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과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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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17-07-29 18:21 조회1,426회 댓글2건본문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과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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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2년(1589) 7월 중 현소(玄蘇)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종의지(宗義智)]가 일본사절단을 인솔하고 한양으로 들어왔다. 일본 천하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달라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조선 조정은 여러차례 이를 거절을 하다가 선조 22년(1589) 9월 정사에 서인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동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동인 허성(許筬) 등 통신사를 일본 막부가 있는 오사카로 파견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선조 24년(1591) 1월 귀국하였다.
통신사가 귀국하여 조정에서 보고하기를,
-황윤길(黃允吉) : “일본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였으나
-김성일(金誠一) : “일본이 조선을 침범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풍신수길 역시 잔나비상으로 두려워할 인물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보고를 하였고, 결과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이 우리 안동김씨와는 과갈(瓜葛)의 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으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통신정사 우송당 황윤길(黃允吉)]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5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72-15
황윤길[黃允吉, 중종 31년(1536)∼? ],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본관은 장수(長水), 고조는 영의정 익성공 황희(黃喜), 증조는 호조판서 호안공 황치신(黃致身), 조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황사경(黃事敬), 아버지는 현령 황징(黃懲), 어머니는 한경서(韓慶瑞)의 따님 청주한씨, 배위는 김곽(金钁)의 따님 안동김씨이다.
명종 16년(156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미스테리이다.
묘는 군부대 안에 위치해 있어 군부대의 허가를 득한 후 군부대의 안내에 따라 답사할 수 있다.
☞김곽(金钁)은 안동김씨 제학공 김익달(金益達)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김언홍(金彦弘), 조부는 장예원사의 김수형(金壽亨), 증조는 전농시주부 김철균(金哲勻)이다.
[통신부사 학봉 김성일(金誠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313-2
김성일[金誠一, 중종 33년(1538)∼선조 26년(1593)],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의성(義城), 증조는 김만근(金萬謹), 조부는 김예범(金禮範),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따님 여흥민씨, 배위는 권덕황(權德凰)의 따님 안동권씨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1년(156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순찰사를 겸하였는데 이 때 진주판관 김시민(金時敏)을 목사로 승진시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초석을 놓고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김성일(金誠一)의 8대조 문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은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손자 김승고(金承固)의 사위이다.[김방경(金方慶)-김흔(金忻)-김승고(金承固)-女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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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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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황보신의 형제인 황치신의 부인은 광산김씨 김철산의 따님(성천부사공 김명리의 외손녀)입니다.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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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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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허성의 동생은 허봉,허균,허난설헌입니다.
허균은 문온공후손 김대섭의 사위이고 김대섭의 아들인 김확(철원부사공)은 허봉에게서 수학하였습니다. 허난설헌은 서운관정공후손 김정립의 배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