集이 비문을 지어 비를 세우고 안동김씨와 경주김씨 두 종중에서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국토가 분단되어 성묘의 길이 없고 수백만의 후손들이 오직 마음으로 추모할 따름이다.
자는 태화, 계령, 숙승, 렴, 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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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 소장 金殷說墓碑銘
- 奎 28013
- 金鼎集 撰, 1849년(헌종 15).
- 2매, 拓本, 92.3 x 31.5 cm.(大小不同)
고려초기의 인물인 金殷說의 墓碑銘을 탁본한 것.
제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1784년(정조 8)에 幽誌를 발견하고 改封하였으며, 1849년(헌종 15) 후손인 鼎集이 開城留守로 부임하여 墓碑를 세웠다고 한다.(윤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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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2 김방경 묘지명
○ 고려국상락공지묘지
○ 연대 : 충렬왕26년(원 대덕4년 1300) 경자 9월 일 李 (익재 이제현의 부) 찬
○ 소재
- 원래 묘지 : 확인 못함
- 필사 묘지 : 안동김씨대종회 (후손 윤회 書)
<영환종친 게시자료>
墓誌의 실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묘지문만 보첩에 전하여 옴
일설에는 능동 충렬공 묘소에 묻혀 있다고도 하는데 이도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음
<참고문헌>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고려사 104 김방경전
- 안동김씨대동보(서울 1979)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방경 묘지명의 발견장소 및 시기는 미상이며, 원래의 형태도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1980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에는 후손이 쓴 묘지의 필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묘지의 본문은 1행당 47자씩 규칙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안동김씨대동보1, 1980, p64, 서울> 이 필사는 1979년에 후손인 김윤회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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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구분은 원래의 묘지에 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므로, 본고에서는 이 구분을 따르기로 하였다. 아울러 동보에는 김방경의 묘지와 아울러 그의 행장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 행장은 묘지보다 약 네배가 넘는 분량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묘지명에 빠져있는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김방경의 입사 과정에 대하여 묘지에는
"기자호관 능어이간 이장군겸급사중" 이라고 하였으나
행장에는
"연16 이삼한공신태사대광일긍지음 선양온사동정 대정 수위태자부견룡 배산원겸식목녹사" 라고 자세하게 밝혀놓은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 104 소재의 김방경전의 기사와 대비해 볼 때 그 찬자는 이 행장을 원사료로 삼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행장은 지정10년(1350, 충정왕2년 경인)에 예문관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한 安震이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 104 김방경전에는 그의 입사에 대하여 "고종조 연16 이음보산원겸식목녹사" 라고 밝혀 놓고 있다.
그러므로 김방경의 묘지명을 사료로서 이용하려 할 때에는 그의 행장을 아울러 참조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김방경은 충렬왕26년(1300, 원 대덕4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3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제1남이 선, 제2남은 흔이며, 제3남은 다음에 소개할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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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3 김순 묘지명
○ 중대광판삼사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 김순 묘지명 병서
○ 연대 : 1321년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
○ 현재 소재
-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
에서 발견
<참고문헌>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고려사 104 김방경전 부김순전
- 안동김씨대동보 (서울 1979)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순 묘지명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
김순의 묘지는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은 몇 군데 결락된 곳이 있으나 대부분은 훌륭하게 판독되어 있다.
김방경의 제3자인 김순은 15세에 음서를 통하여 입사하였으며, 22세인 충렬왕5년(1279, 원 지원16년 을묘)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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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8년 (1321, 원 지치1년, 신유)에 사망하였는데, 許珙의의 녀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 영돈의 묘지가 이번에 소개할 차례이다.
▣ 안동김씨 파보 (안렴, 익원)
문영공 (김순)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오호라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未知何代而歲 壬午년 봄에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하여 奉審後欲爲[人+乃]舊守護卽 張姓之?惡非常勢
부득이 익년 癸未 봄에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옮겨 모시었다.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하였다.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 소유 선산 내의 한 葬地로 헌납한 것이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 用閔公所撰誌文記之 盖閔公 史家臣匠 且當時托契深厚記實楷白 以後歲傳聞搜記 不敢窺其萬一者也 但恨綠於剝落 間有缺者 不敢恣意補識 然一 猶知其全鼎 ?瑕不害於[王+業]玉云[弓빼고彌]
공몰후 625년 갑신 10월 일
문영공 21대손 若浩 謹識
문영공 21대손 舜默 謹書幷篆
문영공 22대손 達演 幷識
追記
그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 영역 300여평을 우리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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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4 김순처 허씨 묘지명
○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 병서
○ 연대 : 충숙왕복위년 (원 지순3년 1332) 이제현 撰 (이제현의 부 이진은 1300년에 충렬공 김방경 묘지명 撰)
○ 소재 : 확인 못함
<참고문헌>
- 익재난고7
- 동문선124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병서
- 조선금석총람 상 부록 608-609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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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5 김승용 묘지명
○ 선수 선무장군 관고려군만호 광정대부 밀직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 김공봉표조원하
○ 연대 : 충숙왕16년 (원천력2년 1329) 을사세삼월 갑술, 李 叔琪 述
○ 소재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No. 본 7886)
<참고문헌>
- 한국금석문추보 222-223
- 한국금석전문 중세하 236-238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승용 묘지명 ((No. 본 7886))을 필름 복사하여 받아 보았음. 박물관 관리카드에 김승용의 할아버지인 "김방경" 묘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확인해 보니 "김승용" 묘지명임
○ 김승용 묘지명 번역본 : 확인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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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6. 김영돈 묘지명
○ 유고려국추충병의익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상락부원군김공묘지명
병서
○ 연대 : 충목왕4년 (원 지정8년 1348) 8월 일 安震 찬
- 찬자인 안진이라는 분은 1350년 충렬공 행장도 찬하였음
○ 소재 : 조선순조8년 (1808, 술진)에 발견
<참고문헌>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 고려사 104 김방경전 부 김영旽전
- 안동김씨대동보(서울, 1980)
○ 김영돈 묘지명 번역본 : 확인 못함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영돈 묘지명
지정8년 8월 일, 安震 찬
김영돈 묘지명은 조선순조8년 (1808, 술진)에 발견되었는데 탈락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현재 족보에 수록된 명문 가운데에도 오식 혹은 탈자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金永暾은 고려사에는 金永旽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려사 104의 김방경전에 부전되어 있다. 그는 26세인 충렬왕31년 (1395, 원 대덕4년, 을사)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충목왕4년 (1348)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는 申汝岡의 녀와 결혼하여 2녀1남을 두었다.
김영돈의 묘지명은 그의 조부 김방경의 행장을 찬하였던 安震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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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7 김묘처 민씨 묘지명
○ 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
○ 연대 : 우왕5년(1379), 牧隱 李穡 씀.
○ 소재 : 묘소 및 묘지 실전 <영환종친 게시자료>
<참고문헌>
- 목은문집 19
- 동문선128 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
- 조선금석총람 상 부록 706-707
-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영환종친 게시자료>
척약재 선조의 어머니는 급암 민사평의 무남독녀이신 여흥군부인이심
여흥군부인 민씨 할머니의 묘소는 여주 남 십리 에 모셔저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실전하고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음.
여주 발산 근처에 수차 답사한 결과 비슷한 묘소를 찾았으나 조선 중기에 썼다는 다른 집안 묘이었음.
왜 비슷하다라고 추정하는냐 하면 고려시대의 묘는 거의 장방형의 사각 무덤인데 이 묘가 사각 묘이어서 고려시대 묘임에 틀림 없을 터이데 묘주인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라니 의심이 들었슴.
묘지는 고려시대는 주로 장망형이고 조선초기에는 육각형의 묘소가 잠깐 등장하다가(익원공묘소) 원형으로 바뀌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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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흥군부인 할머님 묘소도 찾지 못하고 묘지도 실물이 전해오지 않음.
문온공파에서는 포천 금수정 경내에 상락군 김 묘 할아버님과 여흥군부인의 설단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슴.
여흥군부인 묘지명은 동문선에 기록 되어 있고, 목은집에도 기록 되어있으며 문온공파 세보 권 1 에도 기록되어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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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향후추진 및 건의사항
1. 안동김씨 대종보회 題號를 상서공 필체로
안동김씨 대종회보 題號를 상서공 김효인 필체를 集子? 하여 인쇄하면 무엇보다도 의미가 클 것임. 기타 다른 문중 인쇄물 발간시 겉표지 書名에 활용하여 주기를 건의함
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설명문 정정 요청
전남 강진군청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 월남사지 석비 안내판, 국립광주박물관 등에 있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설명문을 보면 한결같이 "이규보 撰, 書者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수집된 자료 일체를 위 기관에 보내서 정정하여 주기를 요청함이 바람직
- "월남사지 석비"를 "월남사 진각국사비"로 정정
- "이규보 撰에 추정, 書者 미상"을 "이규보 撰, 김효인 書" 로 정정
3. 묘지명 번역본 추가 확보
김승용 모지명 실물과 원문, 그리고 김영돈 묘지명 원문은 있는데, 번역본을 확보하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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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국대장이안기 찾아 금강산과 중국, 일본에
1306년 민지 撰, 김순 書로 세워진 고려국 대장이안기의 현 소재는 불명이나 江原道 淮陽府 金剛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비를 찬한 閔漬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므로, 향후 금강산 답사 기회가 있으면 확인해야 할 것임
참고로 고려국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함
또한 문영공 김순께서
1306년 書하신 <高麗國大藏移安記>는 중국인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에 실려있고
1314년 書하신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도 중국인 이? 편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이의 확인작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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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묘지 심층분석을 통한 족보내용 수정
1) 족보에는 기록이 없고 묘지명에 새로운 기록이 경우
고려시대의 묘지석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론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정간공 김영후의 1자 김천의 아들 4형제인 사겸, 사렴, 사안, 사형의 경우, 사겸과 사렴은 사서나 문집에서 족보에서 행적을 찾아 볼 수 없는데
○ 김사겸은 족보에는 判事를 지내고 배는 한공의의 딸이고 자 瑀는 府使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인 [한공의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569-18, 277. 한공의 묘지명>
이 묘지명은 공민왕 14년 (을사, 1365)에 만들어진 것이고, 내용은 목은문고 16에 실려 있는데
여3인 皆先沒 종부령김사겸 삼사우윤이창로 군부판서 염흥방 其壻也
孫남 4인-----
外孫남 金禑權務 여 2인 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서 김사겸이 1365년에 종부령( ) 이라는 벼슬(?품계)을 지내고 있고, 그의 아들 金禑가 권무라는 벼슬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들 이름이 족보에는 瑀로, 묘지명에는 禑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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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렴은 족보에는 문하시랑 안렴사를 지내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인 안원숭의 외조부인, 즉 처의 외증조부인 [김태현 처 왕씨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559-14,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 이 묘지명은 공민왕7년 (元 지정18년, 1358)에 만들어진 것이고, 광산김씨족보 (전남보성, 1934)에 실려 있는데
長女 適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安牧
孫남 3인-----3次회조 중성시 충용위 호분별장
外孫 남6인 안원숭 군부판서 진현관 -----
外曾孫 남15인----- 여 17인-----적 비서감 김사렴----- 라고 기록되어 있어
김사렴이 1358년 (*28세쯤) 에 秘書監( )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김사렴의 1자인 김간은 족보에는 안렴사를 지내고 배는 김회조의 딸로 되어 있다.
그의 장인 김회조의 장인인, 즉 처의 외조부인 [윤해 묘지명]을 보면 <고려묘지명집성 p608-32, 윤해 묘지명>, 이 묘지명은 우왕6년 (경신, 1380)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내용이 목은문고 18에 실려 있는데,
생 4남2녀-----여 장적 판내부사 김회조 차적 지여흥군사 류원무 손남녀 약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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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생 3남4녀 장남왈첨 문하주서 차왈우 차왈분 幼 여적 호군김간 餘皆幼 라고 기록되어 있어
1380년에 김간은 護軍( )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족보와 묘지명의 기록이 다른 경우
○ 충렬공 김방경의 증조 김의화와 조부 김민성의 관직을 보면
<안동김씨 족보에>
義和는 위위부 주부 (예부시랑)에 추봉
敏成은 문과, 한림직사관 겸 장치서령을 지내고, 상서 우복야에 추봉 라고 기록되어 있고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曾祖는 사호 벼슬을 지내신 義和요 贈검교 군기감이시고
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 敏成이시며 贈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이시고
모두 公으로 인하여 추봉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리가 필요하고
○ 김승용의 어머니, 즉 충렬공 김방경의 장자 김선의 배위는
<안동김씨 족보> 설안의 따님으로
<김승용 묘지명> 설인검의 따님으로 되어 있어,
같은 사람으로 이름이 바뀐 경우인지, 다른 사람인지 정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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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족보와 묘지명 중 한 쪽 기록이 누락된 경우
충렬공 김방경의 사위 기록을 보면
<안동김씨 족보>
1)조변 2)경수 3)권윤명 4)채홍철로 되어 있고 채의는 묘지명을 참고하여 부기하여 놓았고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공의 배위는 기거랑 지제고 朴益旌(박익정)의 따님으로서 3남 3녀를 나셨으니
딸 한분은 참지정사 趙季恂(조계순)의 2자 趙 (조변)에게로 출가하였는데 조변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를 지냈다.
둘째 따님은 지첨의부사 金光遠(김광원)의 장남인 조현대부 신호위 보승장군 金元 (김원충)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 權允明(권윤명)에게로 출가하였다.
전취 박씨는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를 再娶하여 딸 한분를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 蔡宜(채의)에게로 출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족보의 경수와 묘지명의 김원충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규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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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 출토 墓誌銘에 관심을
아래 열거하는 자료들을 보면 고려시대 墓誌들은 대부분 개성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개성주변 연천에 능이 있는 경순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은열, 김황 등의 묘지가 개성에서 발견된 바 있고, 충렬공 김방경의 아들이신 문영공 김순의 묘도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된 바도 있다.
따라서 경순왕에서 안동으로 이주하기전까지의 선조들(시조 김숙승과 누락된 대수의 선조 등)의 묘와 충렬공이후 실전된 선조들(김선, 김흔, 김영후 등등등) 의 묘도 개성 주변에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충렬공의 부친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고려가 망하는 충렬공의 현손대까지 중앙무대인 개성에서 활동하시고 묻히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경순왕에서 충렬공까지의 代數문제나 墓위치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남은 방법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에서 출토되는 墓地銘을 발견해서 기록을 얻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안타깝게도 북한에서 개성주변의 墓 등 고려유적이 도굴꾼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는 일간지 기사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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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흥식의 [한국금석학의 연구현황과 방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탁본보다 墓誌의 실물이 현존하고 있다. 墓誌는 일제시에 개성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청자가 도굴당하는 과정에서 수습되었으며, 조사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래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으니 誌石은 국립박물관으로 서책과 고문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분리하여 이전되었다.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을 시기에 학예관으로 있던 이난영 선생을 중심으로 이를 탁본하여 판독하고 그 결과가 한국금석문추보 (이난영, 한국금석문추보, 중앙대출판부, 1968) 로 간행되었다.
판독을 위하여 제작된 두 질의 탁본에서 한 질은 서울대도서관으로, 다른 한 질은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수장하였다.
▣ KBS 역사스페셜
○ 마의태자 편
"고려의 귀족들은 대부분 개성을 중심으로 살고 또 죽은 다음에도 예외없이 개성 주변에 묻힌다..경순왕 고려 건국당시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후대에 볼대 경순왕도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묻혀 그래서 무덤도 연천에 묻힌 걸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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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부인, 염경애] (방송 1999. 6. 19.)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시대 묘지석 대부분이 개성과 경기지방에서 출토됐다는 점이다.
무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무신정권기 이전의 묘지석 100여개를 조사한 결과, 이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묘지석이 수도인 개경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려의 지배계층은 중앙에 거주함으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릴수 있었다.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은 고려시대 형벌로써 간주되었다 이런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고려 귀족들은 살아서도 개성에 살았고, 죽어서도 개경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습니다.
▣ 도굴꾼‘우굴’개성(開城)유적 초토화 (2002.01.22, 조선일보)
인구 15만의 도시 개성은 고려의 500년 역사가 숨쉬는 고도이자 북한에서 유물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성은 곳곳이 벌집 쑤시듯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식량난이 심화되자 전문 도굴꾼은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 무덤파기에 나섰다고 한다. 주인 없는 오래된 묘는 물론 개성주변의 묘가 있을 만한 곳은 대부분 파헤쳐지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이 무덤에서 파낸 물건들은 현장에서 100∼500달러를 받고 넘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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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골동품 장사를 했던 이숙희(38·가명)씨에 따르면 도굴꾼들은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옛날 사대부의 묘는 관을 묻을 때 흙을 채에 걸러 보드라운 흙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관은 석비레(암석이 풍화돼 생긴 흙)와 생석회를 반죽해 콘크리트 치듯 밀봉하게 된다.
시멘트는 100년 정도 지나면 강도가 약해지지만 석비레는 100년이 지나도 더 굳어지는 특성이 있어 묘지에 안치된 물건들은 거의 원상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도굴꾼들은 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 부드럽게 들어가면 일단 좋은 묘로 판정하며 갑자기 굳은 곳에 쇠꼬챙이가 부딪히면 관이 있는 곳으로 짐작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무덤이 파헤쳐지는데 주로 수집되는 골동품 가운데는 「고려청자」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백자」는 이에 비하면 값이 떨어진다. 청자 외에도 노리개·부채·병풍·그림 등 옛날 것이라면 모두 거간꾼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수집된 골동품들은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일부는 평양의 고려호텔 등에서 비밀리에 외국인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이렇게 밀반출된 유물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수거해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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