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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을 다시 생각한다.-고운기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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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7-13 12:58 조회797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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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숲-고운기]김방경(金方慶)을 다시 생각한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몽골에 항거하던 삼별초 제압 민족적 수치의 인물로 평가받아
섬에 갇힌 백성 위해 농토 개간 여몽연합군 일본정벌 땐 고려 선봉장 맡아 적 격파
대국의 틈 끼어 난처할 때, 백성 먼저 생각해 이길 방법 찾고 죽기 각오하던 기백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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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쳐들어가기로 한 것은 11월이었다. 1274년 1차 정벌 때의 일이다. 태풍 같은 큰 바람을 피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태풍은 11월에도 불어온다.

 우리 쪽 선봉장은 김방경(金方慶)이었다. 62세의 노장, 몽골과의 전쟁 기간에 올린 전과도 만만찮았다. 서북면 국경 지휘관으로 백성을 이끌고 위도(葦島)로 들어가 청야(淸野) 작전을 펴던 때가 37세였다. 고려는 마을을 비워 점령군을 황당하게 만드는 이 작전을 전국에 걸쳐 쓰고 있었다. 문제는 섬으로 들어간 백성이 먹고 살거리였다. 김방경은 제방을 쌓아 평야를 개간하고 빗물을 받아 농사를 짓게 했다. 전쟁은 적과의 싸움만이 아닌 것을 김방경은 잘 알고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에 상륙한 지 열흘쯤 지나, 일본군이 돌격해와 김방경 부대와 충돌했다. 김방경이 화살을 한개 빼어 쏘며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일본군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 62세 노인의 기백은 그렇게 우렁찼다. 부하 장병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왜병이 크게 패하여 쓰러진 시체가 삼대가 깔려 있는 듯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돌연 몽골군 선봉장 홀돈이 “할 만큼 했으니 철군하자”고 했다. 김방경은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힘을 다하여 싸우니, 지금이 기회”라고 설득했다. 홀돈은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라며 듣지 않았다. 이때 홀돈 밑에는 홍다구라는 부장(副將)이 있었다. 몽골에 아부하여 그 앞잡이가 된 홍복원의 아들이었다. 홍다구는 김방경에게 질투라고 해야 할 경쟁심에 가득 차 있었다. 철군은 실상 그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크게 불고 비가 몰아쳤다. 태풍이었다.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부서지고, 속절없이 바다에 빠져 죽은 이가 셀 수 없었다. 일본인이 가미카제(新風)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이 바람은 사실은 11월의 태풍이었다. 육지에서 전투를 계속했다면 피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 김방경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필자의 학창시절, 최씨 무인정권의 몽골 항쟁을 맹목적으로 드높일 때, 그 무리의 마지막인 삼별초가 끝까지 몽골과 싸운 일 또한 얼마나 치켜세웠는가. 그런 삼별초를 제압한 이가 김방경이다. 당연히 그는 몽골의 앞잡이요, 민족적 수치의 상징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최씨 무인정권의 권력욕이 몽골전쟁의 원인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쟁으로 지키자고 했던 것이 진정 민족적 자존심이었을까.

김방경은 항쟁의 목적이 최씨 개인의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 보았으니, 한 나라의 신하로서 그 무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섬에 갇힌 백성을 위해 농토를 개간한 김방경이었다. 앞서 본 사례처럼 전투를 알고 승리하는 김방경이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4년 뒤인 1278년 2월, 홍다구는 김방경을 몽골에 대한 반역죄로 걸었다. 날씨는 차고 눈이 그치지 않는 날이었다. 자복하라는 국문에 김방경은 굽히지 않았다. 온몸에 온전한 곳이 없었으며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번이었다. 홍다구는 “김방경이 자복하면 죄는 한 사람에게 그치니 나라야 무슨 관계냐”며 고려의 왕을 꼬드겼다. 딱하기로는 왕이었다. 왕이 김방경에게 “비록 자복하더라도 몽골 황제가 사실을 밝혀낼 텐데,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하느냐”고 달랠 정도였다. 김방경은 말했다. “군인 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몸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나라에 다 보답할 수 없는데, 어찌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 홍다구를 향해 “죽일 테면 죽이라”고 소리친 김방경, 결국 대청도로 귀양을 갔다.

 김방경이 사면된 것은 그해 7월이었다. 3년 뒤인 1281년 일본 2차 정벌 때도 제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부대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대국의 틈에 끼어 난처한 적이 역사상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김방경의 시대는 그 가운데서도 심했다. 그러므로 나라를 지키는 길이 무엇인지 알자면 먼저 백성을 생각하고 싸움에서 이길 방법을 찾아두고, 마지막에는 죽기를 각오하는 기백의 그를 떠올리게 된다. 새삼 김방경을 다시 생각하는 까닭이다.

 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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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농민신문 7/12 기사 내용입니다.

김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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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이분께 연락해서 종보에도 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평택 아저씨께서 올리신 줄 잘못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중묵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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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한 글 이제야 읽어보았습니다. 다시한번 올려주신 귀한글 감사합니다.